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호선 영등포구청역의 스크린도어가 열리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수많은 넥타이 부대가 썰물처럼 밀려 들어온다. 그 거대한 인파 속에 나라는 존재는 먼지처럼 섞여 들어간다. 한때는 이 지옥철의 풍경이 견딜 수 없이 숨 막혔던 적도 있었다. 누군가의 백팩에 옆구리를 찔리고, 타인의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정체불명의 비트 소리를 강제로 공유해야 하는 출퇴근길.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음악과 글이라는 창작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현실의 ‘삶’을 살아온 지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어느새 이 무채색의 풍경에 완벽하게 동화되어 있었다.
퇴근 후 씻지도 않고 소파에 널브러져 넷플릭스를 켜는 것. 그것이 나의 유일한 낙이자 하루를 버텨낸 나에게 주는 보상이다. 맥주 한 캔을 따서 목구멍으로 흘려보내면, 직장 상사의 날 선 잔소리도, 풀리지 않는 업무의 스트레스도 알코올과 함께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글은 안 써? 요즘 통 블로그가 조용하더라?" 가끔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준비된 답변을 기계처럼 내뱉었다. "야, 먹고살기도 바쁜데 글은 무슨. 요새 회사 일이 장난 아니야. 주말엔 기절해 있느라 바빠." 틀린 말은 아니다. 대한민국 직장인 치고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내심 알고 있었다. 그것은 현실의 팍팍함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달콤함에 취해버린 나의 비겁한 변명이라는 것을. 월급이 들어오는 날의 안도감, 주말이면 맛집을 찾아다니며 술 한잔을 즐기는 소소한 사치. 그 안온한 일상은 치열하게 자신을 갉아먹어야만 결과물이 나오는 창작의 고통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었다. 나는 그렇게 '현실'이라는 단단하고 안전한 방패 뒤로 숨었다.
그런데 요즘, 내 안온한 도피처였던 넷플릭스가 나를 몹시 불편하게 만든다. 바로 화제의 중심, <흑백요리사 2> 때문이다.
화면 속에는 그야말로 '계급 전쟁'이 펼쳐진다. 미슐랭 별을 가슴에 단,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타 셰프들은 '백수저'라는 고상한 타이틀을 달고 우아하게 등장한다. 그들의 요리는 경이롭다. 핀셋으로 꽃잎을 올리고, 스포이드로 소스를 떨어뜨리는 그들의 손길은 흡사 예술가의 붓놀림 같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완벽의 세계.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눈길을 사로잡는 건, 그 완벽한 백색 제복 사이에 선 '흑수저'들의 이야기였다. 그중에서도 유독 시선이 머무는 참가자들이 있었다. 나와 같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사람들. 안정된 월급쟁이의 삶을 제 발로 걷어차고, 불과 칼, 그리고 연기가 지배하는 야생의 주방으로 뛰어든 이들이다.
'바베큐 연구소장'이라는 닉네임을 단 참가자가 나온다.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텍사스도 아닌 한국 땅에서 정통 바베큐를 굽겠다고 나선 사람이다. 안정된 대기업을 다니며 틈틈이 자신이 사랑하는 바비큐에 몰두했다. 그 인내의 시간을 버텨낸 그는 흑수저라곤 하지만 그의 식당은 오픈이래 단 한번도 예약이 비었던 적이 없는, 백수저들 조차도 고기에 관해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대한민국 최고의 바비큐 전문가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술 빚는 윤 주모'라는 참가자 역시 국내 예술 계통의 최고 명문 서울예대 영화과를 졸업한 뒤 전공을 살린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연히 전통주의 매력에 빠지게 된 그녀는 그간의 공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쌀을 씻고 누룩을 디디는 길을 택했다. 화려한 유학파 셰프들의 이력서 옆에 선 그들의 이력은 어쩌면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들은 유독 긴장한 듯 보였다. 특히 윤 주모 님이 손을 벌벌 떨며 요리하는 장면은 내 마음에 깊게 박혔다. 하지만 손은 떨릴지언정 그들의 요리에는 거침이 없었다. 긴장은 할지언정 주눅은 들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자신들이 엘리트 셰프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미친 듯이 갈아 넣었을 그 지난 시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들은 거창한 사명감이나 세계 정복 같은 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숯검정이 묻은 얼굴로, 혹은 누룩 냄새가 밴 옷을 입고 멋쩍게 웃으며 말한다. "그냥, 이게 미치도록 좋아서요. 제가 만든 이 맛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요."
