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예술의 종언, 모던 시대의 예술
독일관념론 철학의 예술은 ‘이념 내용의 감각적 현현[1]’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칸트(Kant, Immanuel)는 미적 판단 (미적 경험)을 통한 미적 타당성(보편성)을 이성 이념이라고 말하며, 예술은 정신과 물질, 자유와 자연의 동일성을 보여줌에 따라 분할과 이중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2].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는 윤리적 행실 동기로 부족을 이유로 칸트의 엄격한 ‘정언명령’[3]을 부정하면서 ‘놀이(play)’를 통해 현상계와 물자체의 통합을 통해 ‘자율적 사회성’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4].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은 예술(지적 직관)은 말할 수 없는 것(정신)을 제시(물질)함을 통해 자연에서 화해를 이룬다고 표현했다[5].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이성 중심의 플라톤(Plato)을 긍정하며, “예술은 진리를 예술의 감각적 형태로 드러내는 소명을 지닌다.” 예술은 사회를 단지 반성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반성에 대해 반성도 한다고 논했다. 따라서 예술은 ‘절대정신(주관정신)’의 매체에 속하는 것이다.[6] 칸트를 긍정하고 헤겔을 부정했던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rthur)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9)를 통해 이성은 인간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으며, 인생이란 인간의 욕망에 의한 결핍과 권태를 와다 갔다 하는 고통일 뿐이며, 이런 무익한 삶에 한 가지 예외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무관심적인 관조’ 아래 경험될 때 번민을 일순간 가라앉히는 위안을 제공하는 것이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예술은 본래 감각 매체를 통해서만 진리를 전달하기 때문에 형식과 내용이 서로 합쳐져 유기적 총체성을 이루지 못함에 따라 종교와 철학으로 변모된다고 주장했다[8].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종언은 소멸의 뜻이 아닌 예술 운동을 통해 이전의 예술 관념에 대한 반성을 말하고 있다. 모던한 시대의 예술은 자유에 대한 인식이자 사고를 뜻한다. 외면적 감각적인 삶과 내면적 정신적인 의식 사이의 화해를 표현하며, 동일한 내용을 표현하는 새로운 형식에 대한 부단한 모색이자, 동일한 형식으로 표현된 새로운 내용에 대한 부단한 탐색인 것이다. 단토(Arthur Danto)는 20세기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을 예로 들며 시각예술에서 물질적 제작이 갈수록 덜 중요해지고 관념과 의도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현상을 설명하였다[9].
에로스의 해방, 위대한 거부
허버트 마르쿠제(Marcuse Herbert)는 독일관념론의 철학가들 - 헤겔의 변증법, 사회이론으로는 마르크스의 노동의 소외 사상, 문명론으로는 프로이트의 에로스 사상을 통합하여, 현대의 고도산업사회와 산업문명에 대한 변증법적인 부정철학이론인 '비판이론'을 개진한 철학자이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가 표현의 창조성을 기계적인 대량생산으로 환원하며, 욕망을 사물화 하며 상품 물신주의[10]로 변모하게 하였다고 표현했으며, 자본주의의 합리화는 에로스(욕망)를 노동력의 성적 재생산이라는 기능으로 강등, 외국인 혐오, 인종 편견, 집단 히스테리로 표출된 파괴적 형태의 리비도적 업악을 조장하였다고 제언했다.[11]또한, ‘감각기능의 자기 승화’와 ‘이성의 탈승화[12]’를 통해 이성과 욕망은 노동 및 놀이와 화해될 필요가 있으며, 이는 억압과 불평등 없는 결핍의 극복에 기초한 ‘풍요의 질서’, ‘인간 능력의 자유로운 놀이’ 가운데 가능하다고 주장했다.[13] 그의 저서 『이성과 혁명』(Vernunft und Revolution), 1941.와 『에로스와 문명』(Eros and Civilization), 1956.을 통해 에로스(에너지)를 파괴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보고 억압하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와 공산주의의 교조주의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여러가지 제도를 전체적으로 부정해야만 인간의 해방이 가능하다고 논했다. 21세기 대중들의 심리는 ‘행복은 하지만 만족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소확행[14]은 알게 되었지만, 삶 전체는 왜 만족할 수 없을까? 에로스가 너무 억압되어 잘 발현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쿠제가 말하는 에로스는 에너지 중의 에너지이며, 창조적 능력이고 혁명 시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능력인 것이다. 특히, 『일차원적 인간』 (One-dimensional Man), 1964.에서는 고도로 발달된 산업사회에 나타나는 인간 소외 문제를 다뤘다. 현대에서 인간은 억압된 현실을 비판하는 힘(이성의 비판력)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내적 차원(內的次元)을 상실하게 되고, 나아가 의식의 일원화(一元化)에까지 다다르며, 결국 문화가치와 기성질서가 동일화 하는 일 차원적인 문화와 사고(이데올로기)에 도달한 것이다. 이때 자본주의의 소비 관행을 통해 청중은 자유의 실재가 아닌 모조품인 수동적인 ‘행복한 의식’을 갖게 되며, 노동은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실현이 아니라, 소외(外化)로 바뀌어져 버린다. 결국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화와 개량된 자연 세계는 이제 인간에게 적대적인 권력이 되어버렸다. 마르쿠제는 세상을 바꾼 3M[15] 중 한명으로서, 더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거부해서 환경과 인간을 변화시키는 위해 모든 권위에 저항한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의 학생과 근로자들이 연합하여 벌인 대규모 사회변혁운동에서 “시멘트(사람들이 만든 기존의 모든 가치) 밑에 모래(자연, 본래적인 가치)가 있다. 