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있는 방향으로 걷고 또 걸었다. 이 호기롭게 시작한 일생의 결단이 물거품이 될까 겁이 났던 것일까? 도망 노예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어스름한 새벽에 출발한 걸음은 쉼을 허락하지 않고 12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국도변을 따라 동쪽을 향했다. 도로표지판에 '양평'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 일단 양평으로 가자!' 몇 시간을 더 걸어 양평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미 세상은 빛을 잃고 내게 다시 그 새벽의 컴컴함을 선사했다.
시외버스터미널의 운행 표을 올려다봤다. 작은 도시의 시외버스는 서울로 가는 걸 빼고는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아직 가는 버스가 뭐가 있지?' 곧 충주행 마지막 버스가 출발한다고 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충주행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푹신한 쿠션 탓일까? 15시간 도보의 피로 탓일까? 양평 시내를 빠져나오며 본 상점의 불빛들이 어른거리더니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버스가 도시로부터 멀어지는 것인지 내가 의식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스르르 잠에 빠져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얼마나 잔 걸까? 버스는 벌써 충주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충주는 난생처음 가보는 미지의 도시였다. 그러나 도시에 대한 궁금증보다 더 큰 고민이 있었다. 어디서 잠을 자야 할까? 터미널이나 역 같은 곳에서 노숙을 하다가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이 여행을 종지부 찍는 건 싫었다. 돈도 없었지만 여관 같은 곳에 가는 건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띄엄띄엄 빛을 뽐내고 있는 네온사인 십자가였다. 교회에 가서 하룻밤을 재워 달라고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난 걸까? 난 터미널 주변의 작은 교회를 찾아가서 하룻밤을 청했다.
"저... 무전여행을 하는 대학생인데요. 하룻밤만 교회에서 재워주실 수 있으신가요?"
처음 찾아간 상가의 작은 교회에는 늦은 밤인데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머릿속에서 수십 번 연습한 거짓말을 시나리오대로 내뱉었다. 착하고 젊은 목사는 미안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어쩌죠. 워낙 교회가 작아서 잘 곳이 따로 없어요. 그리고 여기 예배당 한 편을 저의 부부가 살고 있거든요."
이제 갓 결혼한 듯한 아이가 없는 목사 부부도 그 작은 교회에서 살고 있었으니 낯선 청년을 한 공간에 재우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다른 잘 곳이 있는 교회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더니 약도를 그려주었다. 약도를 따라 잘 곳이 있다는 교회를 찾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