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브라제 Jun 13. 2024

엄마를 고독사로 떠나보내게 되었다.

나의 마지막 유서장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입니다. 이름 부터가 딱 저를 말하는 것 같았어요. 사실 전 엄마와 절연을 하고 아빠와 함께 살았습니다. 엄마와 절연한 이유는 외가(엄마의 형제들)의 참견 때문이었습니다.


 저희가족은 엄마와 아빠와 저 이렇게 세 가족이지만 실제로는 그 속에 외가 형제들도 비집고 들어와 있었습니다. 외삼촌은 저희를 독립적인 가정으로 보지 않으셨어요. 정신질환이 있는 엄마를 치료를 받게 하려고 할 때면 엄마는 외삼촌에게 남편과 자식이 날 정신병자 취급을 한다며 일렀고 그럼 저희에게 쫓아와 막으셨습니다. 엄마는 사소한 것도 잘 이르셨는데 제가 엄마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모와 외삼촌께 연락했고 그러면 그 즉시 저에게 전화를 걸어와 왜 엄마 말을 안 듣냐며 언성을 높이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엄마를 통해 아빠 수입을 검사하고 확인했습니다. 엄마는 외삼촌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서 아빠가 외벌이를 하니 수입관리나 대출 이야기를 아빠와 해야하는데 항상 외삼촌과 하셨어요. 그래서 아빠는 정확히 집에 대출이 얼마 있고 돈이 얼마 있는지 모르셨습니다. 아빠가 통장을 보려고 하면 엄마가 드러누우며 난리를 쳤기때문에 확인하기 어려웠죠.


외가와 연락을 자주 할수록 엄마는 점점 더 미쳐 갔습니다. 폭력성이 심해지는 것은 물론 제 앞에서 자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우리 오빠는 대통령이랑 친해서  아무도 나 못건드려! 우리 오빠는 대단한 사람이야!” 하면서 소리지르시며 뛰어다니셨습니다. 사람들은 오빠를 형제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닌 마치 사이비 교주를 신봉하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엄마는 멀쩡한 자신을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려고 했다고 저에게 “아빠보다 너가 더 나빠, 어떻게 날 정신병원에 넣으려고 해? 내가 우리 오빠한테 일러서 살인청부업자 고용해서 너 죽여버릴거야.” 라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전문적인 치료를 받게 하고 싶었지만 외삼촌의 방해로 치료를 받게 할 수 없었어요.


외삼촌의 참견은 더 심해져 제가 독립을 하고자 할때도 자신에게 저의 통장을 검사받으라고 하셨어요. 말도 안되는 일이죠. 엄마는 외삼촌에게 허락 받지 않으면 독립을 못한다고 소리를 지르며 발광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삼촌에게 통장 검사를 받고 허락을 받은 후에야 집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부모가 아닌 외삼촌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 없었죠.


참지 못한 아빠는 외삼촌에게 “그렇게 참견할거면 동생(엄마)를 데려가서 같이 사세요.” 라고 했더니 웃긴건 그건 싫다고 합니다. 왜 내가 데려가냐고 말이죠. 어이가 없었습니다. 참견은 하고 싶어도 책임은 지기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망상장애가 있는 이모도 우리집을 풍비박산내는데 일조 했습니다. 어릴적 이모는 자기가 심리상담을 배웠다며 너의 마음을 그려보라고 해서, 엄마의 정신병과 학교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저로서는 검은색 크레용으로 종이를 검게 색칠했더니 형부인 아빠에게 전화해 “종이를 검은색으로 칠한것을 보니 형부 딸은 자폐아다. 치료가 아주 시급하다 .” 라고 해서 아빠가 저에게 전화를 걸어 화가 난 목소리로 당장 그곳을 나오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니는 학교에 연락을 해 “우리 언니는 미쳤고 조카는 자폐아라 선생님께서 힘드실거예요.” 라고 해서 놀란 선생님이 나를 부른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허위신고해서 저와 아빠는 새벽에 자다말고 경찰들에게 끌려나와 강제 분리되서 각각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유도 모른채 끌려나온 전, 무서움에 아빠와 같이 조사를 받겠다고 했고, 아빠도 불안해 할 저를 위해 함께 조사받길 간곡히 청했지만 단호하게 거절 당했습니다. 저는 처음 당해보는 이 상황에, 놀란 마음을 진정 시킬 수 없었습니다. 경찰들은 우리를 각각 조사를 한 다음 아빠와 저의 말을 비교를 한 후, 서로의 말이 일치하다는 것과 신고가 허위라는 것은 확인한 다음에야 전 아빠에게 갈 수 있었죠.


