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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태균 Sep 04. 2020

우리는 디지털 양의 꿈을 꾸는가?

펜데믹과 디지털 리터러시 그리고 웹 전시

윤태균 (예술학)
(본문은 전시 <<CLICKSCROLLZOOM>> 도록에 게시되었음 http://clickscrollzoom.com/)
 
1.
지금은 ‘코로나-이후인가? 이전의 모더니즘은 스스로의 가치를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것에 두었다. 모더니즘의 지향성은 과거에 대한 성찰이 아닌 미래와 예술에 있었다. 미래주의와 모더니즘에서 보아하듯, 미래는 모더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쫓아야  종착지였던 것이다.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와의 연계점을 찾는 모더니즘의 시도들은 자신의 시간을  서술될 역사의  부분에 배치하고자 했다.  모더니즘이 구축해온 고유한 지향성들은 그들의 현재를 어떠한 총체로서의 역사에 통합하려는 시도였다. 끊어지지 않고 끝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쇠사슬과 같이, 모더니즘이 기획한 역사는 변증법이라는 매개로 이어진 거대한 사슬이었던 것이다. 거대한 사슬고리들은 단편적으로, 그러나 치밀하게 역사의 서술을 지속해왔다. 그러나 모더니즘 이후 미래, 예술, 새로움과 같은 구식의 가치들은, 여러 흐름을 통해 풍화되고 희석되어 왔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의도적으로 기피되고 거부되는 대상이 되었다. 이제 위와 같은 가치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로 완전한 종결을 맞은 것처럼 보인다. 모더니즘의 방식으로 서술되는 역사화를 용인하지 않는 지금의 시대는 ‘동시대라는 모호한 범주로 뭉뚱그려 거론된다. 비시간과 탈역사. 상대적 의미로서의 동시대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서있다. 발전이 아닌 차이, 총체가 아닌 파편이 동시대라는 범주가 지속되도록 복무하는 새로운 가치들이다. 동시대에 역사의 서술은 중단된다. 대신 파편들이 빚는 차이는 수많은 사건들을 만들어 내고 어떠한 현상을 창출하는데,  현상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서사가 아닌 다름 아닌 고고학이다. 이제 현실은 널따란 캔버스에 그려진 회화가 아니다. 동시대의 현실은 어지럽게 아상블라주 된 모호한 덩어리들의 집합이다. 때로  덩어리들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정의한 포스트모던에서와 같이 상호 침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기술과 예술, 정치와 문화, 음악과 조형예술, 저널리즘과 광고문화…. 이들 사이를 어지럽게 이동하는 범주와 가치들이 종국에는 화해점을 찾아  곳에 머무른다는 것인가? 기존의 전통적 가치와 범주의 화해적 재조합보다는,  현상들은 근원적 해체와 재조합의 과정을 겪는다. 분절되어 해체된 전통적 코드들은 동시대의 코드로 재조합된다.  코드의 재조합은,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아래서 (수용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파편화된 코드들은 시간상에 위치하지 않으며, 공간상에만 위치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제시한 포스트-미디엄 조건(Post-medium condition)에서 전통적 매체의 특정성은 예술의 범주 내에서 스스로 무너지며 예술은 결국 미적인 것을 포기하고 텍스트를 앞세운다. 반면 (크라우스는  부분에서 제임슨을 인용한다) 광고와 대중매체, 말하자면 ‘스펙타클 총체적 포화는 일상적인 삶을 이미지화하여 미적 경험이 어디든 존재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결국 예술과 예술의 아닌 것의 경계는 모호하게 된다. 이에 대한 크라우스의 입장은 차치해두고,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서 나타나는 가치의 해체와 재조합, 전복과 재구축이 갖는 효과를 살펴보아야  것이다. 다시 돌아와, 동시대인들이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엮을  있는 선험적 상상능력을 상실했다면 동시대인들의 인식은 세계의 파편들을 구성하는 것을 과제로 떠맡는다. 사건들은 역사로 설명되지 않고 즉각적으로,  공간적으로 ‘구성된다. 동시대의 사유는 목적론을 가지지 않으며, 공허한 역사적 서술이 아닌 ‘지금체험되는 유일한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유일한 시간은 역사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시간성을 상실한,  과거와 미래를 지금과 통합하려는 시도를 무한히 미뤄두는 유일한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벤야민(Walter Benjamin) 언급한 지금시간(Jetztzeit) 구원인가? 시간성을 상실한 동시대는 자폐적이다. 다시 한번 제임슨을 인용하자면, 우리가 맞이하는 동시대는 구원이 아니라 파멸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있는 일은 지금의 세계를 구성하는 극단의 현상들을 국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니힐리즘이다.
 
