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킬링 디어>와 윤리가 결합된 폭력적 부성
관객이 영화라는 세상에 빠져드는 건 마치 파리가 집 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어떤 작은 틈새로 들어갔지만 창문이 모두 열려있더라도 방향을 찾지 못하는 파리처럼 관객 스스로 영화의 세상에 들어갔을 때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들은 유독 그렇다. 그는 단순한 판타지적 명제를 이용해 세상을 구축한다. <더 랍스터>에서는 "연인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된다", <킬링 디어>에서는 "남의 가족을 빼앗은 자는 자신의 가족 중 하나를 바쳐야 한다" 같은 단 한 문장으로 플롯이 세워진다. 이 문장 하나가 작품 전반을 관통하며 등장인물들에게는 법이나 다름없고, 따라야 하는 이유나 징벌에 대한 원리조차 설명되지 않으므로 관객에게는 신의 율법처럼 다가온다. '왜'라는 질문은 금지되어 있고, 인간은 '결정'과 '결과'만을 가진다. 그에 대해 변호하거나 피할 수 없다. 영화는 이로 인한 인간상을 시뮬레이션처럼 정교하게 작동시키는데, 그렇게 낳은 행동과 결과들이 매우 현실적이다. 게다가 영화와 바깥의 구분이 단 한 문장으로만 나뉘어 모호하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가 사는 세계마저 더 기괴하게 보이기도 한다. 행동에 따른 명확한 결과가 제시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세상보다도 내게 닥친 재앙의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실 세상이 더 잔인할 때도 있으니까.
<킬링 디어>의 주인공 '스티븐'은 심장외과 의사다. 거기에 아들과 딸, 아내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있는 따뜻한 아버지다. 그런 그가 과거 의료 사고로 한 남자를 죽였고, 그 남자의 아들 '마틴'은 찾아온다. 마틴은 어떤 감정적 동요도 없이 조용히 선고한다.
"나의 가족을 죽였으니, 공평하게 당신 가족 중 한 명을 죽이세요.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죽게 될 겁니다."
주인공은 얌전했던 마틴의 입에서 나온 저주와도 같은 말에 당황하다 이내 분노한다. 그러나 마틴은 분노마저 이해한다. 그는 감정적으로 평온하다. 이것은 협박이 아니라 신탁인 것이다.
스티븐은 여전히 무시하지만 이상한 일이 점점 일어난다 가족들이 이유 모를 하반신 마비를 겪는다. 스티븐 본인을 제외하고. 가족들은 점점 음식도 먹지 못 하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대가로 죽게 될 것임을 직감한다. 스티븐은 결국 셋을 잃지 않기 위해 하나만 잃기로 결심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처음엔 눈에 띄지 않다가 말미로 갈수록 점점 커지는 것이 있는데, 바로 주인공 스티븐의 권위다. 스티븐은 심장을 다룬다. 한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권위에 요구되는 윤리 의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술에 취한 채로 수술을 집도해 마틴의 아버지를 죽였다. 단순히 실수라고 치부하기엔 그는 사과도 인정도 없이 윤리 없이 떠다니는 권위로 마틴의 새아버지 노릇 하며 무마하려 했을 뿐이다. 그는 결과로 보나 원인으로 보나 단순히 죄인일 뿐 권위라는 게 있을 자격이 없는데, 영화는 그의 권위를 점점 비대하게 표현한다. 죽음을 직감한 가족들이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를 질질 끌고 기어 오며 삶을 구걸하고, 스티븐은 아이들의 학교를 방문해 둘 중 누가 더 낫느냐며 선생에게 물어보기까지 한다. 스티븐에게 사활을 다루는 권위를 똑같이 쥐어줌으로써 마틴의 아버지 심장을 다루던 권위를 그대로 경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권위의 무게를 이제서야 인지한 스티븐은 시간이 없다. 하나라도 죽여야 나머지 둘이 산다.
스티븐의 세계는 올바른 관계에 관한 기본적 율법이 있다. 의사는 환자를 살리고, 환자는 의사를 숭배한다. 이런 간단한 보상의 관계처럼 남편은 생계를 책임지고, 아내는 가정을 돌본다. 아버지는 자식을 보호하고, 자식은 그에 감사한다. 이처럼 관계는 서로에게 올바른 보상이라는 균형 위에 서있다. 그러나 관계에 따른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을 때 그 세계는 어떻게 무너질지 스티븐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환자를 죽였을 때 자신의 혼란에 갇혀 사과할 줄 몰랐고, 그리고 그 징벌이 스티븐에게 이해 가능한 영역으로 다가온 것이다. "죽음을 갚기 위해 죽음으로 보상하라" 단순히 등가교환으로 얘기하면 이해 못 하는 스티븐에게 공평하게 가족의 죽음을 제안한다. 이것은 가족의 상실을 겪게 했으니 너 또한 가족의 상실을 겪어봐,라는 말과는 다르다. 그는 그의 권위를 통해 남의 가족을 상실시켰고, 그 징벌로 본인에게는 상실시킬 가족을 선택하게 하면서 그의 권위를 몸소 체험하도록 한 것이다. 권위 자체가 그에게 남은 벌이다.