시멘트를 걷어 내고,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한 결과, 성의 공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는 예술의 과제는 ‘자유에 대한 비판적인 전망을 하는 것’ 즉 세상을 바꿀 용기를 주는 지각, 경험, 행동의 대안적인 지평을 환기하는 것이라고 논하며, 예술이 다시 일상의 노동 속으로 들어옴으로써 사회 전체를 명료화 할 수 있도록 삶이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16] 아도르노(Adorno, Theodor Wiesengrund)는 “예술이 자기 충족적인 작품의 형식 가운데 자율성을 보존할 때 사회에 가장 비판적인 것으로 남는다.”는 예술이 자기 자신을 가능케 한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고 그 조건을 당연 시하지 않을 때, 세계의 불의를 낳은 진짜 원천을 폭로하고 신비화 하지 않을 때, 잠재적인 진실됨으로 해석된다.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사이의 모종의 양가, 예술
정신분석학, 현상학, 실존주의 같은 20세기의 다른 지적운동과 결합된 20세기 인문주의적 맑스주의의 예술 작품은 자신을 가능케 하는, 스스로 사유하는 주체로서 사회적 조건을 설명하는 ‘자기반성적인 self-reflective 대상’이다.[17] 따라서, 예술 작품은 외적인 사회법칙, 즉 작품의 사회적 용도와 소비 기능에 반하여 자기 자신을 고수하는 ‘미적 자율성 (예술 자율성)’이 보존되어야 한다. 예술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사이의 모종의 양가이며, 유토피아적 열망(모든 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을 담고 있는 동시에, 절대로 불가능함을 인지하며 현실적인 고통과 불의를 보상하는 기분으로 전환(프로이트의 승화) 될 때 이데올로기가 된다.[18] 그런 맥락에서 대중 문화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닌, 문화가 고급 ∙ 저급으로 분화된 것 자체를 한탄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합리화된 자본주의사회에서 이러한 분화가 소외 및 사물화 조건으로 변형되거나, 원자화 된 구성원들 사이에서 사회의 가치 평가적인 소통의 지평이 순전히 주관적인 소비 행위로 환원되는 지점 그리고 문화생활을 양적 등가의 소비재들의 총합으로 환산 시킬 우려가 있는 산업자본주의의 일정한 구조를 비판하였다.[19]
[1] 현현: 명백하게 나타냄
[2]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역,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182
[3] ‘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어떤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그런 명령'이다. 그 자체로 윤리성의 법칙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언 명령 [kategorischer Imperativ]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해제), 2006., 김재호)
[4] ‘미적 교육’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역,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p.184~185
[5]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역,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185
[6]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역,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188
[7]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역,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p.186~187
[8]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역,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p.188~189
[9]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역,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p.189~190
[10] 인간이 상품이나 화폐 따위의 생산물을 숭배하는 현상
[11]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역,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215
[12] 승화: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가 예술 창조나 지적 작업처럼 전혀 성적이지 않은 활동에 쏟아붓게 되는 과정인 프로이트의 개념
[13]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역,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215
[14]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 또는 그러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
[15] ‘3M (마르크스, 마오쩌둥, 마르쿠제)이 세상을 바꾼다’
[16]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역,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p.215~216
[17]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역,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176
[18]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역,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177
[19] 오스틴 해링턴, 정우진 역, <예술과 사회 이론>, 이학사, 2014, pp.178~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