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호 라인
5층 짜리 낡은 아파트였다. 달랑 A동 B동 두 동이 전부인.
잘은 모르지만 주변에 다른 아파트들은 가동, 나동, 다동... 이렇게 이름 붙는데
영어로 버젓이 써 있는 게 어쩐지 멋있어 보였다.
작은 아파트다보니 집집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201호. 딸 셋집. 내가 중학교에 입학 할 즈음 그 집 둘째 언니가 입던 교복을 물려받았다. 이미 그 집 첫째 언니가 입던 교복을 둘째 언니가 잘 입고 내가 세 번째 였다. 그 집의 셋째는 나보다 어린 동생이었는데 미장원 놀이를 한답시고 그 아이의 머리카락을 잘라놓아서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어느 날 뜬금없이 막내가 생겼다. 아들이었다. 그 때는 잘 몰랐는데 커서 알았다. '밖에서 데리고 온 아들'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어른들의 사정은 모를 나이였고, 귀여운 아기 동생이 생긴게 너무 부러웠다. 무럭무럭 자라서 그 아기동생이 걸음마를 하고 나시 티에 팬티바람으로 뛰어다니는 모습도 예뻤던 시절이었다.
301호. 할머니의 친구분 집. 나와 동갑인 남자 아이가 있는 집이었다. 할머니 친구는 참 별로였다. 바글바글 볶아낸 동그란 펌 머리에 늘 이마를 활짝 넘기는 머리띠를 하고 다니셨다. 살집이 두둑하고 턱 언저리에 크고 볼록한 까만 점이 있었는데 책에서 읽은 놀부 아줌마나 팥쥐 엄마 생각이 자꾸 났었다. 나는 완전 짜증났던 게, 자꾸 내가 자기 손자랑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며 우리 할머니한테 내 흉을 봤다. 그것도 내가 있는데서. 장난하나. 눈 아래 까만 점이 있고 머리가 아주 큰 그 아이는 멍청하기 짝이없어 완전 별로였는데!
401호. 새로 이사 온 한살 아래 여자아이. 여자아이의 이름은 참 예뻤다. 내 이름은 예쁘지도 않고 남자같기도 해서 늘 마음에 안들었다. 빨강머리 앤처럼 비탄에 잠긴 마음으로 내 이름을 슬퍼하던 나에게 그 아이는 '이름'만으로도 천사였다. 그 아이네 집에는 미미의 이층집이 있었고, 미미의 남자친구인 토토도 있었다. 문을 열면 불빛이 들어오는 인형의 집주인이 놀이극에서도 항상 주인공이었다. 주인공은 언제나 자기 이름을 '정아'라고 칭하며 부르라고 했다. 니 이름이 훨씬 에쁜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아이는 미미의 집이 있고 심기를 거스르면 내일은 놀러갈 수 없는데.
501호. 다른 기억은 없는데 딱 한가지. 그 집에 아기가 있어서 놀러갔다. 다른 아이들 몇 명과 함께.
나중에 그 집에 금반지가 없어졌다고 나를 의심하는 얘기를 들었다. 아줌마들끼리 앉아서 야채를 다듬으며 쑥덕대는 소리로. 내가 초등학교 2학년도 안됐을 때 기억인데...... 내가 금반지를 갖다 어디다 쓰냐고......
대들고 따지지 못한 게 아직도 속상하다. 그리고 뒤이은 기억으로 그 때 우르르 놀러간 무리 중에 남자 아이 하나가 쇠조각 같은 작은 것을 (반지인지 아닌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현관문을 열고 닫는 걸쇠 구멍에 쏙 집어넣은 걸 봤던 거 같다. 노랗게 빛나던 그것이 아마 잃어버린 금반지가 아니었을까.
202호. 남매집.
남자아이가 나와 동갑이고 여자 아이는 나보다 한살 어렸지만 당연히 나는 여자아이랑 친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늘 안계셨고 그 집엔 피아노랑 세계 명작 전집이 있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뜨개 레이스가 덮혀진 소파도 있었고! 자주 놀러갔다. 나와 마음이 잘맞고 눈이 큰 예쁜 아이였다. 책도 곧잘 빌려주었다. 어느 날 둘이 놀다가 소방서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울렸지만 누군가 받기 전에 황급히 끊고나서도 우리를 잡으러 올까봐 콩닥대는 가슴으로 한참 전화기 앞에 앉아있었다. 점점 더 친해지는데 이사를 가버렸다. 많이 울었다. 성인이 되고나서 아주 우연히 시내에서 뜬금없이 마주친 적이있었다. 반가워하며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한 두번인가 따로 만나서 맥주 한잔까지 나누었던 기억은 있는데, 큰 공감대가 사라져서인지 우리는 시절 인연으로 끝났다. 두고두고 그 아이의 앳된 소녀였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302호. 매일 나를 놀리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나보다 동생이었다. 보다못해 그 아이의 엄마를 찾아가서 일렀는데 "아줌마가 잘 얘기할게." 가 전부였다. 야단치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 참 부러웠다. 부럽고 샘나고 그 남자애가 싫었다.
402호, 502호 - 딱히 기억에 없음.
정작 방금 손에 들고있던 차키는 어딨는지 모르겠는데 수십년전의 이 기억이, 그 풍경이, 그 냄새가 너무 생생하다. 내가 기억 속에 이름과 외모까지 또렷하게 떠오르는 그 시절의 그 사람들. 돌이켜보면 한편의 무성 영화같은 장면들이 스친다.
사람의 기억은 무엇을, 어디까지, 왜 기억하는 걸까.
#수필
#추억
#기록
#80년대
#9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