그럼 왜 하필 세 가족 중 한 명일까? 자식이나 아내만으로 한정 짓지 않고 이 세 가족을 동등하게 놓은 이유는 뭘까? 마틴이 잃은 것은 '아버지'다. '아버지'란 여태 얘기했듯 한 가정을 책임지면서 문화권을 막론하고 큰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마틴은 그 가치를 걷어내고 가족 중 하나로 이를 치환한다. 이것은 마틴과 마틴의 아버지가 스파게티 먹는 모습이 같다는 사실로 유대되었으나 알고 보니 모두가 똑같이 스파게티를 먹는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어떤 것의 가치는 같은 것을 놓고 보더라도 다르게 책정된다. 마틴에게 '아버지'가 소중했다고 스티븐에게도 소중하리란 확신은 없다. 그러니 마틴은 관계 여하로 판단하지 않고 오로지 '가족'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죽어야 할 가족'을 선택하는 권위를 스티븐은 체험할 수 있다.
스티븐의 세계는 그때부터 균열을 일으킨다. 그는 의사라는 권위로 세상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진단할 수 없는 병은 없고, 측정할 수 없는 고통은 없다고. 하지만 그의 가족이 앓는 병은 진단표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무력해졌고, 신은 침묵한다. 그가 믿었던 모든 질서가 의미를 잃는다. 그리고 마틴은 묻는다. “이제 공평하다고 생각하세요?” 그 순간 스티븐은 깨닫는다. 그가 의사로서, 아버지로서 쥐고 있던 모든 권위가 결국 누군가의 죽음을 전제로 한 폭력이었다는 것을. 수술실에서의 그 한 번의 술기(術技)는 단지 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착각의 연장선이었다. “내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죽이는 것도 내 권한이다." 그 오만이 낳은 결과가 지금의 심판이다.
그의 가정은 병원이 된다. 식탁은 수술대처럼 차가워지고, 침실은 관처럼 고요하다. 그는 가족을 환자로 대하고, 아이들의 증세를 기록한다. 사랑은 진단으로 바뀌고, 공감은 처방으로 대체된다. 아버지로서의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통제와 논리로만 살아 있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마틴은 그 시스템의 결함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는 감정이 없는 스티븐의 거울이다. 둘은 닮았다. 둘 다 감정 없이 타인을 다루고, 둘 다 결과로만 세상을 해석한다. 마틴의 냉정함은 스티븐의 무감정이 낳은 그림자다. 스티븐이 죽인 건 마틴의 아버지가 아니라 마틴의 세계에 유일하게 존재하던 ‘권위의 근거’였다. 그 자리를 스티븐 자신이 채우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복수극은 아버지를 잃은 아이가 주인을 잃고 부유하는 권위를 남에게 덧씌우는 의식이다.
클라이맥스의 장면, 스티븐이 눈을 가리고 총을 드는 순간, 그의 손끝은 인간의 흔들림이 아니라 신의 냉정함을 닮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확률래도 누가 그 앞에 올 줄 알고 방아쇠에 손을 올릴 수 있는가. 그는 선택이 아니라 확률로 사랑을 분배한다. 총알을 맞는 사람은 단 한 명이지만, 그 불합리함이야말로 완벽한 정의라고 믿는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이는 아버지,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희생하는 남자. 이 얼마나 완벽한 논리인가. 그러나 이 완벽은 이미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그는 그 장면을 끝까지 목격한다. 스티븐은 마틴이 만들어낸 의식을 수행했고, 아이의 피를 뒤집어쓴 채 완성되었다. 마틴이 요구한 건 죽음의 수치적 균형이 아니라 스티븐이 스스로 권위를 덧입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신은 죽었고, 신의 자리를 아버지가 대신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이미 괴물이 되어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세계는 그대로다. 식탁 위엔 여전히 스파게티가 놓여 있고, 가족은 묵묵히 음식을 삼킨다. 마틴이 등장해 소스를 입가에 묻히며 말한다. “맛있네요.” 그 평온한 대사는 인간의 윤리를 모독하는 선언처럼 들린다. 도덕과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건 신의 흉내를 내던 인간들의 공허한 연극뿐이다. <킬링 디어>는 그 공허함을 끝까지 붙잡는다. 스티븐의 죄는 사라지지 않고, 마틴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틴은 여전히 살아있고, 가족은 더욱 스티븐에게 복종한다. 가족의 생명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가족에게 타자가 되었고, 권위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