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은 아직 월세 사세요?"

나를 위로하려던 후배의 실수


"형님, 이 동네 '대장 아파트' 사신다면서요? 여기 요즘 신고가 찍었던데... 타이밍 기가 막히게 잡으셨네요."

2026년 1월의 어느 오후. 진료실에 놀러 온 대학 후배 민우(가명, 개원 3년 차)가 커피를 마시며 넌지시 운을 뗐다. 녀석의 눈빛은 순수한 축하보다는 탐색에 가까웠다.

'이 형이 돈을 얼마나 벌었나.' '개원 10년 차면 등기는 쳤겠지? 대출은 얼마나 꼈을까?'

민우의 머릿속 계산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긴, 지역 내에서 10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물병원 원장이니, 번듯한 브랜드 아파트 한 채 정도는 깔고 앉아 있어야 '급'이 맞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대한민국에서 전문직의 성공 척도는 '임상 실력'이 아니라 '거주지 등기 권리증'이니까.

"타이밍이라..."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민우는 내 침묵을 긍정의 신호로 읽었는지, 한 술 더 떠서 구체적으로 찔러들어왔다.

"솔직히 말해봐요. 분양받으신 거죠? 아니면 초피(초기 프리미엄) 주고 잡으셨나? 요새 거기 전세가율도 낮아서 갭투자로는 못 들어갔을 텐데... 역시 형님은 선구안이 있다니까."

녀석은 나를 이미 '부동산 상승장에 올라탄 승리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내가 "응, 운이 좋았어"라고 대충 맞장구쳐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래야 자기도 "저도 이번에 서울 마용성(마포·용산·성동) 좀 보고 있는데..." 하며 훈수를 둘 명분이 생길 테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환상을 깨주기로 했다.

"민우야, 너 헛다리 짚었다." "네? 에이, 겸손해하지 마시고요. 그럼 뭐 급매로 잡으셨어요?"

"아니. 나 거기 월세 살아."

순간, 민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당황스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아주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가는 우월감.

"... 월세요? 형,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아니면 반전세 뭐 그런 건가? 보증금 엄청 높은?"

"아니, 보증금 1억에 월 200짜리 찐 월세. 내 명의로 된 집은 대한민국에 단 한 평도 없다."

정적이 흘렀다. 민우는 마치 '실패한 선배'를 위로해야 할지, 아니면 '경제관념 없는 형'을 나무라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10년 차 원장이 자가도 없다니. 그에게 나는 순식간에 '자산 증식에 실패한 루저'로 전락하고 있었다.

"형님... 진짜 왜 그러세요. 병원 매출도 잘 나오시면서. 혹시 주식하다가 크게 물리셨어요?"

드디어 나왔다. 집이 없으면, 주식으로 망했거나 사업이 어렵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저 단순한 이분법.

"물리긴. 왜?" "아니, 집을 안 살 거면 전세라도 사셔야죠! 월세 200이면 1년이면 2,400만 원인데 그 생돈을 왜 길바닥에 버려요? 전세 살면 관리비만 내면 공짜로 사는 건데!"

민우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전세는 돈을 아끼는 것, 월세는 돈을 버리는 것'. 전형적인 한국인의 사고방식이었다. 나는 혀를 쯧 찼다.

"민우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세'야말로 최악의 선택인 거 모르냐?"

"네? 전세가 왜요? 원금 보장되고 주거비 안 드는 최고의 제도잖아요."

"착각하지 마. 세상에 공짜는 없어. 이 아파트 전세 시세가 9억이야. 내가 9억을 집주인한테 무이자로 빌려주고, 2년 뒤에 9억 그대로 돌려받는 게 이득일까? 그 9억이 나를 위해 일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게 이득일까?"

"그거야... 돈이 묶이긴 하지만 안전하잖아요."

"안전? 4년 전을 생각해 봐."

나는 모니터에 4년 전, 2022년의 아파트 실거래가 차트를 띄웠다.

"4년 전, 이 아파트가 고점을 찍었을 때 매매가가 18억이었어. 그때 나도 흔들렸지. 다들 지금 안 사면 영원히 못 산다고 했으니까. 만약 그때 내가 '영끌'해서 18억에 등기를 쳤거나, 10억 주고 전세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 그 아파트의 시세는 15억이다. 고점 대비 3억이 빠진 상태였다.

"내가 그때 집을 샀다면, 앉은자리에서 3억을 날리고 대출 이자만 1억 넘게 냈을 거야. 전세를 살았어도 마찬가지야. 내 종잣돈 10억은 집주인의 갭투자를 도와주는 꼴밖에 안 됐겠지."

나는 화면을 전환해 내 포트폴리오의 수익률 그래프를 보여주었다. 빨간색으로 가파르게 치솟은 우상향 곡선.

"하지만 난 그때 '매수' 대신 '월세'를 택했어. 그리고 집을 살 뻔했던 그 돈을 몽땅 미국 혁신 기업과 블록체인 생태계에 넣었지."

"......!"

"그 4년 동안 집값은 떨어졌지만, 내 자산은 어떻게 됐을 것 같냐? 아파트 한 채 값은 우습게 벌었다."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 민우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녀석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세하게 탁해졌다. 녀석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저거... 실현 손익 아니잖아? 그냥 사이버 머니 아니야?' '운 좋게 몇 번 터진 거 가지고... 결국 나중에 폭락하면 휴지 조각 될 텐데.'

민우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형님 대단하시네요. 야수의 심장이시네. 저는 간이 작아서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아요."

녀석의 말투에는 '존경'이 아니라 '다행'이 섞여 있었다. 위험한 도박을 하는 선배를 보며, 차곡차곡 적금 붓고 청약을 노리는 자신의 삶이 훨씬 안정적이고 옳다는 안도감.

"그래,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니까. 하지만 민우야,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건 알아야 해. 노동만으로는 절대 부자가 될 수 없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형님 진료 보셔야죠.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민우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전염병이라도 피하려는 사람처럼. 진료실 문을 닫고 나가는 녀석의 뒷모습에서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에휴, 우리 선배... 10년 차에 월세 살면서 코인이라니. 저러다 한방에 훅 가지. 나중에 후회해도 늦는데... 쯧쯧.'

문이 닫히자 진료실에는 다시 적막이 흘렀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민우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다. 대한민국 99%의 사람들이 저렇게 생각하니까. 집 없는 부자를 믿지 않고, 대출 낀 집주인을 부러워하니까.

언젠가 녀석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병원 문을 닫고 여행을 떠날 때, 녀석은 대출 이자를 갚기 위해 주말 진료를 늘려야 할 때. 그때가 되면 내 말이 도박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겠지.

창밖으로 보이는 신도시의 아파트 숲. 저 수많은 불빛 아래, 누군가는 대출 이자를 갚기 위해 야근을 하고, 누군가는 전세 보증금을 떼일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월세를 살지만 자본을 소유한, 가장 자유로운 송 원장이다.


해당 브런치북은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홀수 화 (Odd): 자본주의를 정복하고 경제적 자유를 이룬 현재의 투자자 송원장 이야기

​짝수 화 (Even): 돈이라는 방패가 없어 처절하게 버텨야 했던 과거의 생계형 수의사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