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가운을 입은 호구들

수의사의 개원 수난기


수능 상위 2%의 성적. 수백 페이지짜리 해부학 원서를 달달 외우며 바친 20대의 청춘. 마침내 국가고시를 패스하고 새하얀 가운을 입는 순간, 젊은 수의사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엘리트라도 된 양 턱을 치켜든다.

하지만 매트릭스 밖의 진짜 자본주의 정글에서, 갓 개원 시장에 던져진 이 '똑똑한 샌님'들은 아주 먹음직스럽고 살찐 양 떼에 불과하다. 의학 지식만 기형적으로 꽉 차 있을 뿐, 사기꾼들이 우글거리는 바닥의 생리는 처참할 정도로 백지상태이기 때문이다.

내가 병원의 덩치를 키우는 '대형화'를 끔찍하게 혐오하게 된 것은, 이 판에 득실거리는 하이에나들이 엘리트 의사들의 목줄을 어떻게 뜯어먹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3억이 증발하는 마술, 그리고 똑똑한 호구들


7년 전, 지인인 이 원장은 야심 차게 24시 대형동물병원을 오픈했다. 당시만 해도 동물병원 의료기기 시장은 좁고 영세했다. 병원 세팅에는 엑스레이, 초음파, 혈액검사기 등 수십 가지의 복잡한 장비가 필요한데, 오픈 준비로 멘탈이 나간 이 원장은 한 영세한 장비 업체에 이 모든 세팅을 '일괄'로 맡기는 치명적인 자살 골을 넣었다.

계약금과 중도금 명목으로 업자의 통장에 꽂힌 돈만 무려 3억 원. 하지만 오픈 날짜가 다가와도 장비는 절반도 입고되지 않았고, 결국 그 업체 대표는 3억을 꿀꺽 삼킨 채 흔적도 없이 잠적해 버렸다.

가운만 입었지 세상 무서운 줄 몰랐던 이 원장은 뒤늦게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 전을 벌였다. 하지만 작정하고 돈을 빼돌린 사기꾼의 주머니를 법으로 털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피 말리는 3년의 법정 공방 끝에 그가 돌려받은 것은 원금의 아주 초라한 찌꺼기뿐이었다. 이 원장의 3억 원. 그것은 생명만 살리면 돈은 알아서 벌리는 줄 알았던 순진한 엘리트가 자본주의 도축장에 바친 핏빛 수업료였다.


목줄을 쥔 자들의 인질극: 인테리어 업자들의 갑질


개원을 해본 원장들이 술자리에서 가장 먼저 저주를 퍼붓는 대상 1순위. 바로 인테리어 업자다. 보증금을 걸고 상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 시간은 곧 '피(돈)'가 된다. 렌트 프리(무상 임대)를 한두 달 받았다고 한들, 공사가 하루 지연될 때마다 엄청난 월세와 대출 이자가 허공에서 불타오른다.

바닥의 생리를 귀신같이 아는 인테리어 업자들은 이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어 칼을 꽂는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선수금'이 입금되는 순간, 을이었던 업자는 완벽한 '갑'으로 돌변한다. 공사 도중 툭하면 자재비 폭등을 핑계로 수천만 원의 추가 결제를 요구한다. 명백히 계약서에 없는 부당한 삥 뜯기지만, 원장이 항의하며 돈을 주지 않으면 그들은 보란 듯이 현장의 인부들을 철수시켜 버린다.

매일 월세와 이자에 똥줄이 타들어 가는 것은 원장뿐이다. 결국 오픈 날짜를 맞춰야 하는 원장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업자가 부르는 대로 돈을 갖다 바친다. 이것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명백한 인질극이다.

오픈을 해도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천장에서 물이 새거나 타일이 깨져 A/S를 요구하면 전화를 씹거나 아예 폐업 신고를 하고 도망가는 쓰레기들이 부지기수다. 그들은 원장들이 매일 진료를 보느라 바빠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싸울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는 것을 짐승 같은 직감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송 원장의 반격: '내용증명'이라는 금융 참수


나 역시 이 하이에나들의 덫을 완벽하게 피해 가지는 못했다. 과거 병원을 세팅할 때, 한 장비 업체에서 방사선(엑스레이) 기기를 구입했다. 계약 당시 분명 '3년 무상 A/S'를 약속받았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고장이 났다.

전화를 걸어 수리를 수십 차례 독촉했지만, 소규모 업체였던 그들은 '인력이 없다, 부품이 없다'며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배 째라 식으로 나왔다. 진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뒤늦게 타 병원의 견적과 비교해 보니, 오픈 당시 일괄로 구입했던 장비들의 가격이 시세보다 턱없이 뻥튀기되어 청구되었다는 역겨운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과거의 이 원장처럼 "똥 밟았네"라며 호구처럼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나는 즉각 변호사를 통해 그들의 계약 불이행과 사기성 부당 청구에 대한 살벌한 '내용증명'을 작성해 업체 대표의 면상에 날려버렸다. 형사 고소, 민사 소송, 그리고 회사 계좌 가압류 절차가 명시된 법적 단두대였다.

그제야 코미디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수주 동안 전화를 씹으며 바쁘다던 업체 대표가 부리나케 병원으로 기어와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즉각적인 A/S를 진행했다. 뻥튀기했었던 장비 차액 역시, 몇 달간의 피 말리는 법적 압박이 오간 끝에 겨우 내 통장으로 토해내게 만들었다.


에필로그: 방긋 웃는 하이에나들에게서 살아남는 법


내가 인간관계의 거품을 극도로 혐오하고, 직원을 최소화하며, 오직 철저한 서류와 자본의 숫자만을 믿는 얼음장 같은 인간이 된 것은 이 구역질 나는 경험들 덕분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얀 가운을 입은 전문직들을 보며 부러워하지만, 그 이면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인테리어 업자의 횡포에 피가 마르고, 사기꾼 장비 업자들과 내용증명을 주고받으며 피 튀기는 진흙탕 싸움을 벌인다. 착하고 순진한 의사 선생님? 매트릭스 밖의 진짜 세상에서는 그저 하이에나들의 가장 맛있는 단백질 공급원일 뿐이다.

자본주의 정글에서 내 자산과 생존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의 선의나 상식을 기대해선 안 된다. 오직 완벽하게 세팅된 '계약서', 배 째라 식으로 나오는 놈들의 숨통을 정확히 찌를 수 있는 '법적 지식(내용증명)',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송 전을 불사하며 끝까지 말려 죽일 수 있는 '압도적인 현금(자본)'만이 나를 지켜준다.

나는 가운을 입은 우아한 호구가 되느니, 기꺼이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자본주의의 괴물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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