<보 이즈 어프레이드>와 부성 기능 부재
눈을 뜬다. 푸르스름하게 물 들어가는 천장을 바라본다. 감색에서 청색으로, 붉은 주홍빛까지 커튼 박스에 걸친다. 멍하니 시선을 고정한다. 시점을 분간할 수 없다. 예전에 겪었던 기억을 회상 중인지, 지금 정말 자다 일어나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하루인지. 하루를 그렇게 불안으로 시작한다.
내가 이 장면을 이미 살았던가? 질문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나의 질문의 답을 위해 모든 걸 대조해 본다. 가스밸브를 잠갔는지, 약을 먹었는지, 메일을 보냈는지, 내 산수가 맞는지. 보도블록에 떼 지어 움직이는 개미가 보인다. 인파가 유독 많다. 누군가 인파를 헤치고 내게 곧장 다가와 주먹을 내지를 것 같다. 온갖 미디어에서 본 호신 방법과 함께 벌어질 일을 상상한다. 어쩌다가 시비가 걸릴까? 내가 잘못 뱉은 침이 그 사람의 왼발에 묻나? 내가 하던 전화를 오해하나? 그럼 바로 오른쪽 훅? 그게 아니라면 바로 뺨을 때리나? 겁에 질려 온갖 상상에 위축된 채 아무 일 없이 스터디 카페에 도착하지만 난 이미 지쳤다. 펼칠 일 없던 우산을 휘휘 저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비가 왔어야 했는데 하며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다. 어라, 집에 온 과정은 기억이 안 나는데 뭐 했지. 천장은 푸르스름하게 물 들어가고 있다.
나는 19년 11월 전역 후 곧바로 편입을 시도하여 예비 번호 1번으로 탈락했다. 직후 20년 3월 복학을 했지만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다시 휴학 후 편입을 준비한다. 두 번째 시도한 편입에서 다시 예비 번호 1번으로 탈락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한바탕 울고 그 슬픔이 다 끝난 줄 알았건만, 그 일을 계기로 나 자신에 대한 불신의 둑이 터졌다. 작은 숫자 계산도 믿지 못해서 두세 번 계산하는 건 예사고 내 기억도 믿을 것은 못 되었다. 저장된 기억에 대한 의심을 넘어서 현재 내 인지와 감각에 대해서도 의심했다. 내가 방금 지나오며 본 편의점 전단지에 적힌 내용이 이상해서 다시 돌아가 한참을 뜯어보기도 했다. 사람들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워졌다. 에어팟이나 지갑, 핸드폰 따위의 작은 소지품들이 가방의 정해진 자리에 없으면 패닉에 빠졌다. 물건도 제대로 정해진 자리에 두지 않는 놈을 무슨 수로 믿는단 말인가. 이미 머리에 들어있던 정보나 평가도 마찬가지. 내가 무언가에 가진 호감이나 비호감이 근거 없는 감정은 아닐까? 내 머릿속은 그렇게 한바탕 뒤집어졌다.
몇 번 공황발작을 겪고 나서야 나 자신의 불안정함을 인정하게 됐고, 개선하고자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도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내 결정의 주체마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기 때문에 또다시 실수를 하고 자책의 굴레에 빠진다. 나는 항상 나를 감시했다.
보는 불안하다. 겁에 질렸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 온갖 소음들, 간간이 섞인 고함과 비명에 귀가 아프다. 뉴스에서는 연신 살인마에 대한 이야기가 보도된다. 잠시만 거리로 나가도 누군가 다가와 주먹을 날릴 것 같고, 현관문의 안전장치들은 위험에 비해 약해 보인다. 약의 복용 방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큰일이 날 것만 같다. 세상은 온갖 위험 요소로 가득하다. 성공한 사업가인 어머니의 지원 덕에 보는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
아버지 기일을 맞아 어머니 집으로 가기로 한 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서려는데 문을 잠글 열쇠가 없다. 집을 잠가두지 않으면 온갖 위험이 성스러운 집안을 더럽힐 테니 절대 그대로 나갈 수는 없다. 결국 불안에 사로잡혀 어머니 집에 가지 못한다. 그다음 날,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보는 길을 나선다.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불안으로 가득 찬 보의 시선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지금 이게 상상이 아니라 현실로 벌어지는 일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보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확실히 일반적이지 않다. 그 사건들은 원인조차 모르기 때문에 더욱 당혹스럽다. 보를 둘러싼 사회는 지속적으로 보에게 폭력을 가하고, 보는 그 폭력을 감내하지 못하면서도 도망치는 결정조차 내리지 못한다. 항상 자신의 행동이 올바른지 판단하느라 결정을 유보한다.