2.
팬데믹(pandemic)이라는 유례없는 상황은 시간성을 상실한 동시대에 어떠한 성찰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몇몇 비평가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현상들을 규명하기 위해 ‘포스트-코로나라는 수사를 도입하여 세계가 새롭게 맞이한  지점을 과거로부터 명료하게 분리해낸다. Pre- Post- 시간상에 어떠한 기점을 나누려는 이러한 시도는 동시대를 역사적인 시간으로 포섭하려 한다. 동시대가 과감하게 벗어던졌던 시간성이라는 가치는, 몇몇 비평가들의 강령술에 의해 유령으로 소환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파편들 사이에서, 선형적 타임라인에 거대한 분기를 표기하는 것은 세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진술하려는 것에 다름없다. (새롭지 않은 현재가 있는가? 우리는 어찌 되었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모든 사건의 파편들이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파편들은 뚜렷한 인과와 위계를 갖지 않는다. 어떠한 하나는 근원이   없다. 맞물리는 파편들은 차연(differance)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펜데믹이 우리 처한 상황을 야기한 원인인지 혹은 여러 행위들의 결과인지 알기 위해서는 치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원인인지 결과인지 단정 짓는 것은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팬데믹은 근원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춰져 있던 몇 가지 것들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국가주의의 정치와  정부의 대두, 새로운 뉴딜 정책은 비로소 그것의 정체를 가시화했다. 또한 화석연료 사용의 급감으로 인한 대기 오염 감소와 관광지의 지역화(localization) 무엇을 시사하는가?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리좀(Rhyzome) 다양체로 작용한다. 그러나 포스트-코로나를 외치는 비평가들에 의해  다양체들은 쉽사리 영토화(territorialization)된다. 앞서 언급했듯 역사화는 필연적으로 영토화를 동반한다. 경직된 역사화의 틀은 뚜렷한 인과의 관계로 간편한 설명을 제공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고고학은 일련의 작업으로 역사화된 것들을 탈영토화하는 데에 있어  기능을 가진다. 나는 작금의 정신분열적 세계를 어떤 자명한 환원주의 철학으로 해명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새로운 현상학으로 사태를 해부하는 것이 세계의 해명에   기여를 할 것이라 믿는다.
 
