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은 무의미할까?
살면서 싫은 사람 하나는 만난다. 대학에 입학 후 치가 떨릴 정도로 싫은 인간을 마주했다. 나를 조금씩 재며 행동하던 지인 (이하 A). 마음에 안 든다. 드러나지 않는 두 계절의 신경전 끝에 A에게 차단당했다. 이 분노, 어떡하죠? (어느 날, 지인이 나를 차단했다 (1)에서 이어서)
영화 '펄프픽션'을 본 적 있는가? 사무엘 잭슨이 카후나 버거를 우물거리다, 총을 쏘고, 성경의 에스겔 구절을 내뱉는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 볼 정도로 좋아한다. 책상을 던져버리거나 햄버거를 베어 무는 와일드함도 분명 매력적이지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사무엘 잭슨의 애티튜드. 폭발하지만 결코 넘치지는 않는 그의 분노를 지켜보면 손가락과 뒷목이 찌릿찌릿한 아드레날린이 느껴진다.
꼭 펄프 픽션이 아니어도 괜찮다. 총과 피가 난무하는 복수 서사의 영화를 한 번 즈음 본 적이 있을 테다. 주인공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적들, 과정은 처절하지만 앙갚음은 시원하고 말끔하게. 영화에서의 복수는 이처럼 명확하다. 독자를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캐릭터는 특색 있게, 서사는 명확하게, 기승전결은 적절한 밸런스로. 그래서 영화 속 '복수'는 장치다. 독자가 스토리에 빠질 수 있도록, 캐릭터에 더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게 작동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복수는 흐름이다. 일회성이 아닐뿐더러 인과관계도 명확하지 않다.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저마다의 길이 다르더라도 정도正道는 존재한다. 사실 우리는 적을 대하는 가장 쉬운 답을 알고 있다. 적을 마음껏 욕해도 돌아오는 이득은 없고, 현실에 완벽한 복수와 사이다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서워서 피하기보다는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이 있다. 당장 뒤가 구린 누군가와 한 판 붙는 일,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뒤의 상황 수습이 불현듯 생각나면 우리는 슬그머니 감정을 갈무리하곤 한다. SNS를 차단당한 직후 불타던 A에게의 복수심이 금세 가라앉은 이유다.
표출하지도 해결하지도 못하는 감정. 대차게 상한 감정을 복수가 아니면 무엇으로 달래야 할까. 언제까지 하지 못했던 말을 잠자리에 누워 곰곰이 생각할 것인가. 몇 날 며칠을 "먼저 차단할 걸!" 후회했다. 온갖 SNS를 앙갚음처럼 차단하고, 시간 날 때마다 그를 '까고' 다녔지만 딱히 해결되는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그와 나의 사이가 나빠졌다면 나빠졌고, 같은 공간에 있을 때마다 눈치를 보는 친구들이 생기며 미안함이 생겨났다.
이 즈음에서 결론을 읽는 사람들 마음을 알 것 같다. '결국 이거지?' 잠깐만 기다려보시라. 그저 미워하는 감정을 부처처럼 흘려보내라는 말, 아니다. 지저스처럼 왼쪽 뺨을 내어주고도 참으라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돌아보면 A를 정말 많이 미워했다. A의 대단한 존재감 덕에 사이가 틀어진 이후에도 오래, 많이도 마주쳤고 그때마다 싫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A의 진의를 한참 동안 고민했고, 술자리를 그토록 좋아하는 내가 A가 있다는 술자리는 피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휴학을 결심하며 모든 모임, 활동을 중지했다. 요즘 자주 쓰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번아웃'이었다.
모든 게 지긋해졌고 피곤했다. 비단 A에 대한 피로만은 아니었고, 지난 글에서 (나, 학과 잘못 선택했나?) 살짝 언급했던 철학 우울증(?) 을 비롯해 진로에 대한 고민, 작업물에 대한 욕심, 휴식에 대한 간절한 바람 등으로 계획도 없이 휴학을 결심했다.
환경을 벗어나면 사람을 만나기 어려워지고, 사람을 멀리하면 감정도 저만치 멀어진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흘러 흘러 우리의 말속 스며든 건 이유가 있었다. 간혹 A의 소식은 전해졌다. SNS는 차단되었지만 친구들에게서 들려오는 말들이 있었고, 단체사진 속의 그가 보였고, 소문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A는 여전히 내가 싫어하는 그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전만큼 밉지는 않았다. 그가 더 이상 내 삶에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꽤 지난 후 다시 이런저런 모임에 참여하며 어느 날의 행사에 참여했다. 낯익은 뒤통수가 보였다. 그토록 싫어하던 'A'가 있었다. 눈이 잠시 마주쳤지만 우리는 서로 슬며시 눈빛을 피했다. 이전이었다면 A가 나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나 또한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길길히 날뛰고도 남았을 터인데, 이상하게도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잠시 담배를 태우러 가는 사이 그를 지나치다 무슨 바람에선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배. 그는 약간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어어, OO아 오랜만이다- 인사를 받았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선 밖으로 나왔다. 나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 A가 했던 행동의 진의를 묻지 않았다. 단지 인사 정도는 받아줄 거라는 직감이 들었고 어느 지인에게 하듯 인사를 건넸다. 그에 만족했다.
미워하는 일에도 의미가 있다. 타당한 이유 없이 나를 괴롭게 한다면 미워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애꿎은 3자 또는 나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보다는 훨씬 건강한 사고방식이다. 다만 미워하는 감정을 반드시 마음속에 품고 있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지나갈 감정이라면 스스로가 감정을 부채질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이 짧은 글을 쓰며 왜 그토록 많은 시간과 감정을 A를 애써 미워하는 일에 소모했는지 생각했다. 나는 A를 미워하는 일이 나 스스로를 인정하는 방법이라 굳게 믿었다. A를 처음 미워했던 이유로 돌아가 보자. A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순간에'만' 나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 모습을 인식하니 나는 A가 나에게 멀어질 때마다 내 모습을 점검하곤 했다.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지?지난번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서인가? 저번 모임에 오지 않아서? 스스로를 점검하는 순간들이 많아지며 A의 태도에 나의 점수가 매겨진다는 기분이 들어 두려웠다. 그래서 A의 태도에 분노하지 않으면 그가 나에게 매긴 점수가 정말로 나의 가치가 될까 겁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천천히 이 사건을 짚어보며 새삼 깨달았다. 나의 가치는 특정인의 평가에 달라지지 않는다. 나와 A와의 관계와는 상관없이 나의 가치는 불변한다. 결국 발화 요인은 A였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다. 미워하는 감정은 첫번째가 아니라 두번째, 세번째여야 했다는 말이다. 나는 실체 모를 두려움을 태우려 A를 향한 화에 불을 붙이고 장작을 넣고 있었다. 벼룩을 잡으려 초가삼간을 태우고 있었던 격이다. A를 미워했던 그때의 나는 어렸다. 스스로를 인정하는 방법에 무지했으며 자신이 없었다.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이 써놓았지만 여전히 나도 누군가가 밉다. 미움을 그리 쉽게 털어버릴 수 없다는 사실도 매번 깨닫는다. 또 누군가에게 미움을 얻곤 한다. 억울하고 화가 나 변명을 하고 싶어 진다. 그럴 때면 A를 미치도록 싫어했던 날들을 떠올린다. A를 그렇게 열렬히 미워하고 나서야 그를 미워하지 않는 방법을 알아냈다. 나를 인정하는 방법, 잠시 환경을 바꿔버리는 방법도. 미움은 그래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