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원장'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공정한 원장'이 된 이유
수의대에 입학하는 인간 부류는 대체로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동물을 사랑하고, 타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정이 많다.
하지만 매트릭스 밖의 야생에서, 이 알량한 '공감 능력'과 '동정심'은 하이에나들이 가장 군침을 흘리는 먹잇감일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착하다는 것은 곧 '이용해 먹기 좋은 호구'라는 뜻의 다른 이름이다.
과거의 송 원장 역시 그 멍청한 호구들 중 하나였다. 나는 수많은 피눈물을 흘린 끝에, 내 병원과 멘탈을 지키기 위해 '원장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3가지 금기'를 내 뼈에 새겼다.
환축이 아파서 왔는데 보호자의 행색이 초라하거나 돈이 없어 보일 때가 있다. 과거의 나는 마음이 약해져서, 혹은 수납할 때 보호자가 지을 찌푸린 표정이 보기 싫어서 슬그머니 검사비를 깎아주거나 진료비를 덜 청구하곤 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할인을 받은 보호자는 나를 '고마운 수의사'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은 문을 나서는 순간 나를 '흥정이 통하는 만만한 장사꾼'으로 취급한다. 다음번 진료 때도 당연하다는 듯 할인을 요구하고, 할인을 안 해주면 "원장이 돈맛을 알더니 변했다"며 침을 뱉는다. 내 알량한 동정심이 스스로 내 기술의 가치를 시궁창에 처박은 것이다.
이 금기를 뼈저리게 깨닫게 해준 사건이 있다.
어느 날, '바베시아'라는 치명적인 전염성 질환에 걸려 극심한 빈혈로 죽어가는 강아지가 내원했다. 당장 수혈을 하지 않으면 숨이 끊어질 상황인데, 보호자는 돈이 한 푼도 없다며 진료실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젊고 감정적이었던 송 원장은 차마 그 생명을 외면하지 못했다.
"이번 한 번만 제 사비로 살려드리겠습니다. 대신 어디 가서 절대 무료로 치료받았다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신신당부를 하고, 150만 원이 훌쩍 넘는 수혈과 입원 치료비를 병원 돈으로 고스란히 떠안아 강아지를 기적적으로 살려냈다. 보호자는 눈물을 흘리며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수십 번 고개를 숙였다.
그로부터 1년 뒤, 그 보호자가 다시 강아지를 안고 병원 문을 열었다. 이번엔 다른 질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내게 요구했다. "원장님, 저번처럼 이번에도 무료로 좀 고쳐주세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제값을 내고 다니는 다른 보호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고, 병원도 땅 파서 장사하는 곳이 아니기에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이 악귀처럼 돌변했다. 그녀는 진료실 문을 박차고 나가더니, 동네 오프라인과 인터넷 맘카페를 돌며 "저 병원 원장이 돈에 미쳐서 아픈 강아지를 길거리에 내쫓았다"라며 온갖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다.
영화 <부당거래>의 명대사는 틀린 게 하나도 없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 고깃집 사장이 굶어 가는 사람이 불쌍해 매일 밥을 무료로 차려 줬더니, 나중에는 왜 자기 밥상에는 고기반찬을 안 올려주냐고 밥상을 엎고 욕을 하는 꼴이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자본주의에서 이보다 역겨운 가스라이팅은 없다.
개원 초, 나는 직원들에게 계약서상 명시된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챙겨줬다. 병원이 잘되면 성과급을 제공했고, 가정의 달인 5월에는 두둑한 선물과 상여금을 돌리며 업계에서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선의는 선의로 돌아온다고 순진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어려움에 공감하려 했고, 집에 일이 생기면 최대한 배려를 제공했다.