3.
팬데믹 이후, 디지털은 새로운 대체-공간으로 다시금 구성되기 시작했다. 디지털은 특수한 형식과 장치들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는 디지털의 고유한 스크린(ecran) 나타난다. 디지털이 나타내고자 하는 이미지들은 스크린 상에서 괄호 안에 놓이게(bracketing) 되는데, 이것은 이미지들이 납작해지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은 스스로에 대한 역사적 사유를 거부한다. 이미지의 의미가 납작해진다는 것이다. 디지털에서의 이미지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이페메라(Ephemera)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은 쉽사리 형성되고 순식간에 소거되지만, 이것은 지표로서 기억을 남기지 않는다. 의미 형성의 장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이미지들은 역사를 가지지 않으며 오직 차이만을 허용할 분이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용어를 빌리자면, 디지털에서 수용자들은 디지털 스크린에 비춘 상들을 문화적인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시뮬라크르(simulacre) 작용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미지들은 어떠한 것의 파편이기보다는 오히려 새롭게 구성된 객체에 가깝다. (그러나  이미지들이 어떤 아상블라주로 구성될  있다면 이미지들을 파편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지들은 인식의 단계에서 몽타주적으로 구성되며 재영토화를 거친다.  몽타주 효과가, 디지털에서 다시금 복귀한 새로운 전략이 된다. 디지털에서 이미지들의 강렬함과 이들의 몽타주가 형성하는, 이미지들의 응축된 집합인 스펙타클(spectacle) 한편으로 디지털에서 텍스트의 기능을 무력화한다. 이미지의 재빠른 생성과 순환은 텍스트의 독해에 적합하지 않다. 적어도 디지털에서만큼은,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부수적 요소에 불과하다. 이처럼 디지털에서는 이미지 언어가 주요한 언어로 부상한다. 디지털의 이미지의 생성과 독해는, 이미지 언어의 문법으로 이루어진다. 언어의 과제는 철저히 이미지의 논리로 성취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크라우스가 말했던, 미술 작품들이 조형성을 상실하고 텍스트에 천착하는 현상과 대비된다. 그러나 최근 미술계의 몇몇 경향들은, 개념미술 이래로 미술에 침투했던 텍스트주의를 벗어두고 다시 자신의 조형성을 복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 조형성이 아닌 이미지적 납작함을 수반한다. 어떤 작품들은 디지털에서 찾을  있는 (흔히 키치로 거론되는) 싸구려 광고 이미지들과 놀랍도록 닮아있으며, 어떤 작가들은 디지털로 작업된 그래픽 덩어리들을 떼어와 화이트큐브에 전시하기도 한다. 디지털적 형식과 그에 따른 인식적 변화가 세계에 침투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향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4.
디지털에서의 인식에서 스크린이 가지는 힘은 단순히 타자적 이미지와 주체의 응시를 매개하는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디지털 스크린은 갈갈히 찢겨 파열된 상태이다. 우리가 이미지를  때에 이미지도 우리를 똑바로 응시한다. 이미지의 응시는, 디지털의 주체를 정신분산과 정신분열의 상태로 이끈다. 주지하듯 디지털 이미지들은 한편으로 우리 욕망의 기표이기도 하다. 디지털 파사드의 광고들과 아포리즘들, 그리고 디지털 그래픽들이 제공하는 즉각적인 자극들은 우리를 나르시스의 상처럼 매혹한다. 파열된 디지털 스크린에서,  욕망의 이미지들은 스스로가 가지는 타자의 영역을 가감없이 드러내는데, 이것은 타자적 응시로서 디지털의 주체를 끊임없이 침범하게 된다.  강력하고 치명적인 응시는  우리의 주체적 응시를 대체한다. 결국 (이미 해체된) 주체의 일방적 응시는 차단되며 끊임없이 스펙타클의 응시와 교환되는 것이다. 주체는 이제 디지털 스펙타클의 일부로 편입된다.  포스터(Hal Foster) 라캉(J. Lacan) 인용한 것처럼 주체는 “세계의 스펙타클 속에 있는 하나의 얼룩 것이다.[1] 그러나, 타자적 이미지 자체는 견고한 스크린을 형성한다. 이미지들은 스스로가 가지는 욕망을 철저히 스크린에 숨기며 주체를 교란한다. 자신이 가지는 타자적 욕망을 주체가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도록 오인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단일한 디지털 이미지들, 예컨대 수많은 그래픽 디자인, 광고, 유튜브 영상들, 마치 실제같은 게임 그래픽들은  그렇게 매혹적인가? 우리는 이미지들을 쉽사리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미지들은, 파열된 디지털 스크린을 통과하여 우리를 공격한다. 디지털은 주이상스(jouissance)적이다. 견고한 스크린을 가지는 이미지들은 파열된 디지털의 스크린으로 빠져나와 주체의 응시,  욕망을 대체한다. 디지털은 단일한 이미지의 전사가 아니라 욕망의 저장장치이다. 디지털 디바이스의 디스플레이는, 인터넷 혹은 프로그램에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무빙 이미지를 제공하는데 이때의 디스플레이는 이미지  자체이기 보다 스펙타클 형성의 장이다. 디지털 스크린은 스펙타클을 매개하며, 스펙타클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의 스크린은 욕망을 매개한다. 예컨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인터넷 광고들의 순환하는 디지털 이미지들은 수많은 주체들과 타자들의 욕망이며 이것은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거쳐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것은 구조가 아니라 과정이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말처럼 실재는 객체들이 아닌 과정들로 구성되며  과정은  다른 과정에 의해 규정된다. 생성과정을 반복하는 프랙탈(fractal), 혹은 끝나지 않는 마트료시카처럼 디지털에서의 인식이 거치는 과정 또한 (주체-스펙타클-이미지의 관계들 상에서) 상호연계적이며 반복된다. 어떠한 디지털 이미지 또한 다른 이미지들의 응축으로 이루어진 스펙타클이다. 이것은 결코 환원되지 않는다.  이미지들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통해 순환을 반복하는데, 결국 우리의 저장된 욕망은 수명이 짧은 디지털 이미지에 천착하지 못하고 디지털 스크린 자체로 전이된다. 디지털 스크린 자체를 페티시화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디지털 스크린에서 다가오는 모든 납작한 이미지들은 그것이 본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던 성애화의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매일 디지털적 숭고의 세계를 마주한다.
 
