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10% 수의사가 30년 된 구축 아파트에서 느낀 절망
요즘 가장 화제가 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인 흑백요리사 2를 봅니다.
100명의 요리사로 시작한 이 잔혹한 전쟁터에는 이제 최강록, 요리괴물, 후덕주. 단 세 명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1월 13일, 이들 중에서도 오직 단 한 명만이 최종 우승자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서바이벌에 열광합니다.
화면 속 경쟁은 자극적이고, 손에 땀을 쥐게 하며, 도파민을 분출시킵니다.
하지만 TV를 끄는 순간, 묘하게 서늘해집니다.
100명 중 99명이 탈락하고, 단 1명만 기억되는 이 구조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학창 시절, 우리는 늘 순위로 평가받았습니다.
어른들은 말했습니다.
"고3 때만 참고, 좋은 대학만 가면 인생은 편해진다."
그 말을 믿고 수의대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당시 수의사는 ‘전문직’이었지만, ‘잘 사는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인턴과 수련의 시절, 밥 먹을 시간도 줄여가며 병원에 살다시피 했습니다.
아픈 반려동물을 살리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텼지만,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차라리 군대를 한 번 더 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페이 닥터 5년,
그리고 제 이름을 건 병원을 열고 개원 5년.
도합 10년의 시간을 청춘과 맞바꿨습니다.
특히 개원 후의 5년은 전쟁이었습니다.
주 6일 근무는 기본, 입원 환자가 있으면 일요일도 없었고 밤샘도 일상이었습니다.
병원 한 켠, 5평 남짓한 원룸에서 숙식하며 수입의 90%를 저축했습니다.
그 결과, 소위 말하는 수의사 중 ‘상위 10% 소득’을 올리는 병원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성공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제가 집을 사러 갔던 그날 시작됩니다.
10년.
성실함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시간.
이 정도면 강남은 아니더라도, 서울 어딘가에 ‘내 집’ 하나쯤은 가능할 거라 믿었습니다.
부동산 문을 열고 가격을 듣는 순간, 그 믿음은 무너졌습니다.
제가 알아본 지역은 서울에서도 집값이 그리 비싸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살 수 있는 집은 엘리베이터가 지하주차장과 연결되지 않은, 30년 된 구축 아파트가 전부였습니다.
당시엔 대출 규제로 돈을 빌릴 수도 없어, 가진 현금을 100% 쏟아부어야 겨우 접근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매물을 보러 갔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던 퀴퀴한 곰팡이 냄새.
정리되지 않은 짐들, 벽에 걸린 연세 지긋한 할머니의 사진.
중개사는 집을 나오며 전화 통화로 욕설을 내뱉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홀로 사시던 분이 급히 요양원에 가셨거나, 세상을 떠난 뒤 나온 급매였을 겁니다.
그 낡고 을씨년스러운 거실 한가운데에서,
저는 강력한 '현타(현실 자각)'를 맞았습니다.
먹고 싶은 것 참고 자고 싶은 것 줄여가며 10년을 모았는데
내 노력의 종착지가… 고작 여기인가?'
결국 아내의 만류로 매매를 포기하고, 병원 근처 월세로 돌아왔습니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면 감지덕지 아니냐"라고.
하지만 제가 느낀 건 박탈감이 아니라 공포였습니다.
이 나라에서 노동 소득만으로는,
아무리 고소득 전문직이라 해도
자산 인플레이션의 속도를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는 공포.
제 경험이 이 정도였다면,
지금의 청년들이 마주한 벽은 얼마나 높을까요.
최근 몇 년 사이,
30대 초반의 결혼율과 자산 형성 속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불과 몇 년 차이의 세대가 전혀 다른 게임판 위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청년들이 결혼을 미루는 게 아닙니다.
저처럼 죽어라 노력해 상위 소득을 올려도 ‘기본값’에 도달하기 힘든데,
평범한 월급으로는 계산 자체가 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끌이 나오고,
코인이 나오고,
아예 게임판을 포기해 방 안으로 숨어드는 은둔이 나옵니다.
그들에게 투자는 탐욕이 아닙니다.
무너진 사다리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입니다.
흑백요리사 2는
1월 13일, 단 한 명의 우승자를 남기고 막을 내릴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예능이 아닙니다.
방송이 끝나도, 우리의 삶은 계속됩니다.
100명 중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제가 진료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차트를 정리하고
투자를 공부하는 이유는
1등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실함만으로는 언제든 배신당할 수 있는 이 시스템에서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한 '방어 진지'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해진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노동 소득을 자산 소득으로 연결하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우리는 그 낡고 냄새나던 아파트 앞에서 다시 서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투자는 부자가 되기 위한 탐욕이 아닙니다.
1등이 아니어도, 존엄하게 살아남기 위한 생존 기술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성실함만으로는 더 이상 탈출할 수 없는 게임판 위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