내가 그들의 이야기에 유독 숨죽이며 몰입했던 건, 어쩌면 나 역시 '방향을 바꾼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의 방향과 나의 방향은 정반대였다. 나의 20대는 온통 음악이었다. 무려 15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기타 줄에 손가락 끝이 짓물러 굳은살이 박히고, 지하 연습실의 곰팡내를 향수처럼 달고 살았다. 언젠가는 내 음악이 세상에 울려 퍼질 거라는 믿음 하나로 버틴 세월이었다. 하지만 서른이 넘어가고, 친구들이 하나둘씩 과장 명함을 달고 결혼 청첩장을 돌릴 때, 나는 내 믿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통장의 잔고는 늘 바닥이었고, 음악을 향한 열정은 생활고라는 차가운 현실 앞에 자꾸만 초라해졌다. 결국 나는 기타를 내려놓았다. '꿈'이라는 방향지시등을 끄고, '현실'이라는 내비게이션을 켰다. 그렇게 나는 넥타이를 매고 영등포구청역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그들은 현실을 버리고 꿈을 향해 방향을 틀었지만, 나는 꿈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해 방향을 틀었다. 그 차이가 나를 묘하게 부끄럽게 만들었다. 직장 생활을 하며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어쩌면 음악으로 다 채우지 못한 내 안의 창작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니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릴 때면, 예전 무대 위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희열을 느꼈으니까. "작가님이 되시는 건 어때요?" 내 글을 본 누군가가 칭찬해 줄 때면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두려웠다. 음악이라는 하나의 꿈을 15년이나 붙들고 있다가 놓아버린 패배감이 내 발목을 잡았다. '이제 겨우 직장인으로 적응했는데, 또다시 작가라는 불확실한 길을 꿈꿔도 될까?' 또다시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불안감, 그리고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이 주는 현실의 안도감. 그 사이에서 나는 갈팡질팡했고, 결국 '지속'하지 못했다. 음악을 포기했을 때처럼, 나는 글쓰기도 슬그머니 놓아버리고 도망쳤다.
그런데 화면 속의 저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바베큐 연구소장'이 굽는 고기는 가스불을 켜면 뚝딱 만들어지는 요리가 아니다.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부드러워지고, 깊은 향을 머금기 위해서는, 참나무 장작이 타들어 가는 매캐한 연기를 10시간 넘게 들이마셔야 한다. 불 앞을 떠나지 못하고, 온도를 체크하고, 고기의 위치를 바꿔가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한다. '술 빚는 윤 주모'의 시간은 또 어떠한가. 술이 제대로 된 맛을 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미생물, 곰팡이와 싸워야 한다. 계절의 온도를 예민하게 맞추고, 쌀알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으며 몇 달, 몇 계절을 기다려야 한다.
그들은 매달 25일이면 어김없이 들어오는 월급의 마약 같은 안정을 포기했다. 대신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과 육체의 고단함을 샀다. 주변에서 "미쳤냐?"고, "정신 차리라"고 혀를 차는 소리를 수백 번도 더 들었을 것이다. "네가 무슨 요리냐, 그냥 회사나 열심히 다녀라." 그런 핀잔은 아마 그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을 테다. 하지만 그들은 타인의 시선이나 현실의 조언 대신,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따랐다.
그들이 뜨거운 불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릴 때, 나는 시원한 사무실에 앉아 "요즘 너무 바빠서 글 쓸 시간이 없어"라고 합리화했다. 사실은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또다시 실패할까 봐, 이 안락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잃을까 봐 겁이 났다. 음악을 포기했을 때의 그 패배감을 다시 맛보기 싫어서, 나는 한동안 펜을 잡는 시늉만 하다가 슬그머니 내려놓곤 했다. 그런 글이라도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도망쳤다.
방송을 보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글을 쓰지 않은 건 정말 현실이 팍팍해서였을까? 아니었다. 나는 팍팍한 현실을 뚫고 나갈 만큼 내 글을 사랑하지 않았다. 연기를 견디고, 곰팡이를 견디고, 지난한 기다림을 견디는 그 지독한 '지속의 힘'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들은 '흑수저'라는, 어쩌면 자조 섞인 계급장을 달고 나왔지만, 그들이 접시에 담아낸 것은 누군가의 동정을 바라는 아마추어의 요리가 아니었다. 인생을 걸고 버텨낸 자만이 낼 수 있는, 깊고 진한 훈연의 맛이자 세월이 빚어낸 발효의 맛이었다.
