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와 소재, 심지어 잘못된 정보까지 차용한 정황이 결정적 증거
서른, 도쿄의 겨울
1993년, 도쿄 아사쿠사의 한 골목길에서 내 인생의 두 번째 시간이 시작되었다. 새까만 오피스텔 창가에 기대어 보이는 스카이트리 전망대는 마치 세상의 정점을 향해 치솟는 나의 야망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방송국 최초의 여성 특파원이라는 타이틀이 가슴을 치밀게 했지만, 현지 통역관의 "일본 기자클럽은 여성 출입을 금지합니다"라는 말에 주먹을 꽉 쥐었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가 심장 박동과 맞먹을 듯 급했다.
"우리나라 특파원 여자 기자가 이 정도밖에 못한다면, 내가 왜 여기 있죠?"
카메라맨을 뒤로 한 채 홀로 미나토구 청사로 뛰어들던 날, 교통신호를 기다리며 주머니 속에서 주섬주섬 꺼낸 수첩에는 'B'라고 적힌 연락처가 있었다. 재일교포 3세인 그녀는 도쿄의 이면을 파고드는 르포작가였다. 우리의 첫 만남은 신주쿠 골목의 작은 이자카야에서 이뤄졌다. 그녀의 손등에는 ㅈㅇ 한글 자음이 검정색 타투로 새겨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 펼쳐진 노트들과 신문기사 뭉치 더미에는 돼지고기김치찌개 양념이 스민 듯 종이 색이 오염되어 있었다.
"언니, 이거 읽어볼래요? 8년 동안 취재한 자료인데..."
그녀의 초고를 받아든 순간 손가락이 저려왔다. 일본 사회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날카로운 문체가 내 눈앞에서 불꽃처럼 튀었다. 그녀의 취재 노트 20장을 몰래 복사해 갈 때, 나는 내가 지른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1996년 가을, 서울 강남구 개포동
"이게 언니 책이에요? 제 글들이... 이건 제 취재잖아요! 제꺼가 어떻게 언니 책 내용에 들어가 있어요?"
B의 목소리가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내 책상 위『도쿄의 불씨』표지의 금박 글자가 창가에서 들어온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내가 2년간 모은 자료라 주장한 147페이지의 책 출간본에 대해 B는 1994년 5월에 쓴 '일본 사회의 음습한 권력구조' 초고와 70% 이상 일치한다고 B는 말한다.
그날 밤 나는 내 방 거울을 바라보며,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내가 정리하고 체계화시켰어. 나만의 철학으로 재탄생시킨 거야."
내 책상 위 노트북 화면에 뜬 인터넷 서점 실시간 베스트셀러 1위 랭킹이 내 망막을 찌른듯 자려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도 노트북 화면 책 소개 문구 잔상이 머릿 속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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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 최초로 일본 사회 구조를 파헤친 명석한 특파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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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봄, 서울 광화문 ㄱㅂ문고
『도쿄의 불씨』작가 친필 사인회 행렬이 서점 정문 입구 자동차 도로까지 이어졌다.
한 중년 남성이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말했다. "제 딸이 일본 유학 중에 우울증으로 자살했는데, 이 책이 그 한을 풀어준다고 느꼈어요."
그 순간 뒤편에서 들려온 어떤 기자의 질문이 공기를 가르더니, 싸인회를 찾은 모든 독자들의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표절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일 때마다 B의 노트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1992년 9월 8일 새벽, 그녀의 서재에서 복사한 문서들. 잘못된 통계 수치까지 그대로 옮겨 적었던 그 20장의 노트. 내가 입술을 깨물자 뜨거운 피맛이 났다.
"창작이란 본질적으로 선인들의 유산 위에 서는 것입니다.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논란입니다."
대답을 마치자 박수 소리가 불길에 산소 바람을 주입한듯 천정으로 치받쳤다.
2025년 4월, 서울 집 거실
내 휴대폰 유튜브앱 추천 콘텐츠에『도쿄의 불씨』책 리뷰 최신 동영상이 보인다. 30대 일본에 있던 시절 내가 B의 서재에서 훔쳐낸 취재노트가, 이제 수백만 유튜브 유저들에게 전해지는 새로운 진실이 되려 한다. 그 영상 댓글란에는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추천 댓글이 고정되어있다.
"당신의 책이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대댓글이 수십개 달려있는 것이 보인다. 어떤 코멘트가 남겨있을지 이미 알고있지만 차마 직접 읽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2012년 봄, 서초동 대법원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B의 분노섞인 목소리가 다시 내 귀에 들려온다.
"언니, 그게 어떻게 창작이예요? 도둑질이잖아! 심지어 내가 틀리게 취재한 내용까지도 똑같이 책에 실어놓구선 왜 끝까지 사람들을 속이려고 해?!"
그렇게 대법원에서 내 책은 표절이 최종 확정되었다.
내가 서른살에 피워낸 불길은 분신자살로 종지부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