그러나 인생은 자기계발서처럼 굴러가지 않는다. 내가 책에서 봤던 이상적인 인간관계는 허상이었다. 직원들에게 사정을 봐주며 가족처럼 대하면 돌아오는 것은 충성이 아니다. 한 명에게 편의를 봐주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요구한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집안에는 '사정'이 생겼고, 남겨진 업무의 폭탄은 성실하게 묵묵히 일하는 다른 직원의 등에 꽂혔다. 그들은 원장의 배려를 '당연한 기본 복지'로 여기고, 선을 넘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조금만 싫은 소리를 하면 "가족이라면서요?"라며 뒤통수를 치고 노동청으로 달려가는 것이 이 바닥의 구역질 나는 생리다. 나는 직원들이 노동청에 가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계약서에 적힌 것 이상을 퍼주었고, 업계에서 월급이 가장 높기로 소문난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연장수당 등 노동법상 문제 될 만한 행동은 철저히 배제했다.
하지만 국내 노동법은 고용주에게 매우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악용의 소지가 있어 구체적인 상황은 적지 않겠지만, 노무사의 자문을 받고 노동법을 철저히 지킨다 해도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함정들이 존재한다. 아마 노동청에 다녀와 본 사장님들이라면 이 더러운 기분을 뼈저리게 알 것이다.
심리학에는 '카프만 드라마 삼각형(Karpman Drama Triangle)'이라는 소름 돋는 이론이 있다. 인간관계에서 누군가 불쌍하다고 '구원자' 역할을 자처하며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풀면, 상대방은 스스로 무능해지는 '피해자' 역할에 길들여진다. 그리고 그 과도한 호의가 조금이라도 줄어들거나 원장이 정당한 통제를 시도하는 순간, 그 피해자는 악귀처럼 돌변하여 구원자를 공격하는 '박해자'가 된다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도 이런 '병적 이타주의(Pathological Altruism)'의 참혹한 사례는 흔하다. 과거 선진국과 거대 NGO 단체들이 아프리카 빈민촌을 돕겠다며 무료 신발과 헌 옷을 엄청나게 쏟아부었던 적이 있다.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지만 결과는 대재앙이었다. 쏟아지는 공짜 물량 때문에 현지의 자생적인 신발 공장과 옷 가게들은 전부 줄도산했고, 현지인들은 영원히 구호물자에만 의존해야 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간관계도, 병원 경영도 완벽하게 똑같다. 한 사람을 망치는 건 마약이나 도박, 무리한 레버리지뿐만이 아니다. 타인의 자생력과 책임감을 갉아먹는 무절제한 관용과 얄팍한 동정심은 한 사람의 인생을 충분히 망칠 수 있고, 결국 그 칼끝이 훗날 내 목을 찌르게 만든다.
당연히 법은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 이후 나는, 법을 지키기 위해 계약서의 잉크를 단 1밀리미터도 벗어나는 자비나 선의는 일절 제공하지 않는다.
원장도 신이 아니다. 나에게는 매달 월급을 줘야 할 직원들이 있고, 내가 책임져야 할 내 가족과 자식들이 있다.
눈앞의 동정심에 휘둘려 무원칙한 무료 진료와 할인을 남발하면, 병원의 기둥이 흔들린다. 그것은 결국 정당한 돈을 내고 질 높은 진료를 받아야 할 다른 보호자들의 권리를 빼앗는 짓이며, 내 옆에서 묵묵히 일하는 직원들과 내 가족의 밥그릇을 내 손으로 깨버리는 가장 무책임한 위선이다.
그 바베시아 사건 이후, 나는 진료실에서 '착한 원장'의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졌다.
우리 병원은 그 누구에게도 동정심으로 할인을 해주지 않는다. 모든 보호자에게 정확하고 공정한 진료비를 청구한다.
그렇다고 내 안의 공감 능력이 완전히 거세된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비즈니스와 적선을 철저하게 분리했을 뿐이다.
나는 두 달에 한 번씩, 병원 문을 닫고 유기견 보호소로 의료 봉사를 간다. 내 마음속의 부채감과 수의사로서의 순수한 봉사 정신은 오직 그곳에서만 발산한다.
매트릭스 안에서 자본과 내 사람들을 지키는 가장 완벽한 방패는 '냉정함'이다. 나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내 가족을 호구 잡히게 만드는 '착한 원장'이 되느니, 내 바운더리 안의 사람들을 완벽하게 지켜내는 '공정한 원장'으로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