5.
아무리 고고한 전통적 예술작품을 디지털 디스플레이에 재현한다 해도, 그것은 같은 무게의 스펙타클이 된다. 납작한 디지털 이미지들은 같은 디스플레이에서 성애적으로 균질화되기 때문이다.  말은 즉슨 어떤 디지털 이미지가 디스플레이에 전사될  스스로가 특수한 경험 가능성을 내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른 디지털 이미지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글에서 바넷 뉴먼(Barnett Newman) 작품을 검색했을 때에 나오는 그의 회화 사진과  옆에 생성되는 팝업의 광고 이미지는 모두 디지털 디스플레이 상에서 균일한 스펙타클로 자리매김한다. 이것은 인식을 수행하는 우리의 신체와 디지털을 포함한 물질들이 초관계적이기 때문이다. 사만다 프로스트(Samantha Frost) 신유물론적 접근에서도   있듯 우리는 세계에 침투해 있는 신체이지만 동시에 세게가 우리에게 침투할 여지를 주는, 연약한(vulnerable) 신체이기도 하다. 이것은 볼프강 에른스트(Wolfgang Ernst) 프리드리히 키틀러(Fredrich Kittler) 미디어 고고학과도 일부 상통하게 되는데,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미디어가 자신과 관계성을 가지는 것들에 역사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다시 신유물론의 용어로 말하자면 미디어는 ‘상처입힐  있는 능력 가진다. 모든 연약한 물질들에 영향(혹은 정동:affect)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신체는 전통적인, 완성된 인간으로 이해될  없다. 우리의 신체는 연약하며 끊임없이 영향받는 경험의 아카이브이다. 우리는 흔히 이해되는 것처럼 수행의 명령자가 아니라 수많은 물질들의 수행 과정에 속한 물질적 객체가 된다. 디지털의 인식 과정은 주체 환원적인 수행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디지털에 의해 훈련된 인식 능력이다. 디지털이 디스플레이의 이미지들을 균질화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 수행한 결과가 아니라 디지털 스스로가 수행한 결과인 것이다. 새롭게 훈련된 디지털적 인식은 우리를 포스트-휴먼으로 다시금 태어나게 한다. 그리고  디지털적 인식능력이 스크린의 성애화로 말미암은 이미지 가치의 균질화를 우리 신체에 체화시킨다. 이것은 억압이 아닌 재정립으로, 디스플레이가 비추는 이미지가 가지는 환원적 본질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이 된다. 디지털 이미지의 의미화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바깥에서, 이미지들의 몽타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미지는 납작하게 독해되는 것이다.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 2012 에세이에서 말했듯, “우리의 눈은 단지 표면을 스캔(scan)한다.” 우리가 뉴스와 리뷰들을 순식간에 훑어보는 것처럼 말이다.[2] 새롭게 체화된 인식은 디지털 바깥에서 작동하기도 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계 모두는 촉각적이기보다는 시각적으로 인식되고, 어떠한 이미지가 가지는 고유한 역사는 소멸되며 본질은 나설 자리가 없다. 디지털은 표상 방식이다.  디지털-현상계에서 이미지의 물자체는 인식의 바깥으로 철저히 절단되고 소거된다. 내가 디지털을 자폐적이라고 칭한 것은 바로  때문이다. 디지털적 경험에서 의미는 즉각적으로 생성되고 폐기된다. 수많은 이미지 파편들에서, 우리는 이것들을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조합하며 즉각적인 의미를 생성한다. 비숍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
 
오늘날 작가들보다는 큐레이터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많은 전시들은 관람 조건으로  새로운 판독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Documenta 11(2002)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전시였는데, 특히 관람객이   있는 것보다  많은 작품들을 포함하는 경향을 가졌다.  경우에는, 600시간 분량의 영화와 비디오였다. 우리는 이제 전시의 규모가 얼마나   묻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나 긴지 묻게 된다. 작은 갤러리에도   동안의 작품이 모두 담길  있는 것이다.  결과로서, 우리는 거르고, 스치고, 훑어보며 나아간다. “[3]
 
