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와 인내심의 상관관계
내면의 발레리나에게 용기를
뻣뻣하기로 말하면 대한민국 상위 1%가 나였다.
그 피끓는 청춘에 나이트도 가지 않을만큼 움직이는 걸 싫어하던 내가
20대 중반이던가, 몸을 좀 움직여 볼 생각으로 재즈댄스 학원을 등록했다.
허리를 굽혀 무릎에 손이 닿기 어렵고
사이드 스플릿은 커녕 다리는 이미 굳어 90도 이상도 벌리기 힘든 본연의 뻣뻣함!
2주 후에 원장이 나를 불러 환불을 해주었다.
십여년을 가르쳐왔는데 이렇게 뻣뻣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단다.
실망했지만 참담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이구나를 빠르게 인정하고 즐겁지 않은 운동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었다.
심지어 아침에 늦잠을 자도 되고 말이지.
성질 급하기로도 말하면 대한민국 상위 1%에 빠지지 않는게 나다.
이건 지금도 그렇지 싶다.
문을 열기 전에 몸이 먼저 나가면서 문과 충돌하는 일상,
늘 같은 자리에 식탁 모서리에 부딪혀서 식탁 모서리가 마모되가는게 보이는 여자가 나다.
성질이 급한건지, 덜렁대는 건지 구분하고싶지 않다.
어차피 둘다니까.
그런 나에게 발레를 한다는 건,
더할 수 없는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거울을 보면 로봇처럼 움직이는 내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늘지 않는 나의 뻣뻣함을 마주했다.
이번엔 실망스럽지는 않았으나 참담했다.
발레가 너무 좋아서 관두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냥 피아노 소리에 집중하고 몸을 늘리는데만 신경쓰기로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서너달이 지날무렵, 거울을 보니 연결 동작이 제법 부드러워보였다.
'늘어남'의 순간을 느끼고 나자, 더이상 인내가 지루하지 않아졌다.
나는 몰랐지만 정말 아주 조금씩 늘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몸을 숙이면 발바닥이 닿은 자리 옆으로 내 손바닥이 땅을 짚을 수 있게 되었고
아직은 내가 하는 발레는 예술에 미치지 못해 그저 스트레칭 운동에 불과한 수준이지만
이런 쌓임이 언젠가는 내면의 지젤을 불러주지 않을까,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발레를 한다는 건,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를 기다리는 일
식물에 물을 주는 일
옷에 피어오른 보푸라기를 손으로 하나하나 떼어내는 일과 닮아있다.
잊고 있다가 화분에 물을 줄때마다 나도 모르게 발레가 연상되서
주변을 살핀 다음 다리를 뒤로 올려 아라베스크 동작을 슬며시 해본다.
이런 나를 누군가 보면 엄청나게 웃기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건,
내가 진심으로 발레에 포함된 동작, 음악, 박자를 모두 사랑하게 된 까닭일 것이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나이 마흔을 넘겨서 이렇게 푹 빠질 무언가를 해볼 수 있다니.
이런 설레임이라니!
현실은 마흔을 넘긴 두툼한 아줌마지만
내 안에 오데뜨가 있다구!!!
그러니까 예쁜 발레 스커트 하나쯤 더 사도 괜찮지 않냐며
오늘도 사이트를 서성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