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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아빠 Feb 10. 2016

[여행][국외]#2-3. 크림반도 세바스토폴 방문기

- To Balaklava &  Yalta


 2016년 2월 7일, 출장 온 후 하루 빼고는 내내 날씨가 좋지가 않았으나 일요일인 오늘은 날씨가 다시 화창해졌다. 따라서 계획해 놓은  Balaklava와 Yalta 방문을 위하여 호텔 프런트에 가이드 신청을 하였다.  Sevastopol에서 벗어나 멀리 외곽으로 나가야 하기에 비용은 이전  2200p에서 300 추가된 시간당 2500 p(100 W = 약 15  p)를 받는다. 물론 영어 가능한 가이드와 운전사 포함이다. 12시경 도착한 가이드와 간단히 금일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과 루트에 대해서 미팅을 한 뒤에 출발하였다. 출장 차 가는 곳들에서는 업무 후 피로도가 크기 때문에 항상 출발 전에는 이번은 그냥 호텔에서 책이나 보며 쉬자라고  마음먹고 가지만, 번번이 그 다짐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왕 온 김에 하나라도 더 보고 배우고 경험하고 가자는 근본적인 여행자 마인드가 스멀스멀 나와버리는  듯하다.  일전에 체코 프라하 출장을 간 적이 있었는데 연속되는 회의 속에서 관광을 해보겠노라고 마지막 보고서 작성한 뒤 저녁 8시경에 바로 호텔을 나섰고 그마저도 부족하기에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조깅을 하며 돌아본 기억이 있다.  프라하가 원체 규모가 작은 도시이니 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크림반도의 거의 대부분 관광지 혹은 유적지들은 크림전쟁과 세계 2차 대전 때와  연관된 것들이 많다. 세계 2차 대전 이후에는 모든 건물들이 파괴되어 성한 집이라곤 6  채뿐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연이은 침략들과 두 번의 큰 전투로 인하여 너무나도 잃은 것이 많은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Yalta 까지는 Sevastopol에서 이어지는 H19 도로를 타고 가게 되며, 가는 길에 Balaklava를 거쳐 갈 수가 있다. Balaklava 지역은 Balaklava War(1984년 10월 25일)라는 큰 전투가 있었던 곳이며,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한 곳이라고 하여 Death  Valley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크림 전쟁 역사상 두 번째로 가장 큰 전쟁이 벌어졌던 곳이며, 그때 당시의 군수품 및 진지들이 일부 복원되어서  그때의 일들을 상상해보게끔 한다. Sapun  Ridge라고 불리는 이곳은 전쟁 당시 선점하고 있던 크림 사람들의 주요 공격 거점이었으며 그때 당시의 모습들을 위 흰 건물에 전시해 놓기도 하였다고 하나 우리는 그냥 PASS 하기로 한다. 사실 상 큰 감흥은 없어서 지나가는 길에 들린 그냥 경치 좋은 전망대 정도로 기억될 것 같다. 이곳을 거쳐 조금 더 들어가니 금일 첫 번째 목적지인 Balaklava 항구에 도달하였다. 훌륭한 날씨 탓인지 이곳의 관경은 경이롭기만 하다.


 평화롭기만 해 보이는 이 곳은 한 때는 핵잠수함이 정박하며 출정 준비 및 수리를 하던 곳이었으며 철저하게 군사 기밀 지역이었다. 적의 위성망을 피하기 위하여 산속에 터널을 뚫어서 그곳에 위치하였으며 핵폭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있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 끝날 무렵 마지막 잠수함이 출정한 뒤에 근래에 와서야 이 지역을 개방하고 관광객들을 받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크림반도의 주요 관광지 중에 하나로 주목받고 있는 지역이겠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하루쯤 이곳에만 머물면서 커피와 맥주를 벗 삼아 하루를 보내보고 싶을 정도로 신선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귀국 전에 일요일이 한번 더 남아있으니 한 번 고려해볼 만하겠다. 여유롭게 항구를 따라서 산책을 하고 망루가 자리 잡고 있던 산에 올라가 전체적인 경치를 감상해본다.


산에서 내려다본 Balaklava 항구의 모습
예전에는 군사시설들이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 요트들이 대부분이다.
현지인들의 여유로운 산책
산에서 바라다본 항구의 좌측 모습

 다음으로는 최종 목적지인 Yalta(얄타)로 향한다. 시간에 쫓기는 느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나 어쩔 수가 없다. 매우 제한적인 시간과 체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는  수밖에 없다..


  Yalta를 방문하기 전까지만 하여도 그냥 크림반도에 있는 유명 관광지 중 하나라고만 알고 있었다. 막상 가보고 나서야 알았다. 학창 시절 배웠던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후속 처리를 위한 모임이였던 얄타 회담의 그 얄타가 바로 이곳이었다는 것을...  그  말인즉슨 한반도가 분단국가로 현재까지 남아있게 된 결정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장소라는 것이다. 1939년 폴란드의 동방/서방 지역에서 세를 떨치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 사이의 전쟁이 번져 주요 세계 2차 대전의 시작을 알렸지만 그 시발점은 1929년 세계 대공황이었다.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자 독일/일본 등 후발 자본주의 나라들은 식민지 확대를 통해 위기를  타개해나가고자 하고 있었다. 독일 / 일본 / 이탈리아 등 VS 프랑스/영국/소련/미국(진주만 사건 이후 : 1941년 12월)등 의 양강 구도로 전 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참담하고 사상자들이 많이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으로 참가국은 연합군 측 49개국, 동맹국 측 8개국 세계 인구의 20퍼센트 정도가 전쟁에 동원되었으며, 동원 병력 1억 1천만, 전사자  2천7백만, 민간인 희생자  2천5백만이라는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가져온 전쟁이었다.