아빠는 제발 형제들과 거리를 두라고 엄마에게 여러번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모에게 남편이 우리 형제들과 절연하게 한다라고 이르면 “야 이개새끼야!!” 라며 전화를 걸어 욕을 퍼부었습니다. 이로인해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싸움 도중에 엄마가 이모에게 일렀는데, 그러면 이모가 엄마와 아빠에게 번갈아 전화를 하며 엄마에게는 ”저 새끼 신고해서 감방에 쳐 넣어“라고 했고 아빠에게는 ”미친새끼야!!! 내가 너 가만히 안둘거야!“ 라고 욕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제가 독립을 하고 얼마 후 아빠도 집을나와 제가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우리가 나왔을때는 모든 명의가 엄마 명의로 되어 있기도 했고 통장도 모두 엄마가 관리 했던터라(안그러면 엄마는 이성을 잃고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습니다) 돈이 없던 우리는 작은 원룸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절연을 하고 서로 연락도 없이 몇년을 살다가 작년에 엄마가 사는 빌라 통장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현관문 사이로 구더기가 나오고 악취가 난다고 이웃들이 모두 무서워 하고 있다. 라고 말이죠. 놀란 아빠는 당장 집으로 갔고 경찰과 소방서에 신고를 했습니다. 아빠는… 부패해 썩어 문들어진 엄마의 시체를 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경찰들과 소방관, 국가수사대 분들이 오셔서 현장을 살펴보셨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저희 빌라로 몰렸고 경찰들은 제가 가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듣기로는 엄마는 현관에 쓰러져 있었고 온 몸을 구더기와 파리들이 뒤덮고 있었으며 알까지 까 놓은 상태였다고 죽은 후 방치가 된 상태였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끔찍했습니다.


그 후 아빠와 전 정신차릴 겨를도 없이 장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외가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였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불편한 만남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우리집 깊숙이까지 참견했던 외삼촌은 저희들의 눈도 마주치기 싫어했습니다. 사람이 잘못들어와 내 동생이 죽었다고 했죠. 어처구니 없던것은 자신이 동생(엄마)를 데려가 돌봐주려고 했는데 우리가 그것을 막았다며 저희를 원망을하더군요. 위에서 언급했듯이 하도 참견하는 외삼촌에게 엄마를 데려가라고 했지만 싫다고 하기도 했고, 정말 챙겨주고 싶었다면 우리가 엄마와 절연을 했던 그 몇년간 충분히 데려가 돌볼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서 저희를 원망하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우리가 떠난 후 엄마를 방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양쪽에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엄마는 자신의 생을 놓으셨던 것입니다. 저희가 있을땐 마구 참견을 하더니 막상 혼자가 되니 책임을 지기가 싫었던 것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과거 이야기가 나와서 아빠는 이모에게 우리에게 왜 그랬냐 라고 물으니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잡아땠습니다. 그리고 말리러 온 아빠의 형제분께 “내가 당신 동생 감방에 쳐 넣을거야. 우리 자매를 만나지 못하게했어.” 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장례식때 엄마의 많은 형제들 중 한 분을 제외하고 발인때까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집에 왔을때 이모의 자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외삼촌이 엄마의 위폐를 보내라고 했다고 말입니다. 아빠는 직계가족인 우리가 가지고 있겠다고 말하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돈은 있기나 하고?”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돈이 없으면 물을 떠놓고서라도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참견 말아라. 그리고 정말 가져가고 싶으면 외삼촌이 우리에게 직접 연락해야지 조카시켜서 이게 뭐하는 거냐“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촌은 아빠에게 ”야, 너 입 안닥쳐? 내가 지금 참고 있는거 안보여?!“ 라고 말하자, 저는 아빠의 핸드폰을 꺼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빠와 전 원룸생활을 정리하고 엄마가 부패되었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집을 팔기 워려웠기 때문이죠. 그 이후 저는 폭식증이 심해졌습니다. 유적전인 것인지 환경적인 것인지 어려서 부터 가지고 있었던 우울증은 극도로 심해져 자살충동까지 일어나곤 했습니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 라고 했지만 저는 한번도 엄마의 강한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저는 아직도 이 말이 많이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강하셨습니다. 저를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일을 나가시기까지 하셨죠. 사람들은 저를 손가락질 했습니다 다 큰자식이 아버지 기대어 산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와 같이 강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더라도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서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원망스런 마음이 복합적으로 남아있었고, 비참하게 떠나간 엄마의 흔적이 있는 곳에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몸을 일으킬 힘도 없었고, 그저 숨을 들이킬 틈도 없이 음식물을 입안에 쑤셔 넣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도 눈물이 터져나왔고… 전 그렇게 히루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목요일 연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