그런 보도 원하는 삶의 모습은 분명 있다. 보는 어떤 유랑 극단이 보여주는 연극 장면과 자신의 상상을 더해 환상적인 경험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보가 꿈꾸는 이상적 삶에 대해 엿볼 수 있다. 상상의 연극에서 보는 두 부모가 모두 죽고, 그들의 애정에 제대로 보상해 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족쇄로 나타나 그를 묘 앞에 묶어둔다. 그러나 이내 충분한 시간과 애도를 통해 족쇄를 벗어내고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정착해 자신의 주제에 맞는 자리를 찾는다. 한 여인을 만나 사랑하며 세 아이를 낳는다. 여기까지는 꽤 평범하여 보라는 인간의 소시민적인 면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연극은 거대한 홍수를 일으켜 다시 보를 혼자 남게 한다. 홍수로 흩어진 가족을 찾아 오랜 세월 정처 없이 헤매는 보 앞에 천사가 내려와 보의 죄를 일깨워주며 이것이 벌이라고 말한다. 천사와 그의 대사 또한 보의 상상이라는 점을 참고하자면 보는 이미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다. 보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는가? 보는 무슨 죄를 지어 겁에 질렸는가? 그 죄는 겁쟁이 그 자체이다. 겁쟁이로 남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보는 자신에게 닥친 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지 못한 존재다. 그를 증명하듯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보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등장인물들이 자처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 또한 거절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그들이 보 대신 결정을 맡음으로써 자신을 보호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에 대한 벌인 듯 영화는 종종 불안이 어느 정도 보의 탓임을 인정한다. 불안을 핑계로 결정을 보류하고, 보류된 결정이 더 큰 불안으로 다가오는 그 굴레를 당장 보는 끊어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선택 자체의 책임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결정하는 자에게 주어진 책임이 뭐길래 그것을 두려워할까? 선택은 결과를 낳는다. 결과 뒤로는 판단이 따라오고 그 책임은 결정한 자의 몫이다. 보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판단이 두렵다. 그렇기에 스스로 소년으로 남아 면죄부를 얻는 것이다. 누가 어린이를 판단하고 질책할 수 있는가? 그러나 누군가는 항상 소년을 질책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다.
혼란들을 뒤로하고 결국 어머니의 집에 도착한 보는 떨어진 샹들리에를 맞고 머리가 사라진 어머니의 시신을 황망히 바라본다. 오랜만에 자신이 자란 집을 생경한 마음으로 다시 둘러본다. 자신이 자라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바라보다 도착한 벽에는 어머니의 이름 '모나 와셔만Mona Wassermann'을 딴 기업 "MW"의 연혁이 소개되어 있다. 기업의 주요한 상품들과 캐치프레이즈를 담은 광고지들이 시간 순으로 걸려 있으며 개중에는 보 본인이 장식한 광고도 있는 것으로 볼 때, MW에서는 보의 성장에 맞춰 면도기, 여드름 약 등을 개발해 온 듯하다. 아버지가 없이 자라 전달받지 못했을 아들의 남성성을 어머니는 기업을 통해 대신하고 싶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뭔가 점점 이상하다. 자신이 먹는 약부터 살고 있는 빌라와 주변 단지마저 재활 단지라는 이름으로 어머니가 조성한 곳이었고, 모든 직원의 얼굴 사진을 이용해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 속에선 익숙한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집에 침입하던 이들과 길에서 만난 이들의 얼굴이 모두 이곳에 있다. 하다 못해 어린 시절 좋아한 소녀 '일레인'마저 MW의 직원이다. 보의 세계는 어머니가 구성하고 통제한 세상이었다. 사실상 그녀는 보에게 신이나 다름없다.