 1943년 9월에 이탈리아의 항복, 이후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몰아붙여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을 받아내면서 전쟁이  종식되었다. 물론 이리하여 우리나라도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Lavidia Palace 의 자태
영국/미국/소련의 수뇌부 왼쪽부터 처칠,루즈벨트,스탈린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미국, 영국의 세 수뇌(이오시프 스탈린,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들이 크림반도 남쪽 끝의 휴양도시였던 얄타에 모여 패전국이나 해방국의 처리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회담이 바로 얄타 회담이다. 이 회담이  진행되었던 Livadia Palace는 마지막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스 2세와 그의 가족이 머룰렀던 여름 피접 장소였으며 오늘날 이 궁전은 박물관의 역할도 하고 있지만 국제적인 친선 무대나 정상회담이 열릴 때 사용되고 있다. 이 지역 사람들과 얘기할 때 느낀 점이 러시아인들 개개인들은 이 장소를 매우 의미 있는 장소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해당 역사 관련하여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2차 대전을 종식시키며 사후 뒤처리라는 관점을 넘어서서 살펴보아야 한다.


 본 회담에서는 당시 일본 식민지였던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거론이 되었다. 루스벨트는 피식민지 국가의 자체 회복 및 발전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였고 5년 이상의 신탁기간을 거론하였었다. 일본을 공격하기에 앞서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미국은 러시아와 힘을 합치기로 한다. 허나 미국이 자의적으로 일본을  굴복시킬 수도 있는 상황에서 루스벨트가 오판하여 불필요하게 소련이 개입할 계기를 만들어줬다는 이유로 현재까지 비판을 받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일전 참전의 뜻을 밝힌 소련은 러일전쟁 이전에 가지고 있던 본인들의 경계적/군사적 이권을 약속받으면서 미국의 한국에 대해 신탁통치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한다.  이후 원자폭탄 투하 이후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해온 이후 한반도에는 38선이 그어지면서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국이 머물면서 관여하게 된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남북을 하나의 나라로 세우려던 우리나라 선조들의 노력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1948년 8월과 9월에 남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는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이 이후로는 잘 알다시피 6.25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이 날까지 분단된 채로 남아있게 되었다.


 이 곳을 둘러볼 때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남북 분열, 친일파 잔재(각각의 정당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제 식민지하에 있던 기득권층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강대국들에겐 유리하였을 것이다), 지역 갈등  ,... , 그리고 오늘날 이 모든 내 외부의 한반도 갈등 상황들이 어떻게 보면 이날   제삼자들의 이해타산이 오고 갔던 이 얄타회담이 시발점이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 지네들이 뭔데 남의 나라 갖고 이렇게 장난질을 하였으며 현재까지 감 놔라 배 놔라 한 것인가?? "    




거리의 시인격이였던 기타 연주하는 할아버지
수많은 갈매기 떼들
해변가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
Yalta 해변가


 생각지도 못하게 Lavadia Palace를 방문하면서 불편하였던 느낌이 강해 해당 사건에 대해 길게 언급을 하게 되었으나 다시 사진을 좋아하는 관광객으로 돌아가 본다. 얄타 지역은 바로 해변가에 맞물려있으며 언덕에 주로 주거지들이 밀집해 있다. 또한 지역이 그리 크지 않으며 이 해변가가 얄타 주민들의 유일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겨울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있으며, 5월 이후에 이 지역은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지역인 크림반도이지만 한 가지 여행자 입장으로써 느끼는 바가 있다. 그곳을 가보지 않은 자 섣불리  그곳을 거론하지 말라는 점이다. 나 역시도 처음엔 주변 언론 매체로 인해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만이 앞섰던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니 이래서 경험이 중요하겠으며, 백번 보고 읽고 듣는 것보다 한 번의 경험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상 이번 출장을 많이 꺼려하였으나, 되짚어 생각해보면 출장지가 크림반도라는 사실이 나의 망설임의 이유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태껏 내가 다녀본 국내외 장소들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왕복 비행 편 기준 30번 정도 다른 나라 다른 장소를 오갔던 것 같다.  그중에는 위험한 곳도 있었고, 알려지지 않은 곳도 더러 있기는 하였다. 내가 궁금해지면 발을 내딛었으며, 직접 부딪혀보고자 하였다. 다 사람 사는 곳이니 전쟁 한가운데의 누가 봐도 위험한 지역이 아닌 이상 사실상 상관없었다. 꺼려했던 진짜 이유는 출장지가 아닌 다른 데에 있었던 것이다.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새로운 장소 새로운 경험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해보고자 노력한다.


훗날에는 살이 되고 피가 될 것이라는 나름의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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