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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시아 May 24. 2022

감정의 당위성

세상의 모든 감정이 존중받기를

야 자랑하고 싶은거 있음 얼마든지 해, 난 하나도 부럽지가 않어
근데 세상에는 말이야 부러움이란거를 모르는 놈도 있거든
그게 누구냐면 바로 나야


장기하 <부럽지가 않어> 中


최근 푹 빠져 듣고 있는 노래 중 하나. 6월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느껴지는 따가운 여름 햇볕 속에 듣고 있으면 대신 속이 시원하면서도 정신 승리를 위해 무기를 장착할 때 듣고 있기 딱 좋은 노래다.


일상생활에서 많이 듣고 쓰는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말에 보란 듯이 장기하는 말한다. 부러운 것을 모르는 나야말로 진정한 승자임을. 덤덤하게 턱을 쳐들고 읊조리는 장기하의 시니컬한 모습이 절로 상상된다.  그리고는 '와... 나도 저렇게 위풍당당 쿨해져야지'하며 은연중의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그의 모습을 부러워해보기도 하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부러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과연 여유 있고 마음이 넉넉하기만 한 사람일까? 솔직하게 부러워할 수 있고 나의 그런 마음을 바라봐줄 수 있고 어? 나 부러워하는구나라고 내 마음을 더 살펴주는 사람도 부러움이 없는 것만큼이나 건강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매 초, 분 단위로 뉴런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고 지나가는 모든 것들에 자극을 받는다. 그에 따라 사람의 이성과 감정은 시시각각 바뀐다. 이렇게 바뀌는 감정을 다스리고자 불자는 수련을 하고,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공존의 연습을 거듭한다.


이런 감정에 대해서 옳고 그름, 좋고 나쁨으로 잘못된 교육이 쉽사리 이루어질 때가 많다. 인간은 슬프거나 아프거나 힘들 때 울고 싶으면 울어야 한다. 배가 고플 때 밥을 먹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울지 않아야 착한 아이,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아이라고 배우면서 큰다.


화가 나서 소리를 칠 때면 화가 먼저 보듬어지기보다는 그 처절한 악의 데시벨이 높다는 것에만 집중되기도 한다. 화가 난 이유와 마음을 먼저 마주해주지 않는다. 고성을 내지르는 그 행위 자체가 '나쁜'행위이기 때문에 화는 그 나쁜 행위와 한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화내는 일은 나쁜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어떠한 행위를 할 때 당위성을 찾는다. 내가 합당하지 못한 상황에 처해지면 일단 내 행동과 내 감정이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바란다. 험담도 이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판단이 그릇되지 않음을 공유하고, 내 분노의 대상이 한 잘못된 행동에 대해 함께 평가를 내리고, 그 이후 내 감정이 공감받는 과정. 타인의 시각과 발언을 통해 내가 갖는 감정의 당위성을 확인받고, 내 행동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받는 그 순간 안도와 함께 쾌감을 느낀다.


또 다른 감정에 대한 잣대는 가스 라이팅의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내가 그렇게 죽을 만큼 큰 죄를 진 것도 아닌데, 미친듯한 죄책감과 자책, 그리고 상대방이 이로 인해 나를 미워할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가스 라이팅을 하는 대상자는 그 하나를 빼면 모든 것이 좋은 사람이기에 더더욱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닐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저 사람에 대한 서운함과 슬픔이 틀린 감정은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한다. 결국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럴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오히려 느끼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을 반사회적 인격장애증, 사이코패스,라고 병으로 구분 짓는다.


부정적인 감정은 유해한 감정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나에게 나쁜 일이니 누르고 외면하고 참아내고 억지로 밀어내야 할까? 아니다. 공존해야 한다.


만일 내가 처한 상황이나 상대방에 의한 자극 때문에 내가 화가 나고, 억울하고, 슬프다면 그것이 틀린 감정일까? 가스 라이팅의 경우엔 죄책감이 가장 크다. 그럼 그 사람이 죄책감을 갖는 게 잘못된 일일까? 아니다. 이는 그 사람이 죄책감을 갖게끔 유도하고 악용하는 상대방이 잘못된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행위에는 명분과 당위성이 요구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은 당위성을 찾을 수 없고 찾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감정은 타인을 통해서 인정받아야 옳은 감정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나의 감정을 존중해주자. 내 안의 내면 아이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자. 어린아이를 가혹하게 매질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자. 오늘 기쁜 내 마음은 더욱 크게 확대해서 보고 슬펐던 마음은 따뜻하게 안아주자. 그렇게 내 마음이 안정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마음도 끌어안을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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