6.
인지주의 패러다임을 따르는 몇몇 과학자들에 의하면 ‘마음으로 일컬어지는 인간 신경의 인지회로는 컴퓨터의 계산 과정과 같은 원리로 작동되는 정보처리체계(Information Processing System)이다. 현상학적 신체는 물질들에 체화된 인지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들은 반심리학적 현상학의 기제에서 인지를 분석하며 기계적 인공물들은 인간 역사에 매우 밀접하게 관련해왔다고 말한다. 인간이 생산해낸 인공물들은 인간의 신체와 마음을 변형시켜왔다.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단지 인간이 행하는 인공물의 사용이 아니라, 오히려 인공물에 의한 인간 신체의 훈련이 진화의 방향을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들에 최적화된 신체는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 또한 인공물의 훈련을 거쳐 체득한다. 이처럼 물질과 인간이 개체들로서 관계맺는 것은 권력에 의한 주종관계이기 보다는 객체들이 수행을 통해 서로에게 침투하기 떄문이다. (물론   인간이 필수적으로 관계의 집합체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자연적 디지털과 문화에 대해 고찰하고 있으므로  집합체에 인간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서 물질들이 평평한 존재론(flat ontology) 놓이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객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아니라 객체가 무엇인지 대한 인식론적 과제에 대한 답변이다.[4]
디지털은 세계의 표상 방식이자, 세계의 부호화이다. 아날로그적 세계를 구성하는 현상들은 수많은 비트(bit)들로 치환되며 약호화되는데, 이것이 디지털의 근본적인 생성 조건이었다. 디지털의 태생은 낮은 정세도를 가진 파생적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비약적 개발로 말미암아, 디지털은 아날로그적 정보들을  촘촘한 비트로 엮으며, 이제는 막대한 비트 심도(bit depth) 새로운 위치를 점했다. 단순히 아날로그 세계의 지각적 표상을 이진법으로 약호화하며 낮은 해상도로 전사하던 미메시스적 디지털 미디어는, 이제 새롭게 표상을 생성할  있는 하이퍼리얼(hyperreal) 되었다. 뛰어난 그래픽 엔진들은 광활한 초현실의 세계를 실제적 표상으로 우리  앞에 대령하고 있으며 물리 엔진들은 과학적 규칙들을 새롭게 재편한다. 우리는 마블(Marvel)사가 제공하는 거대한 스펙타클의 영화에서, 무엇이 아날로그를 촬영한 것이고 무엇이 디지털로 렌더링  것인  구분할  있는가?  우리는 유비소프트(Ubisoft)사의 게임에 적용되는 물리 법칙들에 이질감을 느끼는가? 뿐만 아니라 위의 이미지들은 디스플레이의 파사주에 덕지덕지 붙어 우리에게 강렬한 빛을 쏘아댄다. 이것은 파생 실제가 아니다. 디지털이 생성하는 세계는 명징한 실제이다. 디지털은 단순히 아날로그 세계를 모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들을 창조할  있게 되었다. 그리고 디지털이 창조해내는 이미지들은 스펙타클의 세계로 구축된다. 정동의 세계로서, 디지털은 스펙타클의 창조를 거듭하는 것이다.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파생적 현실이 아니라, 병치된 현실이 되었다.
병치된 세계로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서로에게 깊숙히 침투한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페스티쉬(pastiche),   세계의 혼합을 주도하는 ,  혼합이 이루어지는 곳은 신체의 지각이다. 디지털이 제공하는 치밀한 미디어 체계는 우리의 생리적 신체에 차곡차곡 축적된다. 신체는 일종의 아카이브로서 체계의 일부로 작동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디지털적 인지를 가능케 한다. 우리가 아날로그의 것들을 인식하는 것과 더불어 아날로그의 것들을 생산하는 것은 우리의 신체 조건에 기인하게 되는데, 다름아닌 디지털화된 우리의 경험 방식이 아날로그의 것들을 디지털적인 것들로 대체해 나간다. 이것은 , 경험이 납작해지고 매끈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초월적인 것들은 절단되어 소멸되고 바로 앞에 현존하는  만이 우리의 경험과 기억에 안착하게 된다. 형이상학과 환원주의는  이상 고려되는 조건이 아니며 감성의 형태학만이 경험의 주요한 조건이 되었다.
물질의 허브(hub)로서 신체는 특정한 행위들로 세계와 그에 따른 경험을 끊임없이 재편한다. 예컨대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플라뇌르(Flanuer),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1982) 나타나는 산보자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Situationist International) 표류(dérive) (여러 의미의) 모더니티에서의 경험을 새롭게 재편할  있는 신체의 행위 전략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물질적 조건은 건축과 도시공간이다. 위의 행위자들은 모던한 도시라는 물질적 구조에서의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전유하고자 하였는데, 이들이 선택한 행위가 바로 ‘걷기였다.  걷기는 고정된 좌표의 시공간 위를 이동한다고  수도 있지만, 다시 행위자를 주축으로 전회하였을 때에 행위자가 시공간을 스스로의 앞으로 당겨 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걷기는 모더니티의 도시공간을 스스로의 주변에 재배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디지털화된 세계를 어떻게 우리 앞으로 ‘당겨오는가?   걷기를 행위하던 다리(혹은 바퀴) 마우스와 키보드로 대체된다. 숭고한 이미지의 파사주를, 우리는 하이퍼링크(hyperlink) 클릭(click)하여 우리의  앞으로 당겨오며 스크롤(scroll) 드래그(drag) 통해 디지털 아케이드를 탐색한다. 혼합된 아날로그와 디지털에서,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은 다리(혹은 바퀴) 이용한 ‘걷기보다 마우스와 키보드, 터치스크린을 이용한 클릭, 스크롤, 드래그에  친숙하다. 우리는 새로운 장치를 신체 기관으로 편입하기를 권장받으며 새로운 신체의 사용방법을 훈련받는다. 예컨대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사가 운영체계 Windows 3.0 함께 탑재한 게임 ‘솔리테어 Windows 3.1 ‘지뢰찾기 개발의도는 사용자의 마우스 클릭 연습을 의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디지털 프로그램의 인터페이스와 그에 적용되는 규칙은 우리가 여러 디지털 장치들을 능숙하게, ‘마치   처럼사용할  있도록 두었다. 사실 이러한 규율적 재편은 우리가 디지털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으로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디지털의 초창기부터 세계와 맞닿기 위해 새로운 걷기 방법을 연습해온 것이다. 결국 마우스와 키보드, 터치스크린은 새롭게 수태되는 신체 기관이며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일종의 디지털적 건축공간으로서, 새로운 신체가 유영하는 공간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경험 방식을 제공하는 물질적 조건들은, 기존의 신체가 행하던 인식능력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회하게끔 부추긴다.
 
