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했나요?"묻던 수의사가 NPO라니

씁쓸하지만, 세상살이 방어하는 가면을 완성해 나간 거 같다.

by VetStella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하고 담당 교수님의 스케줄에 따라서 나의 생활 패턴은 조정되고 있다.


'며칠까지 이 검사를 마치고 오셔야 합니다.' 하면 거기에 맞게 내 진료 스케줄을 빠르게 옮기고 있다.

사실 동물병원 원무과선생님들이 수고를 해주고 계신다.



수술하기 전 검사들을 마치기 위해서 요리조리 시간을 끼워 맞추다 보니

오전 중에는 동물병원에 출근해서 진료를 보고 오후에 대학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누가 NPO(금식)가 이리 어려운 것일 줄 알았나.



나의 일상은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준비를 하고,

아이를 깨우고 아침 준비를 시키고,


재촉 재촉!!

"눈 떠!, 양말 신어!, 옷 입어! 우유 마셔!! 어서! 엄마 늦어! 5분 남았다!!"

이렇게 어르고 달래고 등 떠밀어 아이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아 또 늦겠다'

초보딱지를 붙인 자동차에서 심호흡 한 번,

'가운데 브레이크, 가운데 페달이 브레이크, 신호! ' 몇 번을 되뇌며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출근하자마자 다시 커피 수혈을 시작.

입원 환자들 체크하고 검사 진행하고 보호자 상담하고 외래 진료를 보기 시작한다.



우리 동물병원은 너무나도 바쁜 병원이기 때문에 평소에 화장실을 다녀올 짬도 없다. 예약은 기본적으로 꽉 차있는데 예약 없이 오는 환자들은 끊임없이 몰려와 대기하고 있다.



그래서 그나마 직원 복지 차원에서 간식들과 음료수들이 여기저기 구비되어 있는데....


진료 중간, 검사 중간 내 입엔 끊임없이 간식들이 들어가고 커피를 CRI(Continuous Rate Infusion)로 들이켠다.



이 무의식의 행동을 그동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참... NPO가 이리도 힘들 줄야.

강아지와 고양이들은 밥그릇과 물그릇을 치워주세요 하면 될 텐데.


잠을 자면서 금식을 하는 게 제일 편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들 아침 일찍이 검사를 하는 거였다. 건강검진이든... 뭐든.

진료실로 들어와 안아달라고 조르는 내 환자


진료를 보다가 무의식적으로 간식통에 손이 가고, 누구 것인지 모를 커피잔에 손이 가고

아 이러다 진짜 실수하겠다 싶어서 여기저기 모니터에 ***(내 이름) NPO!! 포스트잇을 붙여두고

간식통에도 붙여두고.

마스크에도 NPO라고 적어뒀다.

누구든 내가 마스크를 벗고 먹으려 한다 치면 바로 막아주세욧!



정신줄 잡아라!



내 사랑하는 동료들은 술전 검사 전에는 왜 물을 마셔도 되는지에 대해서 Gemini에게 물어보고 옆에서 "물 마셔~ 물 마셔도 돼~~ 탈수되면 더 검사 결과가 부정확한 거 아니야?"라고 악마의 소리로 유혹하고..


혹은 오일 풀링 하듯이 "점막이라도 적시고 뱉어내~~"라고 잔머리를 굴려준다.



술전 검사는 굵직한 것 외에는 구체적인 항목을 안내받진 못했지만,

난소 나이 검사(비급여),

BRCA 1/2 유전자 검사(가족력이 있다면 권장 대상이 될 수 있다. 나의 경우는 친언니가 공교롭게도, 불행하게도 25년 12월 난소암 수술을 진행했다. 나는 같은 달 유방암 진단을 받고.) 결과 나오기까지 4주 소요

심전도

뇨검사

Breast MRI

그리고 그 외의 일반적인 술전 혈청 화학 검사이지 않을까 싶다.



가능성은 낮겠지만, 낮을 거라고 믿지만,

BRCA 유전자 양성으로 나오면 수술 전략이 대폭 수정되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은 거기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유방암 MRI 검사는 술 전에 수술 범위를 확정 짓기 위해 그리고 반대편 유방 확인과 림프절 전이 평가를 위해 진행된다.


아마 이런 부분 때문에 담당 교수님도 나에게

"차라리 암으로 진단된 것이 더 낫다"라고 한 마디 위로를 전한 거 같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확실히 스크리닝 검사하고 확실하게 진단받는 게 차라리 낫다.

이게 위로의 말이냐 할 수 있겠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위안이 되었다.

내가 제대로 상황을 판단하고 있는 거구나라고.



MRI 검사는 예상을 벗어난 자세였다.

이전에 뇌영상을 찍을 때는 미드나, TV에서 흔히 보는 귀마개 하고 하늘 보고 누워 동그란 드럼통에 위잉하고 들어가서 찍었었는데.



Breast(유방) MRI


내가 그려본 위에서 바라보는 MRI 베드

MRI 베드 위의 팔 쿠션, 얼굴 선반, 가슴 선반, 다리 쿠션



웃통을 벗고 계단을 올라 베드를 바라보며 중심을 잘 잡고 무릎을 꿇고 앉은 다음에,

바닥을 바라보고 누워 가슴을 중력 방향으로 떨구고 만세를 한 자세에서 한 손엔 비상벨을 움켜쥐고 30여 분간 찍어야 한다. 목욕탕에서 때 미는 침대 느낌?



치과에서 '불편하면 손 드세요~'하고 손을 들면

'조금만 참아주세요~ 다 했어요' 하듯...


한 손에 쥐어주신 비상벨도

'불편하면 눌러주세요, 조영제 넣고 나서 누르시면 오늘은 재촬영 안됩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은 참아주세요~~' 하신다.



절대 누르지 말아야지...


다행히,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머리 쿠션, 가슴을 받쳐주는 틀, 다리 쿠션도 놔주시고 오히려 편한 거 같기도 하고.

춥지도 않고 딱 적정 온도라 살짝 잠도 온다.



나의 작디작은 가슴이 중력의 힘을 어느 정도나 받아서 아래로 내려갈지 그게 좀 걱정은 되었다. 제대로 찍힐까?


15여 분간 조영 전 촬영을 하고 IV로 조영제를 넣고 또 15분간 촬영을 더 진행한다.

규칙적인 소음과 간헐적 진동을 느끼며 뭔가 멍~~ 해지기도 하고, 도대체 왜 이런 소리가 발생하는 건가 궁금하기도 하고.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면 다 끝나있다.



어릴 때는 산부인과 다닐 때도 여자의사 선생님 앞에서도 부끄럽고 가급적 피하고 싶고 그랬는데


지금은 뭐.. 어떤 자세든 척척, 무감정으로.


굴욕 의자 산부인과에서도 척척,

개구리 자세 브라질리언 제모도 척척,

만세 자세 유방외과 남자 교수님 앞에서도 척척.



무표정, 무감정으로.



밤낮없이 일하던 인턴 때에도 신생아처럼 웃음이 많다고 놀림받던 내가

1-2년 전부터인가 외부의 모든 자극에 무감정, 무표정이 되어간다.


씁쓸하지만, 세상살이 방어하는 가면을 완성해 나간 거 같다.



검사 받으러 가는 엄마를 동행해준 아들의 편지, 밴드와 blood는 엄마가 아프다는 표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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