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 박정태 역, <지식인을 위한 변명>, 이학사, 2007
“너무 잘해주지마 … 대충해. 나도 대충하는 중이야. 영희가 시설로 돌아갔을 때 나를 잊을 수 있을 정도만 … 더 잘해주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 상처 덜 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15화에서 다운증후군과 조현병을 앓고 있는 쌍둥이 언니 영옥을 버거워하는 고아 영희가 자신을 사랑하는 정준에게 말하는 부분 중 일부다. ‘대충’의 사전적 정의는 ‘대강을 추리는 정도로’이다. 우리는 ‘대충’이 만연한 삶을 살고 있다. 특히 내가 보고 싶지 않고 모르고 싶은, 감당하고 싶지 않은 소외 계층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적 이유를 가져다 대면서 마음 편히 피할 수 있는 이유를 하나 둘 씩 찾는다.
“영희 어쩌면 일반학교에서 계속 공부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었어. 일반학교에서는 젤 거부하고, 특수 학교는 멀고, 시내 가까운데 특수 학교 못 짖게 하고 … 대체 날 더러 어쩌라고? 모자란 애는 함께 살 수 없는 세상이니까. 내가 아까 그런 사람들 보면 무슨 생각하는 줄 알아? 제발 영희 같은 애를 낳아라. 아니면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지거나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나 되라.
영옥은 정준에게 울부짖으며 자신과 영희를 대하는 사람들과 사회에 대해 토로한다. 이러한 일들은 허구가 가득한 드라마 세상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 가까이에 깊숙이 만연하고 있는 현상들이다. 불과 7일 전 뉴스에서는 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에서 40대 여성이 발달 장애가 있는 6세 아들과 투신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들과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만큼 이 사회에서 발달 장애아를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 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5년 전에는 강서구 가양동에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위해 장애학생 부모들이 무릎을 꿇었다. 지역주민의 반대 이유는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박사 과정을 하고 있는 소위 ‘배웠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나는 어떠 한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 지성인,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말한 것과 같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장서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을까? 나는 내 딸의 기념일 마다 내 딸 아이에게 선물을 사주는 대신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 아픈 아이들의 치료를 위해 기부를 한다. 그리고 내 딸의 옷, 장난감, 신발 등을 필리핀의 쓰레기 마을이라고 불리는 빠야따스 난민캠프의 아이들에게 보낸다. 우리 아이가 지식인이 되었을 때,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사회를 돌보고 보편화를 위해 활동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 에서다. 그러나 정작 내 아이의 학급에 장애인이 있다면? 그 아이와 친구가 되어주라고 진심으로 말하고 그 관계가 영원하도록 응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기부는 없는 상황에서 내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가 이미 다 갖고 남는 부분에서 하는 것이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내 아이에게 주기 이전에 새 것을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가 다 쓰고 이미 컸기 때문에 쓸 수 없는 것들이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 명품을 살 때 조금은 스스로 마음 편하고자, 사회 활동을 할 때 조금은 개념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자 월드비전에 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월드비전에서 내가 후원하고 있는 아이를 위해 그 마을에 가서 봉사 활동을 하자고 하면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은 자신이 사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의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실존 자체로 이데올리기의 대항되는 의미를 가지며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확장된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실천적인 진실’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 비판을 하고, 혜택 받지 못하는 계급에 구체적으로 거리낌없이 참여해야 진정한 ‘지식인’이라고 설명했다.
21세기는 인터넷과 기술 발달로 누구나 ‘지식 전문인’ 다시 말해 ‘정보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누구나 무제한의 지식과 정보에 언제든지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지식인을 판단하는 기준에는 ‘지식’만 요구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이 40여 년 전 일본에서 사르트르 강연 당시 논의 한 ‘지식인의 실천’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는 지점이다. 그는 지식인의 진정한 기능(가치와 역할)이란 ‘자신의 권한 밖’에까지 관여하는 데에 주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여’의 기준에서 그는 단순한 지배계급의 기능인 지식 전문가와 지식인을 구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40여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지배 계급에게 종속되고 복종하는 지식 전문가를 정치판 외에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반면 사르트르가 말한 스스로의 사회적 역할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지식인도 존재한다. 제 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 배우의 배려는 국내외 많은 감동을 주었다. 그녀는 남우조연상 수상자인 청각 장애인 배우 트로이 코처를 배려하여 수어로 먼저 수상자를 호명했다. 그의 수상을 염원하며 사전에 그의 단어를 배워 연습한 것이다. 이는 듣고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배려와 관심이 부족한 우리 사회에 큰 가르침을 준 실천적 지식인의 대표적 사례일 수 있다. 사람 뿐만 아니라 기업도 가능하다. 가구전문회사 이케아(IKEA)는 지난 2010년부터 유엔난민기구(UNHCR)와 손잡고 'Brighter Lives for Refugees(난민을 위한 더 나은 삶)'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으며, 숙박공유 업체 에어비앤비의 브라이언 체스키 최고경영자(CEO)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고 나서 4일 후 airbnb.org를 통해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해 10만개 숙소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선한 영향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자발적인 '착한 노 쇼(No show)'가 시작되었다. 일본과 아프리카, 인도 등지에서 이재민과 난민들을 위한 공감을 고민하고 설계해 온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 역시 우쿠라이나 난민을 위한 주거 시설을 지었다.
사르트르는 작가는 자기가 원하는 바를 표현하는데 통용되는 단어를 선택해 사용하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과한다고 설명했다. 같은 맥락으로 연구자는 논문을 통해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를 드러낸다. 그저 나의 지식을 뽐내기 위한, 박사 졸업을 위한 논문이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논문을 통해 연구분야에서 얻은 보편적 법칙과 진리를 기반으로 나는 지식인의 책임과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과연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거부하며 특권을 포기하고, 자유롭고 보편주의적 탐구 정신으로 지식을 실천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