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욕망과 희생양
르네 지라르(1923-2015)는 20세기 인문학과 신학, 사회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랑스 출신 사상가다. 1923년 프랑스 아비뇽에서 출생해 역사학을 전공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인문학자로 활동했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명예교수로 은퇴했다.
그는 초기에는 문학비평가였다. 도스토옙스키, 스탕달, 프루스트, 셰익스피어 등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인간 욕망의 패턴을 발견했다. 1961년 출간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그는 모방욕망 개념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 인간은 단순히 자신의 욕구를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존재라는 게 모방욕망의 핵심이다. 이때 모방은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 경쟁과 갈등의 씨앗이 된다. 두 사람이 같은 대상을 욕망하면 경쟁이 생기고 결국 적대적 관계로 발전한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이런 모방욕망이 집단적 폭력을 낳는다고 보았다. 사회 전체가 모방에 의한 경쟁으로 폭발 위기에 처하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한 사람 혹은 소수 집단을 희생양(scapegoat)으로 지목해 폭력을 집중시킨다. 희생양이 제거되면 공동체는 일시적으로 평화를 회복한다. 이것이 바로 희생양 매커니즘이다. 이후 사람들은 그 희생양을 두려움과 감사의 대상으로 신성화하고 종교와 제의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특히 종교와 신화는 원래 폭력적 기원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 논지를 체계화한 책이 바로 우리가 이번에 읽은 <폭력과 성스러움>이다.
지라르는 현대 인문학이 욕망을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욕망을 관계적이고 모방적인 현상으로 파악함으로써 인간 폭력의 근본 구조를 설명하려했다. 또한 종교와 신화를 단순한 문화 산물이 아니라 인간 폭력의 억제 장치이자 그 폭력의 흔적으로 분석했다. 결국 그는 인류학 종교학 심리학 신학 등을 통합해 인간 폭력의 기원과 구원의 가능성을 탐구한 철학자가 된 것 같다. 그래서 지라르의 사상은 인문학적 전반에 모방적 인간관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고 신학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를 폭력의 종식으로 해석하며 대속 개념을 새롭게 재해석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모든 욕망과 폭력을 모방 하나로 설명하려는 과잉 일반화의 문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찰은 여전히 폭력과 희생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 탁월한 도구로 인정받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자율적이지 않고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 A가 어떤 대상을 욕망하는 이유는 그 대상이 스스로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B가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주체(욕망하는 사람)->(매개자:욕망을 중개하는 타인)->대상(욕망의 목표)
두 주체가 같은 대상을 욕망하면 경쟁이 생기고 경쟁은 모방을 통해 확산된다. 모방적 경쟁이 된다. 내가 욕망의 대상을 따라하다 보면 그 모델(본보기)이 곧 경쟁자이자 적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관계를 모방적 경쟁이라고 부른다. 이 모방적 경쟁이 극단으로 치닫을 때, 주체와 모델은 서로 너무 닮아버려서 둘 사이의 차이가 완전히 사라진다. 욕망하는 대상도 같고 행동도 같고 생각조차 서로 모방하다 보니 거울 속의 나 자신처럼 닮은 존재가 된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과 너무 닮은 존재를 마주할 때 극심한 혐오와 공포를 느낀다(심리학에서는 이중자 공포라고 한다). 이때 이 현상을 무서운 짝패라고 부른다. 왜 무서운가? 왜나하면 이 짝패는 나와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고 나의 자리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모방했지만 이제 그는 나의 적수, 경쟁자, 거울 속의 적이 된다. 그는 ‘나이지만 나가 아닌 존재’ 즉 나의 폭력적 그림자가 된다. 그래서 결국 이 무서운 짝패는 모방 욕망의 최종단계, 즉 갈등과 폭력이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를 상징한다. 결국 우리의 욕망이 서로 너무 닮아 있을 때, 오히려 더 쉽게 싸우고 미워하게 된다.
2-1) 나도 모르게 경쟁하거나 비교하게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질투하거나 미워하게 되는 감정이 생긴다면 나는 이미 모방적 관계 안에 있는 걸까?
2-2) 현대 사회의 ‘무서운 짝패’는 실제 사람이 아니라 디지털 이미지일 수도 있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욕망을 모방하고 있을까?
2-3)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욕망을 복제시키고 있다. 브랜드 성공 미의 기준, 자녀교육 등은 모두 타인의 욕망을 따라하게한다. 이 경쟁은 특정한 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소모시키는 내면화된 폭력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할 대안은 무엇일까?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스러움은 폭력을 덮거나 정당화하는 형식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폭력과 성스러움은 동전의 양면이다. 성스러움을 폭력의 사회적 부산물로 보았다. 한쪽은 파괴, 다른 한쪽은 질서-하지만 둘은 끊어낼 수 없는 관계다.
반면 <폭력 또는 성스러움>은 인간은 폭력 대신 성스러움을 선택적 대립적 관계에서 선택해야한다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지라르는 성스러움조차 폭력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3-1) 성스러움(sacred)의 폭력성에 대한 지라르의 해석 즉, 성스러움을 폭력의 억제 장치로만 해석하는 것은 과연 충분한가? 기독교 신앙의 성스러움(holiness)과 비교해본다면?
:지라르는 성스러움을 폭력의 사회적 부산물로 보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성스러움을 신의 특성으로 보았다. 폭력을 억제하는 장치가 아니라 폭력을 해체하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여는 하나님의 구속적 개입으로 이해한다.
3-2) 우리 신화(바리데기 이야기)에서 희생의 성스러움은 단순한 자기 헌신인가 아니면 공동체 폭력의 제도화인가?
: 이야기 줄거리) 버려진 공주 바리데기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지하세계로 내려가 약수를 구해오는 여정을 떠난다. 그녀는 결국 자신을 희생해 아버지를 살리고 죽음과 재생의 여신 즉 무속의 수호신으로 신격화된다.
: 바리데기는 공동체의 폭력(버려짐)의 피해자였지만 나중에는 신성화된 존재로 복원되면서 푹력의 희생이 곧 성스러움의 근원이 되는 이야기다. 여성의 희생이 신성화되는 구조에서 한국적 가부장적 질서의 폭력적 기원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3-3) 공동체 중심적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나라나 동아시아 가치관과 지라르의 이론은 어떤 점에서 충돌하거나 조화를 이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