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이물질로 응급실 오시는 분들이 은근히 흔하다. 직장 내 괴롭힘 할 때, 그 직장 아니라 다른 직장. 응급실에서 만나는 환자 분들일수록 병력청취를 꼼꼼하게 해야하지만 이런 분들께는 예외적으로 꼬치꼬치 캐묻진 않는다. "샴푸통이 왜 거기에 있죠. 샤워하시다 엉덩방아를 찧으셨다구요. 어떻게 엉덩방아를 찧으셨길래 그렇게 돼죠" 따위 질문은 하지 않고 사무적으로 빼드린다는 의미.
그 날도 페트병 혹은 유리병으로 보이는 물건이 우연히 항문으로 들어가서 응급실로 오신 분이 있었다. 유리병인 경우 무리하게 빼려다가 깨트릴 수 있기 때문에 그 정도 병력청취는 해야한다. 문제는 그 분이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외국인이셨다는 점이다. 국적이라도 알면 번역기 어플로 대화를 했을 텐데 where are you from 의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다. 파견갔던 병원은 공단 옆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 분들이 종종 있었다.
번역기에 짐작가는 국적을 입력하고 "유리병? 페트병?"을 번역한 뒤 보여드렸다. 입장바꿔 생각해보면, 외국 병원 응급실로 갔더니 어떤 의사가 "중국어, 일본어, 대만어" 등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과 다름없으니 인종차별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이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많은 일에 치이던 나에게 그런 배려심은 욕심이었다. 거의 20개 나라언어로 번역결과를 보여드리는데도 갸우뚱 갸우뚱만 하셨다. 속이 타들어가던 나는 직접 만져보고 어떤 병인지를 확인하기로 했다. 장갑을 끼고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서 병의 질감을 확인했다. 손가락이 긴편인 나도 손 끝에 간질간질할 정도로만 만져졌다. 진짜 깊게도 넣었구나. 이게 페트병이야 유리병이야. 장갑을 벗고 만져봤다면 알 수도 있었겠지만 장갑을 벗고 넣는건 죽기보다 싫었다.
구글링한 사진입니다.
고민하다가 1회용 질경으로 항문을 넓히고 눈으로 직접 보자는 생각을 했다. 산부인과에 연락해서 1회용 질경을 받아온 다음에 젤을 듬뿍 바르고 조심스럽게 항문쪽에 삽입한 다음에 벌렸다. 눈으로 보니까 페트병 라벨지가 보였다. 페트병임을 확인하고 수술하지 않고 빼드려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힘조절을 하면서 넓혔다 좁혔다를 반복했다. 이게 은근히 체력을 많이 쓰는 일이고 당시는 한 여름이었기 때문에 땀도 뻘뻘나서 가운도 벗고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환자분도 길어지는 진료에 신음을 내셨다. 하지만 그건 고통을 참아내는 신음소리와는 약간 달랐다. 듣는 내내 기분이 좋진 않았다. 30분정도 힘써보다가 포기하고 얼굴이 벌개진 상태로 커튼을 열고 나왔다. 응급실에 있던 다른 환자분들과 간호사 선생님의 시선이 느껴졌다.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교수님께 수술해야할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다. "아 그래? 그럼 수술 준비해. 그리고 페트병이면 뚜껑 닫고 넣으셨는지, 뚜껑 열고 넣으셨는지 좀 물어볼래? 뚜껑 열고 넣었으면 빠그라트려서 뺄 수도 있거든" ...
"유리병? 페트병?" 수준의 대화도 안 되는데 이 같은 고급 회화를 어떻게 해야하지. 편의점에 가서 가장 비슷하게 생긴 페트병 (트레비)를 산 다음에 원샷을 했다. 원래 탄산 잘 안 마시는데 속이 타서 원샷이 쉽게 됐다. 한 숨 돌리고 다시 응급실로 향해서 트레비를 보여드렸다. 트레비를 보시더니 아이처럼 웃으시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이셨다. 그래... 반갑겠지...
그리고 허리를 90도로 숙인 다음에 트레비를 내 항문에 넣는 시늉을 했다.
"으으? 이거? 여기? 항문에?"
"오오 어어"
뚜껑을 열고 "뚜껑? 오픈? 여기? 어어?"
"에에? 어어? 도리도리"
"아 뚜껑 노?"
그러더니 내 트레비를 가로채서 뚜껑을 벗기고 자기 항문에 넣는 시늉을 하시는 환자분.
"아 노 뚜껑? 오케이! 굿굿!"
"예야 굿 굿!"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의사소통에 감격하다가 주변을 정신차리고 둘러봤다. 성인 남성 둘이 트레비 하나 번갈아가면서 서로의 항문에 넣으려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썩 보기좋은 모습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왈칵 부끄러워져서 헐레벌떡 올라와 수술 준비를 했다.
참고로 그 분, 마취하고 근이완제써도 안 나와서 배로 들어간 다음에 장 짤라서 꺼냈다. 넣으시는 건 뭐라고 안하겠는데요, 적당한 것으로 넣어주세요... 본인을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