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의 몇 가지 이슈

조나단 삭스와 르네 지라르

by 전문상담사 이희

1. 신앙과 신학: 불편한 질문들

한 하나님을 말하지만 신앙과 신학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신앙은 삶을 진행하는 언어라면 신학은 그 언어가 무엇을 가능하게 하고 무엇을 가리는지를 묻는 과정이다. 신앙은 즉각적인 응답과 확신을 요구하지만 신학은 멈추어 서서 질문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둘 사이에서 나는 신학을 신앙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충돌이 많지 않았나 싶다. 이런 불편한 충돌은 나의 신앙이 내 안에만 머무르지 않기 위해 성찰과 책임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불편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신앙 공동체에서 질문은 여전히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질문은 믿음이 약해졌을 때 나타나는 징표로 오해되고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질문 없는 신앙은 자기 해석을 절대화하고 그 해석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한다. 이때 신앙은 더는 삶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기준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 질문이 필요하고 신앙이 스스로를 우상화하지 않도록 견제해야 한다.

또 신앙은 체험형이다. 신학은 체험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체험이 무엇을 전제로 한 것인지 묻는다. 그러다 보니 신학은 삶의 고통을 너무 늦게 따라온다. 나는 이 지점에서 신학에 대한 불신?을 느낀다. 결국 신앙과 신학 사이의 긴장은 필수적이다. 신학은 신앙을 대신해주지 못하고 신앙도 신학을 대신해주지 못한다. 대신 신학은 신앙이 무엇에 동의하는지 끝까지 묻는다. 그 질문 덕분에 신앙은 더 정직해질 수 있다.

이번 종교철학 수업을 통해, 신앙과 신학을 구별하게 되면서 불편한 질문들 앞에 서는 것이 덜 불편해졌다. 어쩌면 신앙과 신학 사이의 불편함은 위기가 아니라 성찰에 대한 요청이고 확신보다 더 중요한 책임에 대한 요청이 아닐까 싶다. 이 불편한 질문들 앞에 머무를 때 신앙이 더 성숙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2. 혐오와 거룩

그런 의미에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일이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로 서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신학 수업과 교회 현실을 오가면서 자주 마주하게 되는 것은 거룩을 말하는 언어가 어느 순간 혐오의 언어로 변질되는 장면이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누군가가 정죄되고 있는 현실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질문하게 된다.

기독교 전통에서 거룩은 하나님께 속함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거룩은 분리됨과 구별됨의 언어로 자주 표현되지만 그것은 결코 우월성이 아니다. 오히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함과 한계를 자각하며 더 깊은 겸손과 책임으로 부름 받았다. 그러나 현대 교회 현실에서 거룩은 종종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을 긋는 도구로 사용된다. 다양성이 신앙의 이름으로 평가되고 서열화되며 이때 거룩은 배제의 언어다.

그러나 복음서 속 예수를 보면 이런 거룩에 대한 이해를 흔들어놓는다. 예수는 종교적 사회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진 이들과 식탁을 나누었다. 예수에게 거룩은 오염을 두려워하는 순결이 아니라 사랑으로 경계를 넘는 용기였다. 그렇다면 거룩은 타인을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 아니라 스스로를 더 엄격히 성찰하게 만드는 부르심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신학을 배우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신학생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옳은 답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혐오가 신앙의 언어로 등장할 때 숨겨진 두려움과 권력 배제의 구조를 드러내야 한다. 이는 비판과 공격이 아니고 고통스럽지만 자기비판이다.

결국 신학생으로서 내가 붙들고 싶은 거룩은 나를 안전한 위치에 세워주는 거룩이 아니라 나를 끊임없이 흔들고 이동시키는 거룩이다. 혐오를 내려놓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는 것, 그 자리에서 신학은 다시 시작된다고 믿는다.

얼마 전 유대인을 향한 무차별 총격이 시드니에서 있었고 16명이 사망했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에게 위로를 전한다. 이런 비극이 더는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3. 조나단 삭스와 르네 지라르

신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악이 언제나 외부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폭력과 혐오, 분열은 신앙이 없는 세계의 문제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조나단 삭스와 르네 지라르의 사상을 접하며, 그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 사상가는 서로 다른 전통과 언어를 사용하지만, 공통적으로 종교가 폭력을 낳는 방식과 동시에 폭력을 멈출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글은 그들의 통찰을 통해 신학생으로서 나의 신앙과 신학이 어떻게 다시 질문받게 되었는지를 성찰하는 기록이다.

