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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May 22. 2021

세 번의 결혼식에서 느낀 것

순백의 균형과 어른

요 몇 달 사이 꽤 가까운 지인들이 코로나 시국을 뚫고 무사히 결혼식을 올렸다.

그 중 두 차례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탁받았다. 물론 가장 어려운 부분인 노래 부르기는 친구 Y에게 맡기고 나는 피아노 반주라는 간단한 작업만 담당했다. 그래도 오랜 시간이 묻은 내 사람들이 하얀 드레스 안에서 나를 내다보고 있는 와중에 피아노를 치자면 손이 덜덜 떨린다.


가장 최근에는 H가 스승의 날에 식을 올렸다. 그녀는 나의 대학 동기로, '새내기 배움터'라고 아주 잘못 명명된 2박 3일짜리 술판에서 처음 만났다. 그 당시 나는 아직 나댈지, 수줍을지 결정하질 못해 가끔 발작하듯이 사회성을 발휘하여 술자리에 붙어있곤 했는데, 내 안의 내향성이 치고 올라와 여자동기들 방으로 도망치면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주던 애였다. 대체로 친구들과도 복잡한 감정선을 구축하는 나와는 달리 H는 모두와 원만하게 지냈고, 그런 그녀의 주변으로는 소수정예의 선하고 충직한 사람들이 모였다. 그녀를 알고 지낸 십 년 동안 H는 성격이나 성정의 변화 없이 한결같았다. 호불호는 크게 없지만 강단 있고 예의 바른 H와 나는 사뭇 결이 달라서, 언제나 동기 무리 내에서 친하게는 지냈어도 단둘이 술을 먹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축가를 부탁받았을 때, 이런 상쾌하고 성숙한 관계성이라면 눈물로 축가를 망칠 일은 없겠다고 생각하며 흔쾌히 승낙했다. 축가를 하기 앞서 남길 짧은 멘트도 가벼운 마음으로 뚝딱 써냈다. 물론 '어느새'나 '새내기' 같은 단어를 적으며 잠시 서글퍼지기는 했으나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을 만날 생각을 하자 그런 뭉클한 마음도 금방 사라졌다.


결혼식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스태프들의 안내 하에 축가 리허설을 마치고 신부대기실로 향했다. 아직까지 세팅 중이었기 때문에 조용한 대기실에는 웨딩업체 사람들과 사진사, 그리고 5월의 신랑 신부뿐이었다. 다소 경직된 모습으로 포즈를 잡고 있던 H가 나를 발견하고서 환히 웃었다. '친구분이 오니 신부님 표정이 환해지네요'라는 사진사의 말에 H가 꽤나 지쳐있었음을 알았다. 아름답다 못해 가련해 보이는 그녀를 바삐 칭찬하고 긴장을 풀어줄 겸 이런저런 농을 던졌다.



가까이 다가가자 피로에 빨개진 눈, 마른 어깨, 반짝이는 가루가 묻은 피부, 돈들인 속눈썹이 보였다.

그때 쿵 - 하고 와닿았다.


H가 결혼을 한다.


나는 기다란 목과 작은 몸집의 아이를 잠시 만져보았고, 곧 울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무엇이 나를 그리 울컥하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다 하는 결혼 H도 하네'라고 하기에는, 발 사이즈는 작은 주제에 제 길을 단단히도 밟아온 그녀의 자긍심 가득한 삶을 너무 잘 알아서였을까. 드문드문 만나는 사이였음에도, 이제는 더욱 보기 힘들어졌다는 사실에 촘촘한 상실감을 느낀걸까. 대학교 캠퍼스에서 숨 넘어가게 웃던 H와, 엄숙하고 화려한 신부대기실에서 글리터를 묻힌 채 선 H가 너무 다른데 - 또 너무 같은 아이여서 무언가 묘하기도 했다. 친한 동기들과 함께 감정 기복이 없는 H를 A.I다, 기계다 라며 놀리곤 했지만 사실은 내가 울면 따라서 울음을 터트릴 그녀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어울리지도 않는 감상에서 빠져나오려 부단히 노력했다. 다행히 사진을 찍는 동안 사진사가 호쾌한 문구들을 던져대어 웃으며 대기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H는 훌륭한 신부였다. 결혼이 진행되는 내내 환한 웃음을 잃지 않았고, 사시나무처럼 떨며 연주하고 노래하는 나와 Y를 위해 단상 위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격려해주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축가를 맡아줘서 고맙다며 따뜻한 단어들로 장문의 카톡까지 보내온 그녀의 끝없는 다정함에 다시 한번 감동하다가, 지난 몇 개월 간 잔잔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던 어떤 생각과 마주하였다.