그리고 그 두 참가자가 심사 위원의 호평에 울컥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맥주 캔을 내려놓았다. 그들의 서사에 동정심을 느껴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분야에서 깊게 자리를 잡은 실력자들이다. 내가 인상 깊었던 건 그들이 1라운드에서 합격한 뒤 보였던 감격스러움은 이제 성공할 수 있겠구나의 느낌이 아닌 아, 내가 보낸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구나의 느낌이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오롯이 한 길만을 걸었던 셰프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중간에 길의 방향을 바꾼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런 안도감이었다. 내가 틀리지 않았었구나 라는 그 안도감. 내 스스로 나를 셰프라고 부를 수 없어 연구소장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는 유용욱 셰프의 말은 그래서 더욱 내게 깊게 다가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주방 식탁 한구석에, 영양제 통들과 각종 고지서 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노트북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윙- 하는 팬 소리와 함께 낯익은 부팅 화면이 떴다. 마지막으로 저장된 파일 날짜가 2년 전이다. 먼지 쌓인 키보드를 물티슈로 닦아낸다. 하얀 물티슈가 금세 회색 먼지로 뒤덮인다. 이것은 단순히 노트북의 먼지가 아니라, 내 마음 위에, 내 꿈 위에 쌓여있던 게으름의 두께일지도 모른다.
고기를 굽는 마음이나 글을 짓는 마음이나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바베큐가 '이븐하게' 익기 위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야 하듯, 글 또한 일정한 온도의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제대로 된 문장 하나를 건지기 위해선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의자를 지켜야 하는 인내가 필요하고, 설익은 생각들을 숙성시키기 위해선 고독한 사색의 밤을 보내야 한다. 때로는 너무 센불에 문장이 타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약한 불에 글의 맛이 밍밍해지기도 할 것이다. 그 실패와 수정의 반복.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기꺼이 즐기는 것. 그것이 그들이 보여준 '요리'였고, 내가 잊고 있었던 '집필'이었다.
나의 20대, 뮤지션을 꿈꾸며 밤새워 기타를 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돈이 없어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코드를 잡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다. 하지만 나는 자전거에서 내렸다. 길이 험해서가 아니라, 넘어지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그리고 직장인이라는 안전한 4륜 자동차로 갈아탔다. 편안했다. 하지만 가슴이 뛰지는 않았다. 글을 쓰는 일은, 내게 다시 자전거를 타는 일과 같다. 또 넘어질지 모른다. 음악처럼 15년을 쏟아부어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 화면 속, 훈연 연기를 마시며 웃고 있는 바베큐 연구소장을 보라. 곰팡이 핀 쌀을 보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술 빚는 윤 주모를 보라. 그들은 결과가 두려워 과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부터 나는 다시 나의 주방으로, 아니 나의 책상으로 출근하려 한다. 당장 미슐랭 셰프들처럼, 혹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처럼 화려하고 세련된 글은 쓰지 못할지 모른다. 아마 오랜만에 쓴 내 글은 겉은 타고 속은 덜 익은, 간도 맞지 않는 어설픈 요리가 될 공산이 크다. 어쩌면 안성재 심사 위원 같은 독자가 나타나 "이 글의 의도가 뭡니까?"라고 묻는다면 얼굴이 빨개져서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현실 핑계를 대며 도망치지는 않으려 한다. 한 번 방향을 바꿨다고 해서, 다시 방향을 바꾸지 말란 법은 없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눈물을 닦아가며 기어코 고기를 굽는 저들처럼. 곰팡이가 핀 쌀알을 들여다보며 술이 익기를 기다리는 저들처럼. 나도 이 팍팍하고 건조한 일상에서 기어코 문장 하나를 구워내 볼 작정이다.
덜 익으면 좀 어떤가. 다시 불에 올리면 된다. 탔으면 좀 어떤가. 탄 부분은 잘라내고 다시 구우면 된다. 중요한 건, 내가 다시 조리대 앞에 섰다는 사실이다. 텅 빈 모니터의 하얀 화면이 깜빡이며 나를 기다린다. 마치 뜨겁게 달궈진 프라이팬처럼. 자, 이제 재료를 손질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