르네 지라르의 모방욕망 이론은 인간 욕망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해석한다. 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며 살아간다. 이 모방은 경쟁과 갈등을 낳고, 공동체는 그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지라르에 따르면 종교는 오랫동안 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은폐하고 신성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폭력은 정당화되었고, 희생자는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시킨 신성한 제물이 되었다. 이 분석은 신학생으로서 매우 불편했다. 교회 역시 갈등이 심화될 때마다 문제의 원인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전가하며 평화를 회복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라르의 결정적 통찰은 성경 해석에서 드러난다. 성경은 희생양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다시 쓴다는 것이다. 특히 예수의 십자가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사건이다. 예수는 폭력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제거된 희생자였으나, 복음서는 그를 죄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군중과 권력, 종교 제도의 폭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지점에서 신학은 더 이상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 십자가는 인간 폭력의 신성화가 아니라, 그 신성화의 종말을 선언한다. 나는 십자가를 개인의 속죄 공식이 아니라, 공동체 폭력의 구조를 해체하는 계시로 다시 읽게 되었다.

조나단 삭스는 다른 각도에서 비슷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종교 폭력의 핵심 원인을 ‘유일성의 오해’에서 찾는다. 한 공동체가 자신만이 진리를 소유했다고 확신할 때, 타자는 위협이 되고 제거의 대상이 된다. 삭스는 이를 “우리는 선택되었고, 너희는 선택되지 않았다”는 이분법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선택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 선택받았다는 것은 더 큰 윤리적 요구와 타자에 대한 의무를 의미한다. 이 해석은 나에게도 깊은 도전을 주었다. 우리는 복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얼마나 쉽게 도덕적 우월감에 빠지는가.

삭스는 차이를 지워버리는 보편주의도, 차이를 절대화하는 배타주의도 경계한다. 그는 ‘존엄의 정치’를 강조하며, 타자를 나와 다른 존재로 인정하되 그 다름이 위협이 되지 않는 신앙을 요청한다. 이는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과 맞닿는다. 공동체가 내부의 불안을 외부의 적으로 투사할 때 혐오와 폭력이 발생한다. 반대로 타자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존엄한 이웃으로 받아들일 때, 종교는 폭력의 원인이 아니라 평화의 자원이 된다.

두 사상가를 통해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언제나 신앙의 실패라는 사실이다. 교회 안의 분열, 혐오, 배제는 세속화의 결과가 아니라, 왜곡된 종교성의 산물일 수 있다. 신학생으로서 나는 더 이상 교회를 무조건적으로 변호할 수 없게 되었다. 동시에 교회를 쉽게 포기할 수도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복음은 바로 그 폭력의 구조를 드러내고 중단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찰은 나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신학은 정답을 제공하는 학문이 아니라, 폭력이 정당화되는 지점을 끝까지 질문하는 학문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또한 목회와 교육의 현장에서 ‘질서’와 ‘거룩’을 말할 때, 그 말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점검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게 되었다. 조나단 삭스와 르네 지라르는 나에게 신앙을 더 순수하게 만들기보다, 더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조심스러움 속에서 신학은 다시 생명을 향해 열릴 수 있다고 믿는다.


4. 종교와 영성

신학을 공부하기 전, 나에게 영성은 주로 개인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는 언어였다. 기도를 얼마나 꾸준히 하는지, 성경을 얼마나 깊이 읽는지, 신앙적 확신이 얼마나 흔들리지 않는지 등이 영성의 척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길희성의 영성 이해를 접하면서, 나는 내가 영성을 지나치게 ‘내면화된 경건’으로만 축소해 이해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영성을 개인의 종교적 감정이나 신앙 훈련의 결과가 아니라, 세계와 맺는 방식, 타자 앞에 서는 태도로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길희성은 종교와 영성을 구분한다. 종교가 제도와 교리, 정체성의 언어라면, 영성은 삶의 깊이에서 드러나는 태도와 방향성이다. 이 구분은 신학생인 나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신학적 언어를 더 잘 사용하는 사람이 되고 있는가. 길희성의 영성은 ‘무엇을 믿는가’보다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묻는다. 그 물음 앞에서 나의 영성은 단단하기보다 취약했다.

