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고 나름 서둘렀는데 미로에 갇힐 때가 있다. 답답한데 도무지 뭐가 답답한지 알 수 없을 때, 뭘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시간은 사람을 무너뜨린다. 그런 시기를 되돌아보면 결국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나를 이해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부족함, 서툰 선택과 실패, 결핍. 나를 외면하며 걸을 때 길은 곧 미로가 된다.
처음 성격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 에니어그램을 통해서였다. 당시 나는 회사와 일에 권태를 느꼈고. 원인 모를 불안과 답답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직 준비를 위해 신청한 코칭 클래스에서 DISC 검사를 했지만 2%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팟캐스트 '어느 별에서 왔니'를 통해 에니어그램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알게 되었다. 타고난 기질, 성격 원리를 통해 나의 진짜 욕망과 결핍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은 곧 희망이 되었다.
* 에니어그램 : 인간의 성격 및 행동 유형을 9가지로 분류한 이론.
그런 희망에도 불구하고 내 진짜 유형(참유형)을 찾기까지 에니어그램은 1년, MBTI는 꼬박 6년이 걸렸다. 매번 아리송한, 그러니까 대충 맞는 거 같은데 속 시원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그게 다 스스로 씌워놓은 가면에 속은 덕분이었다. (스스로 만든 가면에 자신도 속는 것은 에니어그램 3번의 특징 중 하나다.)
시온님은 무조건 ENFJ 아니면 INFJ에요!
가면은 생각보다 많은 성과를 냈다. 회사 동료, 모임, 친구, 나 자신까지 골고루 영향을 주었는데. 그 중엔'자칭 MBTI 선무당'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젠 슬쩍 보기만 해도 특정 유형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런 그들이 주장한 내 유형은 ENFJ였다. (나도 헷갈렸지만 결국 난 INTP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자신과 타인의 유형을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흔한 경우가 변화에 관한 것인데. MBTI 유형이 바뀐다거나 검사 시기, 인간관계, 상황에 따라 유형이 모두 다르다고 한다.왜 그럴까. 답은 가유형, 직업유형에 있다.
1) 가유형 : 가짜 유형
- 자신의 선천적 선호경향과 반대되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환경에서 생활할 때 만들어지는 유형
2) 직업유형
- 직업에서 요구하는 특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유형
3) * 참유형
-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의 진짜 유형
청소년 코칭, 강의, 교육 회사 운영을 하기 전 나는 안과 밖 모두 완벽한 T인간이었다. 성장하는 학생들의 (그것도 F 유형 학생들의) 담당 코칭 선생님이 대문자 T라고 상상해 보자. 그야말로 눈물바다가 따로 없었다. 결국 나는 말투, 표정, 행동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큰 에너지 소비와 스트레스를 안겨주었지만 결국 대충 보면 F 같은 인간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성공은 기어코 나 자신도 속였다.
참유형을 알기는 참, 어렵다. 아니 두렵다. 이해하려면 우선 알아야 하는데. '어떠한 나'라도 인정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다. 때문에 참유형을 '진짜' 찾겠다고 다짐할 땐 지식도, 강의도 아닌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조차 잊고 살았던 가장 어린 시절의 나, 가장 서툰 시절의 나를 만나도 괜찮다는 애틋한 용기 말이다.
네가 뭔데 나를 판단해.
MBTI로 섣불리 자신을 판단하는 게 싫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런 현상은 자칫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일단 짐작한 그 유형이 가유형인지, 직업유형인지, 참유형인지도 타인이 알 수 없고. 어쩌다 참유형이 맞다 하더라도평가 수단이 된 MBTI는 폭력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평가하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에게 선뜻 용기를 내어 줄 사람은 없다. 그게 자기 자신이라 하더라도.
진짜 나를 만나고 싶다면 앞으로 치켜세운 마음의 검지 손가락을 내려야만 한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보자. 그저 알아주겠다는 다짐과 미소, 끄덕임. 그래야 MBTI가 나를 만날 수 있는 '진짜 수단'이 된다. 그제야 비로소이해는 다정이 된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참유형을 알고 자신답게 성장하기를,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MBTI가 흉기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