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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즈 Jun 01. 2020

제3자가 부여하는 가해의 정당성

2020년 6월 1일

콜린 캐퍼닉, 나이키 <Dream Crazy> 프로젝트 중


2016년, 미식축구 선수 콜린 캐퍼닉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Taking a knee(한쪽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후 캐퍼닉은 미국 프로 미식축구 NFL의 구단 어느 곳과도 계약하지 못했다.

그리고 2018년 9월, ‘Just do it.’ 슬로건 30주년을 맞아 <Dream Crazy> 프로젝트를 진행한 나이키가 메인 모델로 캐퍼닉을 기용한다. 엇갈리는 반응 속에서도 대대적으로 캐퍼닉의 얼굴로 광고판을 장식한 나이키는, 결국 2019년 칸 광고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기에 이른다. 화면 전체를 꽉 채운 캐퍼닉의 얼굴 위로 새겨진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Believe in something.
Even if it means sacrificing everything.


신념을 가져라.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할지라도.






이번 미국 과잉 진압 사태를 보며 흑인들 역시 아시안을 차별한다, 그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시위는 폭동이다... 라는 이야기에 기가 막혔다.


혐오와 폭력에 왜 제3자인 우리가 정당성을 부여해주는가? 우리 역시 차별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권력’으로 삼아도 되는가? 그리고 공권력이 도와주지 않는 저항이 어떻게 순조롭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 만일 평화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더라도 권력자들의 개입을 통해 그들 모두가 ‘폭도’라는 이름으로 낙인 찍힐 수 있다는 걸 일제강점기와 광주 민주화운동과 동유럽의 봄과 홍콩 시위를 지켜본 우리가 어떻게 잊었단 말인가?


꼭 미워해야 하는 대상이 있어야 할까? 있는 그대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할 수는 없는 걸까? 왜 우리는 혐오에 혐오로 대항하지? 누군가를 증오하고 깔보고 죽여가던 사람들을 미워했으면서 또 다른 약자들과 상처 입은 자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짓밟는 거지? 넓게 생각하면 이제껏 우리가 겪었던 혐오 역시 ‘혐오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다는 걸 왜 모르지?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게 자연의 섭리이자 이치라고 하여도... 그걸 이유라며 들이밀기에는 ‘생각과 판단이 가능한 생명체인 인간’이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당연하게 입에 담아왔다. 고도화된 문명을 가진 사회 공동체는 어떤 순리가 희생자를 탄생시킨다면 그 순리를 지워내고 끊어내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 약자인 우리를 겨냥하는 혐오 역시 모든 이들의 눈에 부당해진다. 아니, 설령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그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 멸시받아서는 안 된다. 비단 인종과 관련된 문제를 넘어서도, 항상 말이다.


차별과 혐오와 불의에는 0.1프로의 정당성도 부여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0의 어긋난 정당성이 1로 성장하는 걸 막는 게 아니라, 10의 어긋난 정당성이 0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나가는 과정 속에 있다.



2020년 6월 1일, 짧은 글 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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