그가 말하는 영성의 핵심 중 하나는 열림이다. 영성은 신념 체계를 강화하는 힘이 아니라, 세계의 고통과 타자의 낯섦 앞에서 자신을 열어두는 능력이다. 이는 종교가 흔히 제공하는 안정감과는 다른 차원의 태도이다. 신학을 공부할수록 나는 확실한 답을 갖고 싶어 졌고,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길희성은 영성을 ‘불확실성을 견디는 힘’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이해를 넘어 계시며, 참된 영성은 그 초과를 통제하려 들지 않는 겸손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통찰은 나의 기도 이해를 변화시켰다. 이전의 기도는 주로 요청과 확신의 언어였다. 그러나 길희성의 영성은 기도를 ‘하나님 앞에 머무는 연습’으로 다시 정의하게 했다. 응답을 얻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세계의 고통을 쉽게 설명하지 않기 위해 침묵할 수 있는 기도. 이 침묵 속에서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라기보다, 고통을 함께 견디는 존재로 다시 위치 지워졌다. 영성은 문제를 제거하는 능력이 아니라, 고통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태도라는 깨달음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길희성의 영성은 또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강조한다. 그는 영성이 깊어질수록 세계는 단순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고 말한다. 이 말은 나에게 중요한 경고처럼 들렸다. 경험치가 쌓이면서 나는 사람들을 더 쉽게 분류하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길희성이 말하는 영성은 타자를 나의 이해 안으로 포섭하지 않는다. 대신 타자의 고유한 삶과 서사를 존중하며, 그 앞에서 쉽게 말하지 않는 윤리를 요청한다. 이 윤리는 목회와 상담, 교육의 현장에서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태도이다.

특히 그의 영성은 ‘거룩함’을 다시 정의한다. 거룩은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용기이다. 이는 예수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예수의 영성은 세속을 떠나는 초월이 아니라, 상처 입은 현실 속으로의 침잠이었다. 길희성의 영성 이해는 나로 하여금, 신앙의 성숙을 안정과 평온의 상태로 오해하지 않게 만들었다. 오히려 더 많이 흔들리고, 더 자주 질문하며, 더 깊이 연루되는 것이 성숙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제 나의 영성의 방향은 이전과 분명히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 확신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목표로 삼지 않기로 했다(여전히 안정을 원하는 내면이 있지만). 대신 덜 폭력적인 신앙인, 덜 단정적인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길희성이 말하는 영성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기보다, 더 취약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그 취약성 속에서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신앙,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으려는 신앙이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길희성의 영성은 나에게 신학 공부의 목적을 다시 묻게 했다. 신학은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훈련일지도 모른다. 이 영성의 방향 전환이 앞으로의 목회와 삶의 자리에서 나를 더 느리게, 더 조심스럽게, 그러나 더 깊이 살아가게 하기를 기대한다.


5. 신학과 상담이 만나는 곳

상담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는 점점 더 ‘유능한 상담자’가 되고 싶었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정확히 분석하고, 적절한 이론을 적용하며,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좋은 상담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조나단 삭스, 르네 지라르, 길희성의 사상을 차례로 깊이 읽으며 나는 상담의 목표를 다시 묻게 되었다. 상담은 과연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인가, 아니면 인간을 다시 존엄한 존재로 서게 하는 윤리적 실천인가. 이 질문은 나의 상담 태도와 정체성을 흔들어 놓았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은 상담 장면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들었다. 지라르에 따르면 인간 공동체는 갈등과 불안을 견디지 못할 때, 그 원인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전가하며 질서를 회복한다. 이 과정에서 한 사람은 ‘문제의 원인’으로 낙인찍히고, 공동체는 그를 배제하거나 처벌함으로써 안정을 얻는다. 상담실을 찾는 많은 내담자들은 바로 이 희생양 메커니즘의 결과로써 상처 입은 존재들이다.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힌 학생, 가정 내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된 자녀, 교회 공동체에서 불편한 존재로 밀려난 신자들은 종종 이미 충분히 벌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통찰은 상담자로서 질문 방향을 바꾼다. 기존의 상담이 “왜 당신은 이렇게 행동했는가”를 묻는 데 집중했다면, 지라르의 시선은 “당신은 어떤 구조 속에서 어떤 역할을 떠맡게 되었는가”를 묻게 한다. 상담자는 개인의 병리를 교정하는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과잉 책임과 투사된 죄책감을 해체하는 증인이 되기도 한다. 이는 특히 학교 상담과 교회 상담에서 중요하다. 문제 행동을 중단시키는 데만 초점을 맞출 경우, 상담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정리 작업에 불과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조나단 삭스는 이러한 위험을 윤리적 차원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삭스는 종교 폭력의 핵심을 ‘유일성의 오해’에서 찾는다. 내가 옳고, 우리가 선택되었으며, 저들은 틀렸다는 확신이 타자를 위협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상담 장면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반복된다. 상담자의 이론, 가치관, 정상성 기준이 내담자의 삶을 재단하는 순간, 상담은 폭력이 된다. 특히 신앙을 기반으로 한 상담에서는 이 위험이 더욱 커진다. 하나님의 뜻, 회복, 치유라는 언어는 내담자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침묵을 강요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삭스가 강조하는 것은 차이를 제거하지 않는 존엄이다. 상담에 이를 적용한다면, 변화 이전에 존재의 존중이 선행되어야 한다. 내담자가 당장 변화하지 않더라도, 그의 삶이 실패나 오류로만 규정되지 않도록 돕는 것, 그것이 상담의 윤리적 출발점이다. 이는 상담자에게 상당한 인내를 요구한다. 변화의 속도가 느릴 때 느끼는 무력감, 상담이 잘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의 불안을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 삭스의 통찰은 상담자가 내담자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도록 만든다.

