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맛

by 아란

2017년의 겨울은 특별했다. 둘째를 임신 중이었기에 휴직을 준비했고, 제자들과 학부모님들에게 많은 축하와 선물을 받았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나가면서 여기저기서 받은 케이크들로 한동안 빵 속에 묻혀 지냈다. 몸에 좋다는 유기농 밀로 시트를 만들어 동물성 생크림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케이크, 각종 유명 캐릭터로 만든 케이크, 그리고 아이스크림 케이크까지. 어릴 적에는 아이스크림이 케이크가 될 수 있다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렇게 다양한 케이크들이 많아진 요즘이지만, 언제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버터크림 케이크’가 떠오른다.


나는 ‘케이크’의 존재를 모르고 자랐다. 글을 깨치면서 동화책 속에 나오는 케이크를 보면 그런 예쁘고 커다란 빵은 외국에나 살아야 볼 수 있는 건 줄 알았다. 요즘은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빵집을 볼 수 있지만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빵집을 쉽게 볼 수 없었다. 어쩌다가 엄마, 아빠를 따라 서울에 있는 외갓집에 가는 날, 영등포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가다가 내리면 ‘태양의 집’이라는 작은 쇼핑몰이 있었다. 엄마는 꼭 그곳에 들어가 안에 있는 제과점을 들러서 옥수수 알갱이가 콕콕 박힌 옥수수빵을 사주시곤 했다. 그 옥수수 알을 떼어먹으면서 부드럽고 고소한 빵을 처음 느껴봤다. 그리고 내가 케이크를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진열장에 케이크를 구경하면서 행복했다.


어느 날, ‘파란 풍차’라는 간판을 달고 옆 골목에 빵집이 생겼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 매일 빵집 앞을 지날 때면 걸음이 느려졌다. 유리문 사이로 솔솔 풍기는 고소한 빵 냄새를 맡으며 유리창에 코를 붙이고 예쁜 빵들을 구경하는 아이를 빵집 아저씨는 한 번도 나무라지 않으셨다. 나는 백 원, 이백 원씩 모아서 사백 원이 생기면 곰보빵을 하나 사 먹으러 그곳을 드나들었고, 아저씨가 계산하는 동안 계산대 아래의 유리 진열장에 케이크들을 한참 구경했다. 지금 생각하니 제과점 아저씨는 단지 돈을 받고 빵을 내어주셨을 뿐인데, 참 느리게 계산을 해 주셨다. 마음껏 구경하고 아쉬운 한숨을 쉬며 손에 든 곰보빵을 꼭 움켜쥐고 그곳을 나서곤 했다.


1993년, 크리스마스보다 두어 달 이른 내 생일에 아빠는 케이크를 하나 사 오셨다. 태어나 처음 직접 보는 케이크라니! 부드러운 크림이라니!

“이건 뭐예요?” 나는 연분홍색 꽃잎이 도로로 말려있는 장식품을 가리켰다.

“그건 설탕으로 만든 거야. 먹을 수 있어.”

‘이 예쁜 꽃을 먹을 수도 있다니!’ 헨젤과 그레텔이 들어간 집이 눈앞에 스치는 것 같았다. 그 꽃이 바스러지는 게 아까워 잎사귀부터 떼어 오도독 씹었다. 점점 줄어드는 게 아쉬워서 나중에는 씹지 않고 긴 시간을 녹여서 먹었다. 달콤한 가루약을 먹는 느낌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케이크를 한 입 떠서 입에 넣는 순간, 불행히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크림의 생경함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뱉어냈다.


느끼하다며 크림을 걷어내고 속통만 먹는 나를 보며 엄마는 촌스럽다고 타박하면서도 못내 속상한 기색이었다. 먹다 보면 입에 맞을 거라며 조금씩 빵에 크림을 묻혀 내 입에 넣어주셨다. 나는 콧등을 잔뜩 찌푸리며 엄마가 입에 넣어주는 케이크를 조금씩 받아먹었다. 왈칵 올라왔던 묵직한 느낌의 크림. 먹기도 전에 무언가 거부감이 느껴져 지금도 여전히 크림이 있는 빵은 잘 먹지 않거나, 대부분 크림을 걷어내고 먹는 버릇이 남은 걸 보면 엄마의 방법은 그다지 효과가 있었던 거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크림을 쓱 밀어내고 먹었던 그 케이크가 지금도 겨울이면 늘 생각이 난다. 듬성듬성 묻은 크림, 퍽퍽하고 거친 빵인데도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가난'을 떠올리면 들통에 찬물을 받아 가스불 위에 올려 펄펄 끓인 다음, 다시 화장실로 날라서 찬물과 섞어 머리를 감던 추운 겨울, 내복을 입고 양말을 신고 또 그 위에 두터운 조끼를 입고 자야 했던 밤, 긴 집게로 연탄을 잘 집어 손에 힘을 잔뜩 준 채 바깥으로 나르던 날, 그리고 손끝에 닿았던 시린 바람, 그런 것들이 생각난다.