사실 어머니는 죽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오지도 않는 보의 사랑을 시험해 보기 위해 실제로 가사도우미를 죽여 모나의 시체로 둔갑시켰다. 보는 도착 하여 어머니의 사체를 본 순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화내는 보를 향해 너를 키우기 위해 기업 MW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모나. 그 말마따나 MW는 부성의 상징이다. 어머니와 MW, 즉 모성-부성 결합이 규칙을 세우고, 평가하며, 보상 또는 징벌을 내리는 제도화된 권위로 나타난다. 체득된 감시체계는 직원이나 CCTV가 없더라도 스스로 작동한다. 보는 그렇기 때문에 약 복용 방법조차 어기게 되면 자신의 실수에 미치도록 괴로워하고, 다가올 결과를 스스로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제일 흥미로운 건 이 영화 내에서 '어머니'에 대한 묘사다. 이 영화에서 어머니는 바다로 묘사된다. 어머니가 장면에 등장할 땐 계속 바다, 물과 함께 등장한다. '어머니=바다(물)'라는 전제를 염두하고 영화를 보면 달리 보이는 것들이 있다.
첫째로 보의 욕조 장면에서 보는 나체로 욕조에 들어가 영화 내에서 몇 안 되는 편안한 모습으로 쉰다. 그리고 영화의 첫 시퀀스가 어머니의 양수에서 출산되는 아이의 시점으로 보는 장면임을 생각하면 이어지는 욕조 사투 장면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유사하게 구성됐다. 이는 보가 지금 다시 태어난 신생아와 다를 바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 안전은 동시에 감금이다. 물은 따스하게 본인을 감싸겠지만 탯줄이 아니고서야 스스로 호흡할 수 없게 한다. 이를 토대로 생각하면 크루즈 여행 도중 만난 일레인은 당연히 어머니의 영향 안에 있을 것이고, 이는 어머니의 집에서 보게 되는 옛 상품 광고에서 어린 일레인과 일레인의 어머니를 보게 되면서 확인된다. 그의 상상인 연극 장면이 해일을 맞이하며 다시 비극으로 돌아서는 것은 그의 내면에 이미 어머니가 신적인 권위로 자리 잡았으며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뒤바꿔놓을 것이라는 생각의 표현이다.
마지막 장면, 바다의 보트 위에 선 보를 대상으로 하는 좋은 아이 재판. 재판이 이어질수록 보는 좋은 아이가 아니라는 쪽으로 치닫는다. 보는 죽기 싫다며 어머니를 향해 외치지만 어머니는 묵묵부답. 재판이 보는 좋은 아이가 아님을 결론짓자 절규하던 보는 일순 무언가를 깨닫고 결심한 듯하다. 그리고 보트는 뒤집힌다.
보는 이제 규칙/평가/보상의 시스템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그에게 내려지던 좋은 아이 인증을 포기하고 인정함으로써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난다. 스스로 좋은 아이로 남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불안을 해결한다. 그 결정이 무엇으로 이어졌든 보는 종내에 자신의 불안이 무엇으로부터 오는 지를 이해했고, 불안의 원천이었던 어머니의 사랑에 다시 직접 마주하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이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가치 판단 자체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자. 영화의 제목인 'Beau is afraid'가 발음상 'Boy's afraid'와 유사하다면 부모의 사랑과 기대가 소년의 두려움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어른이 되지 못 한 소년이기 때문에 '보'='소년'으로 대상화되고 있다. 영화 내에서 보에게 내재된 주요한 두려움은 남근과 주체성을 향한다. 과보호가 그에게서 주체성을 앗아가고, 통제욕에서 비롯된 유전병에 대한 거짓말(성교를 하게 되면 죽는 유전병)이 남근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보는 소년으로 남아 남들과 동등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 관계나, 그 관계나.
이 모든 상황은 어머니가 선사한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다락방에서 마주하게 되는 족쇄에 묶인 늙은 모습의 보는 그 자체로 아직까지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에서 벗어나지 못 한 채 늙어버린 자신, 즉 주체성에 대한 두려움이다. 거대 남근 괴물은 어머니로 인해 부풀려진 자아, 또는 관계relationship에 대한 책임일 것이며, 즉 동등한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다. 어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두려움. 달리 말하자면 이 두려움만 해결된다면 그는 소년에서 어른으로 거듭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