7.
새로운 신체는 세계에 나타나는 납작하고 이질적인 파편들을 아상블라주의 형식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투명한 레이어들이 겹겹이 쌓여 생성하는 아상블라주적 이미지 언어는 디지털적 인간의 모국어로 채택되는데, 이것을 읽는 행위는 자폐적이고 정신분산적으로 이루어진다. 갈갈이 찢긴 담론들과 텍스트들은 이미지로 나타나고 이것을 목도하는 것은 혼돈에 홀로 내던져졌을 때만큼 고통스럽다. 명징한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 불가능하다.  찢어발겨진 담론들의 잔해에서 생존을 위해 해야  가장  번째 일은 우리 주체의 실존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잔해들 속으로 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어쨌든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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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서동진, 『동시대 이후』, 현실문화A, 2018
- 이정모 (2010).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접근과 학문간 융합. 철학사상, 38, 27-66
-  들뢰즈 ,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2014
- 크리스토퍼 갬블 , 신유물론이란 무엇인가?, 박준영 (), 호랑이의 도약, 2020
 http://tigersprung.org/?p=2494
- 프레드릭 제임슨, 『정크스페이스』, 임경규 (), 문학과지성사, 2020
- 프레드릭 제임슨, 『프레드릭 제임슨: 맑스주의 해석학 포스트모더니즘』, 이택광 (), 문학과학사, 2002
- 최종철 (2014). 후기 매체 시대의 비평적 담론들.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41, 181-209
- 전영백 (2003). 확장된 영역의 미술사. 현대미술사연구, 15, 111-144
- Levi Bryant, The Democracy of Objects, Open Humanities press, 2011
- Claire Bishop, Digital Divide: Contemporary Art and New Media, ARTFORUM, 2012, https://www.artforum.com/print/201207/digital-divide-contemporary-art-and-new-media-31944
 
 
[1]  포스터, 『실재의 귀환』, 이영욱  (), 경성대학교출판부, 2003, p. 221
[2] Claire Bishop, Digital Divide: Contemporary Art and New Media, ARTFORUM, 2012, https://www.artforum.com/print/201207/digital-divide-contemporary-art-and-new-media-31944
[3] 앞의 에세이
[4] Levi Bryant, The Democracy of Objects, Open Humanities pres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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