길희성의 영성은 이러한 윤리적 태도를 지탱하도록 동기부여한다. 그가 말하는 영성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 앞에 머무를 수 있는 힘이다. 상담 장면에서 상담자는 종종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무엇인가 의미를 부여해야 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하며,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다. 그러나 길희성의 영성은 말하지 않음, 해석하지 않음, 서두르지 않음이 무능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일 수 있음을 가르친다. 나는 이 부분에서 크게 동감하고 이 부분이 상담현장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성은 상담자의 위치를 이동시킨다. 상담자는 더 이상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문가가 아니라, 같은 불확실성 속에 서 있는 동반자가 된다. 특히 트라우마, 상실, 이주와 탈북 경험, 차별과 혐오를 겪은 내담자들의 상담에서는, 빠른 이해와 명확한 설명이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다. 길희성이 말하는 영성은 “나는 다 알지 못한다”는 고백에서 시작된다. 이 고백은 상담자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담 관계를 더 안전하게 만든다.

이 세 사상을 통합하면서 나는 상담자의 자기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상담자는 언제든지 공동체의 편에 서서 내담자를 조정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상담자가 속한 제도, 학교, 교회, 조직의 기대는 종종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는 압박으로 작동한다. 이때 상담자는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특정 질서의 편에 서 있을 수 있다. 지라르, 삭스, 길희성은 모두 이러한 무의식적 공모를 경계하게 만든다.

이 배움은 나의 상담 목표를 분명히 바꾸어 놓았다. 나는 더 이상 내담자를 사회에 잘 적응시키는 상담자, 갈등을 빠르게 봉합하는 상담자가 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 않겠다. 대신 덜 고립되게 돕는 상담, 자기혐오를 내면화하지 않도록 돕는 상담, 자신이 희생양이 되었음을 말할 언어를 회복하도록 돕는 상담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담은 즉각적인 성과를 보여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다시 세우는 일은 언제나 느리고 조심스러운 과정일 수밖에 없다.


실천 과제로서 나는 상담 일지와 슈퍼비전 과정에서 다음의 질문들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자 한다.


▶ 이 상담에서 누가 말하고, 누가 침묵하고 있는가.

▶ 내담자의 문제는 개인의 성격인가, 구조의 결과인가.

▶ 내 개입은 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더 잘 순응하게 만드는가.

▶ 나는 이 내담자를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충분히 존엄한 존재’로 대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상담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상담이 폭력이 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최소한의 윤리적 장치가 될 것이다. 조나단 삭스, 르네 지라르, 길희성은 나에게 상담 기술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가르쳐주었다. 상담은 인간을 고쳐 쓰는 일이 아니라, 이미 부서진 채로도 존엄한 존재임을 다시 말해주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이 배움과 성찰이 앞으로의 상담 현장에서 나를 더 느리게, 더 조심스럽게, 그러나 더 신뢰할 수 있는 상담자로 형성해 가기를 기대한다. 신학과 상담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나는 비로소 상담을 하나의 영적 실천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다윗·마리아(어머니)·탈북민에게서 발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