가진 게 없는 사람들에게 겨울만큼 험한 계절이 있을까. 그런데도 때로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아빠가 가끔 퇴근길에 사주시던 호떡 네 장, 네 식구가 한 사람 앞에 한 장씩 나누어 먹던 그 시간이 부르는 향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가난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크리스마스에는 케이크를 한 번씩 사 먹을 수 있게 된 형편 속에서 나는 서글픔과 고마움을 동시에 조금씩 배웠던 거 같다.


사람이 성장하는 데에는 언제나 결핍이 필요하다. 지나친 결핍은 열등감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그곳에서 올라오기 위해 안간힘을 쥐어짜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적당한 결핍은 의식과 성장을 돕는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원하는 케이크를, 원하는 순간에 사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막상 입에 들어갔을 때의 충족감은 그 어린 시절을 따라갈 수가 없다. ‘간절함’이라는 양념이 빠지면 음식이든 기억이든 그 맛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케이크만 보면 무조건 생일인 줄 아는 아이와 촛불을 호호 불며 한바탕 크리스마스 케이크 파티를 하고 나서 뜬금없이 버터크림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하자, 남편은 당황스러워했다.

“지금? 갑자기? 요즘 버터크림 케이크를 팔기는 하나?”

“그냥……. 어릴 때 가끔 먹었는데, 크리스마스가 되면 가끔 생각이 나서.” 무덤덤하게 듣고 있던 남편은 잠든 아이를 어머님께 맡기더니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

“이 밤에 무슨 드라이브를 가?”라고 말하면서도 내심, ‘버터크림 케이크를 사러 가자는 건가?’ 싶어서 흔쾌히 따라나섰다.


차는 고속도로를 넘어서 익숙한 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내가 어릴 때 살던 그 허름한 동네로 향했다. 비록 차로 30분 거리지만, 선뜻 자주 가지 않는 그곳. 우리 사이에는 따뜻한 침묵이 흘렀다. 어두운 동네를 눈으로 훑으며 차도 인적도 드문 그곳을 빙빙 도는데, ‘파란 풍차’ 빵집은 사라지고 다른 가게가 셔터를 내리고 있었다. 골목 귀퉁이의 호떡 포장마차가 나타나자 나는 반가운 탄성을 터트렸다.

“와! 아직도 있어!”

여전히 같은 주인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떡 포차는 굵은 고무 밧줄로 꽁꽁 닫혀있었다. 식구 수에 딱 맞춰, 천 원에 네 장을 주는 호떡을 사려고, 밤 10시에 퇴근한 아빠는 버스에 내려서 그 호떡이 구워지기를 기다렸다가 품에 안고 오셨었지. 그러면 나랑 엄마랑 할머니는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가 손에 들린 호떡에 먼저 눈이 갔던 그 겨울밤.


그 겨울밤의 맛. 별것 아닌데도 그 추억들이 뭉클하게 올라와 눈물이 주르륵 났다. 라디오조차 틀지 않은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지만, 그 편안하고 익숙한 정적 속에서 남편은 왼손으로 운전하고, 오른손으로는 손끝이 찬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서너 바퀴를 더 돌고는 말없이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니, 아이는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행여나 손주가 자다 깨어 울까 봐 방문을 살짝 열어두고 주무시고 계신 어머니. 어머니 방문을 닫아드리고, 저녁때 먹다 남은 케이크의 잔해를 치우는데, 마음이 몽글몽글 차오르고 넘치더니 자꾸 눈물이 묻어났다.

모든 마무리를 마치고 아이의 선물을 커다란 양말에 넣어 거실에 놓아두고 방에 들어와 아이를 품에 꼭 안으니, 세상이 이리 따뜻할 수가 있는지. 내 어린 시절의 서글픔도 지나고 나니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아이는 나중에 크리스마스를 어떤 맛으로 기억할지, 몹시 설레었던 밤. 그렇게 불혹을 눈앞에 두었던 몇 해 전, 크리스마스의 맛은 새롭게 바뀌고 새로운 기억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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