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의 바퀴대첩
(바퀴벌레 이야기. 비위 약하신 분들은 뒤로가기)
하필 왜 그 기억이 났는지 모를 일이다. 임시 저장된 토막 난 글을 고르려다가 그래도 생각이 밀려오는 이 얘기부터 해야겠다. 아마도 죽어버린 장수풍뎅이가 남기고 간 알이 부화하면서 눈에 보이는 애벌레만 6마리를 세고 나서 ‘우리 집에 벌레가 생기다니!’로부터 비롯된 기억일 것이다.
어릴 때 그 아파트는 바퀴와 사람이 더불어 사는 아파트였다. 오래되고 낡았으며 지하실에 방직 공작이 세를 들어 있다가 나간 후에 한동안 비어 있었다. 장마에 침수되었다가 그대로 방치되어 습하기까지 했으니, 바퀴벌레들에게는 파라다이스가 아마 그곳이 아니었을까.
우리 집에 있던 장롱은 붙임새가 조악하기 짝이 없어 많은 틈새가 곳곳에 있었다. 문을 여닫을 때 자주 삐걱거렸고 이가 맞지 않아 성질을 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또한 그들의 서식에 지대한 공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시때때로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퀴벌레들 때문에 처음에는 비명을 질러대며 살았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5학년 되던 시기에 나는 무심히 맨손으로 때려잡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 무심한 경지를 다시 한번 뒤집은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어쩌다가 아빠 친구분이 우리 집에 방문하시는 날은 수지맞은 날이다. 맘 좋은 아빠 친구는 종합 선물 세트라고 쓰여있는 오만가지 과자가 종류별로 들어 있는 박스 혹은 맛있는 파인애플, 복숭아 통조림을 잔뜩 들고 오셨다. ‘아빠 친구가 또 안 오나?’ 하고 손꼽아 기다리던 어느 날, 드디어 아빠 친구분이 오셨다. 파인애플 통조림을 들고. 맛있게 먹고 남은 파인애플을 '나중에 먹어야지.’ 하고 머리맡에 놓아두고 잠이 들었는데 자면서 잠버릇으로 뒤척이다가 만세를 하면서 팔을 내리쳤다.
그 순간, 손에 느껴지는 톡 터지는 축축한 느낌! 잠결에도 급격하게 소름이 끼쳐와서 벌떡 일어나 불을 켜보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파인애플 틈새 사이로 얼굴 내밀어 더듬이를 흔들며 “까꿍”하고 있는 바퀴벌레 일가족과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그리고 내 손등에 터져 죽은 제일 큰 바퀴 하나. 아마 바퀴벌레 가족에게 나는 모처럼 파인애플을 먹으러 나온 '어쩐지 운수 좋은 날'에 아빠 바퀴를 때려죽인 철천지원수일 것이다.
“꺄아아아아악!” 한밤에 내지른 내 비명에 옆 방에 엄마, 아빠가 달려오셨고 주무시던 할머니는 느리게 몸을 일으키셨는데 뒷일은 어떻게 수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일이 있고서 나는 그 촉감에 대한 트라우마로 맨손 때려잡기 신공은 더 이상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그들을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고심하던 나는 맨 손 대신에 손잡이가 형광에 가까운 초록색이고 넓적한 스패출러 부분이 다홍색에 가까운, 촌스럽기 그지없는 파리채를 애용했다.
하루는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책 너머로 무언가 검고 큰 것이 일렁이는 느낌이 거슬려 시선을 올렸다. 저만치 발치 끝에 정말 역대급 바퀴가 서성이는 걸 발견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파리채는 너무 멀었다. 내가 일어서서 움직이면 놈은 도망갈 것임이 분명했다. 더듬이를 움직이며 주변 장애물을 검색하는 녀석을 보건 데 이대로 놓쳐서 그냥 보내기엔 너무나 ‘숙주’임에 분명해 보이는 덩치였다.
녀석을 절대로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되는 녀석의 알 부화 현장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심하는 동안 놈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급한 마음에 나는 결국 손에 들고 있던 하늘색 하드커버의 표지가 예쁜-선물 받아 소중하게 아껴 읽고 있던-책을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명중했으나 기쁘지가 않았다.
늘 중고 책만 사 읽다가 우연히 서점 앞에서 마주친 담임선생님께 선물로 받은 새 책이었다. 흰색과 연두색이 삼삼하게 섞인 예쁜 하늘색 표지가 꽤 맘에 들었던 책이었다. 화장실 휴지를 둘둘 말아 닦아내고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다시 닦아냈다. 물기가 마르고 나서 마른 휴지로 다시 닦으면서 나는 전에 없이 진심으로 분노에 사로잡혔다. 여태까지는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냥 내 환경에 내가 맞추어 적응해서 살았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나는 아주 소중한 책에 해를 입었다. 아주 치명적인.
새해가 돌아왔고 중1이 된 그해에 큰 집에 다녀오니 세뱃돈이 무려 13만 원이었다.내 인생을 다 털어서 세뱃돈을 그렇게 많이 받은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건 나를 돕기 위해 저기 먼 곳에서 대 우주가 불러일으킨 징조였으리라. 곳곳에 붙이면 바퀴가 먹이를 먹고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죽어버린다는 그 납작하고 시커먼 약을 30개를 사 왔다. 고작 20평 남짓했던 집에 30개를 모조리 붙였다. 이 쌍놈의 바퀴 버러지 새끼들을 다 죽여버려 씨를 말리겠다는 각오였다. 허무하게도 그 기억이 마지막이다. 아마도 단숨에 없어지지 않았겠지만, 가끔 텅 비어버려 휴지로 잡으면 바스러져 버리는 빈 알 말고는 딱히 다른 기억은 없는 걸 보니 내 나름, 최선의 박멸이 성공한 건 아닐까.
좀 웃기지만 그 때를 계기로 나는 성격이 약간 바뀌었다. 주어진 대로 되는대로 나를 맞추고 눈치를 보는 성격이 기본 기질인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어지간하면 참고 참다가 때때로 화가 나는 순간이 오면, 소위 ‘빡이 치는’ 순간이 오면 무섭게 판을 엎어버리는 것이다. 바뀐 게 아니라 숨어 있던 성질머리가 발현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박멸해 버린 것은 바퀴벌레가 아니라 어릴 때(엄마가 오시기 전) 이집 저집 다니며 눈치 보고 순응하는 무기력한 나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바퀴벌레들인데도 불구하고, 때때로 가난으로 가득 찼던 그 낡은 집의 따뜻했던 방바닥이 아득하게 그립다.
(혹시나.... TMI: 아들 둘을 키우면서 어지간한 꼬물이들은 잘 만지고 잡지만, 날쌔고 파닥이는 것들은 못잡습니다. 바퀴 못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