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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Oct 03. 2021

왜 남자들은 헤어질 때 영양제를 줄까


금요일 아침, 일과를 시작하려 책상 앞에 앉은 내 눈에 주르륵 늘어선 영양제 통들이 들어왔다. 건강에 아주 신경을 쓰는 타입은 아니라 오래도록 방치된 원통들을 무심히 보다가, 문득 어머니가 사주신 비타민D를 빼고는 모든 영양제를 전에 만났던 남자들이 줬다는 걸 깨달았다. 허허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각 통을 받았던 때를 돌이켜보니, 다 이별의 목전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또 이마를 탁 치고 말았다.


왜 남자들은 헤어질 때 영양제를 줄까

나는 연애할 때 웬만하면 무언가를 "해주는" 쪽이다. 직접적인 표현에는 서툴지만 내사람에게 시간과 돈, 정성은 가득 쏟고 그래야 맘이 편하다. 대체로 애인들의 취업 혹은 이직은 돕거나 음악, 영어 등 내가 잘 아는 영역에 관련된 새로운 것들을 가르쳐주고 옷과 생활가지를 골라주며 살아왔다. 물론 그들도 내게 많은 도움을 줬다. 타지에 정착하는 것을 도와준 사람도 있었고, 감정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옆에서 단단히 붙잡아 수면 위로 끌어올려준 사람도 있었다. 만날 때마다 미슐랭 레스토랑을 예약해둔 남자, 일단 비싼 걸 사주고 보는 남자, 매일 한 시간씩 통화하며 나의 하루에 소상히 반응해주고파 하던 남자도 있었다.

그러니 내가 베풀기만 하고 산 건 분명히 아니다. 정말 많이 받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 나는 타인에게, 특히 애인에게, 애정과 공감 이외의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게 생활 면에서 필요한 것은 알아서 구할 수 있고, 취업/이직/사업 등의 굵직한 일들에 도움을 줄 친구들은 곁에 충분히 많다. 인생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도움을 받으면 그때부터 오히려 맘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웬만한 건 혼자 해내려고 하는 편이다. 그러니 애인이라는 사람이 내게 예쁜 말 외에 해주는 것들은 다 빚이 된다. 그리고 빚쟁이로 살 수 없는 나는 어떻게든 그 이상으로 갚으려고 애를 쓴다.


교토 여행을 계획해줬다? 고야드 여권지갑을 사준다.
 외국에서 내 생일에 맞춰 액세서리를 보냈다? 오케이 그럼 선물 배송 받고, 커플 브이로그 추가요.
나의 결벽증을 이해해줘서 고마우니 온 집안을 청소하고 내친김에 인테리어 소품도 사준다.
술자리에서 몰래몰래 계산을 하고, 편지 2장에는 편지 3장과 그림엽서로 대응한다.


이렇게 맘 편히 받지를 못하다 보니 어느 시점이 지나면 상대방이 미묘하게 불편해했다. 일반화일 수도 있지만, 남자들은 그래도 자신이 둘 중에 조금 더 크고 든든한 사람이기를 바란다. 혹은 - 예민하고 불안한 나에 비해 묵직한 당신이기를 내가 바랐고 그들은 그에 응했다. 그런데 자꾸만 되갚으려는  때문에 그들은 베푸는 사람일  있는 기회를 자주 박탈당했다


비싼 밥을 연거푸 사준 남자에게 좋은 위스키 한 병을 선물했을 때 그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고마워. 근데 우리 지금 누가 얼마 더 쓰는 는 게임하는 거 아니잖아.
이런 것보단 표현을 잘해주는 게 난 더 기쁠 것 같아.


나지막이 웃으면서 한 말이었지만 새삼 내가 그가 베푸는 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었는 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일단은 미안한 감정이 앞섰고, 어떻게 갚지 하는 계산에 마냥 호의를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레스토랑을 나오면서 "너무 잘 먹었어, 담엔 내가 꼭 살게"라고 말하던 나의 표정에는 웃음이 있었을까. 그러고 보면 나로부터 명품 지갑을 선물 받았던 예전 그 사람의 표정은 어땠더라. 무거운 부담에 꼭 깨문 입술을 못 본 척 했었지.


그러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대차대조표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재정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셈도 쳤다. 누구에게도 빚지고 살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이상한 곳에서 충실히 지키며 커온 K-장녀랄까. 그러면서 내게 선물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의 진심을 깎아먹었다. 그들의 마음을 되갚아야 할 무언가로 치환해버린 것이다. 고맙다고, 기댈 수 있어 좋다고 말하는 대신 나도 선물을 하고 그들의 소란한 마음에 귀 기울였다. 그런 행동들이 공평한 관계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 사실은 어떤 관계도 완벽한 균형을 이룰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뿐이었다.


많은 사람들과 이별을 했고 그 헤어짐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이별을 눈앞에 두고 항상 난 미안해했다.

당신 참 든든하고 의지가 됐는데 그걸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던 것 같아. 

그럼 남자들은 놀랬다. 내가 너에게 의지가 됐어? 라며.

그 얼떨떨한 얼굴을 보는 것은 무척이나 슬픈 일이었다.



결국 관계의 종착점에서 남자들은 영양제를 선물해줬다.


몸에 이래저래 잔고장이 많지만 건강에 꽤나 무심하다는 내 공공연한 단점에 기대어, 어떤 응어리지는 종류의 마음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래도 이건 받을 수 있지 않냐는 듯, 더 챙겨주고 싶었었다는 듯. 이제는 그들도 나를 잊었을 테고 나도 깊은 슬픔 없이 영양제를 꺼내 먹지만, 관계 속에서 작아져버린 누군가의 체념을 떠올리니 알알히 속이 다 쓰리다.


잘 받아야 한다.

날 생각했을 마음, 고마워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을 마음, 칭찬받고 싶을 마음을 존중해야 한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참 서툴렀다.


이 다음에 내게 와 추운 겨울 내 얇은 옷차림을 걱정해줄 남자에게는 잘 받아보고 싶다.

고마워. 든든해. 의지가 돼.

라고 잔뜩 표현하면서.

매일 꺼내먹는 영양제처럼 당신이 나를 따뜻이 채워준다고, 많은 것을 해주어서 고맙다고.

그리고 설사 그 사람과 이별을 하더라도, 고마웠다는 나의 말에 그가 얼떨떨해하지는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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