단정한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럼 넌 서른 먹고도 어른이 아니냐고 하면 좀 민망해지지만, 그리고 대체 언제 H를 어른 취급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지지만 - 내게 있어 어른이란 삶의 어느 기로에서 중요한 선택을 내리고 그것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난 세 번의 결혼식에서 마주한 신부들은 그 선택의 과정을 소란스럽지 않게, 마치 절간의 목탁소리처럼 정갈하게, 치러내는 사람들이었다. 단정한 그들의 공통점을 뽑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본인의 선택에 만족한다.
선을 넘지 않는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지금 고른 이 길이 맞기는 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매일을 괴로워하고, 가까운 사람들과 경계선을 긋다가 넘다가 뒤엎다 새로 쓰다 아주 난리 부르스를 추는 내게는 참으로 신비로운 자질들이다. 그렇다고 당장 내일 어른이 되어버리고 싶냐고 하면 아니, 난 아직 좀 더 헤맬래, 라는 말이 철없게 튀어나가지만 - 그래도 만약 내가 한 사람과 평생을 단단한 결속 하에 살고 싶다는 목표가 생긴다면 이 아름다운 신부들의 모습을 나도 배워야겠다 싶다.


혼란과 의심은 이제 내 본질로 받아들였으니 결단력과 겸허함은 먼 미래의 얘기로 미루더라도 - 선을 넘지 않는 자세만큼은 당장 오늘부터라도 내재화하고 싶다. 그동안 차갑다, 정 없다며 무언가 좋지 않게 보았던 관조의 성질이 점차 필요한 것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평양냉면의 슴슴함이 스며들듯이. 제 인생을 존중하는 만큼 타인의 그것도 존중하기 때문에 감정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무리하여 개입하지 않는 중용. 적당한 거리에서 주변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다가 필요로 하는 것 같으면 손 내밀어 보듬어주는 여유. 그런 것들을 꿀단지에서 꺼내어 꿀꺽 삼켜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 전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을 읽고 힘주어 필사해둔 구절이 있다.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사람에 대한 기준을 각자 세우게 되잖아요?... 상대방을 고려않고 감정을 폭주시키는 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 드물고 귀해요."



과연 드물고 귀하다. 나부터도 스스로를 다잡는 것에 서툴러서 많은 실수를 하며 살아왔다.

어둡고 화려하고 감정적인 것들에 금세 사로잡혀버리는 불나방에게는 자칫 비난이 관심이고 집착이 사랑이며 공격이 방어일 수가 있다. 자신에 대한 분명한 정의 없이 그저 자극을 좇다보면 본인을 둘러싼 경계선이 흐려지고, 자신의 선을 알지 못하면 타인이 그어둔 선을 인지하는 일도 당연히 어려워진다. 친구의 삶에 지나치게 몰입하거나 애인에게 너무 많은 치부를 드러낸다. 창작물에 나를 잔뜩 녹여낸 끝에 다시 들여다보기도 불편해지거나 여전한 부모의 간섭에 힘들어하기도 한다.  


선을 넘나드는 것은 종종 나를 "정이 많고 여린 사람"으로 일컬어지게끔 하고 그것이 아주 싫지는 않지만, 나이가 들 수록 이 질척한 면모를 조금 줄여보고 싶어진다. 그런 내게 새신부들의 희고 정갈한 모습은 균형이라는 클래식한 미덕을 상기시켜주었다. 오열하던 신랑을 담담히 달래주던 B, 싱글벙글 웃으며 옆의 아버지보다도 씩씩하게 행진하던 W, 그리고 깊은 옹달샘처럼 고요히 아름다웠던 H. 가끔은 묵묵히 흘러가는 일상에 지루함을 표하고, 내 작업실에 놀러 와서는 '너는 너무 재밌게 사는 것 같아'라고 꿍얼거리는 그녀들이지만, 나는 반대로 그들을 무한히 존경한다. 정갈한 스케일의 진행만으로도 어느 최고점을 도달해버린 바흐의 음악처럼 그들은 흥청망청하지 않은 방식으로 깊은 뿌리를 내린다.


누군가를 '아 좋은 사람 -'이라고 여길 때 내 안에서 잔잔히 퍼지는 따뜻함이 좋다. 들쑥날쑥한 내 모난 구석마저도 침착하게 지켜보고서 제 특유의 매력이라 받아주는 그들의 안락한 품이 뭉클하다. 나와는 너무 다른 감정선의 사람들이라 평소에 내 생각의 중심부에 있지는 않지만, 가끔 이렇게 지긋이 들여다보면 내가 찾고 싶어 하는 어떤 소담한 평화를 손에 곱게 그러쥔 이들에게서 많은 위로를 받는다.


H에게 카톡을 보냈다.

훌쩍 어른이 됐네
행복해라 짜식


5월의 신부에게서 '신혼여행 다녀와서 집들이할게!'라는 답장이 왔다.

곧 어여쁜 어른의 집을 구경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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