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보면 보이는 세상
찰칵
현재 나는 혜지씨와 블라디보스톡을 아무 계획 없이 뚜벅이 관광 중이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혜지에게 '여행에 오면 남는게 사진'이라며, 평소에 나의 갈고 닦던 사진 실력으로 그녀의 인생 샷을 남겨주고 있는 중이다.
호스텔을 나와서 10분간 걷다보니 금세 아르바트 거리가 나타났다.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아르바트 거리에는 남녀 커플들이 양옆에 놓인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면서 잉꼬들 마냥 각자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길을 따라서 보이는 것은 시원한 분수대들이었다. 그리고 그 분수대 주위로 인형같이 생긴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그 작은 발들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도 잠시 여기에 발걸음을 멈추어 순간을 사진 안에 담아보겠다고 노력을 하고 있다. 혼자 알아서 이런 저런 포즈를 취하던 혜지는 혼자 계속 사진을 찍기가 뻘쭘했던 모양인지 이번에는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제안을 해왔다.
사진기공포증
하지만 혜지의 갑작스러운 제의를 결국 나는 거절하고 말았다. 사실 나는 남의 사진을 정말 이쁘게 잘 찍어주지만, 내 사진은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진기를 내 얼굴로 향하면 갑자기 내 얼굴이 굳어지는게 느껴진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자연스럽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한다. 내가 느끼기에도 이상하다, 하지만 이건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다보니 자꾸만 렌즈 뒤로 숨어서 남의 사진들을 찍어주는 것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이렇게 수준급 인생샷을 찍어주는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어디를 다녀와도 내 사진이 별로 없다는게 아쉬울 뿐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사진을 좀 많이 찍어서 남겨놔야할텐데, 다음에는 사진을 찍어보자라는 혼자만의 조그마한 결심만 해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여행 오기 전에 공부한 것에 의하면 여기 아르바트 거리는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를 본따 만든 소규모 복제품이라고 한다. 블라디보스톡의 아르바트를 보고 있자니 모스크바의 있을 아르바트 거리는 어떨까 더욱 궁금해졌다.
걸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정말 하염없이 넓고 넓은 바다, 하지만 정말 푸르고 짙은 남색의 바다였다. 지평선에는 걸리는 게 하나도 없이 정말 광활하게 펼쳐진 해안선을 보면서 한가지 생각이 들었다.
찾았다! 오늘 이곳에서 노을을 볼 것이다. 짙은 남색 빛깔 바다 위로 수놓아지는 붉은 노을을 상상해보았다. 아 상상만으로도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이번 여행에 있어서 세운 철칙이 몇가지 있다.
하나는 도시마다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아 꼭 보고 이를 기록할 것. 둘은 나라마다 가장 유명하거나 일상적인 맥주를 맛보고 야경을 즐기며 기억 속에 담을 것. 셋은 너무 유적지만을 찾아다니지 말고 때로는 그냥 그 도시의 분위기를 만끽할 것.
우리는 발걸음을 옮겨서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 독수리 요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실 러시아여행에 대해서 정보를 얻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블라디보스톡을 적어놓은 가이드북은 찾을 수 없었고 겨우 인터넷에서 블라디보스톡을 다녀온 여행블로그를 찾아 정보 몇장을 스크랩해놓았을 뿐이다. 거기서 본 독수리 요새에 대한 위치를 대략적으로 구글맵에다가 저장해놓고 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