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에 누워서 보는 삽화 에세이 <일요 이예지>
연말은 좋은 핑곗거리다.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게 되니 말이다.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는 2년 반 만에 을지로에 있는 바에서 얼굴을 보기로 했다.
붉은 체크무늬 스커트를 입고 일자로 떨어지는 진회색 코트를 꺼냈다. 금장이 작게 박힌 검정색 단화를 신고 벨벳 재질의 귀걸이를 했다. 향이 좋은 핸드크림도 챙겼다. 그가 보는 앞에서 바를 심산이었다. 향기를 소개하며 그의 코에 손 등을 가져다 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버스가 눈길을 천천히 달렸다. 조금 늦는다고 말하자 그는 조심해서 오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가로등 빛이 눈발에 나지막이 흔들렸다. 어깨를 움츠린 사람들의 입김이 하얗게 피었다. 겨울의 한복판이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 "거의 다 와 가"
- "나는 바 자리에 앉아 있어"
- "테이블 자리는 꽉 찼어?"
- "아니, 나 그냥 바에 앉고 싶어서"
옆에 앉으면 거리가 가까워진다. 괜히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바에 도착해 문을 여니 작게 살랑이는 종소리가 났다. 그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2년 반 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말이다. 나를 발견한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어두운 노란 조명 아래서 우리의 대화는 가지런히 이어졌다. 나는 웃을 때 굳이 그의 팔뚝을 살짝씩 만졌다.
몇 년 전 우리가 제주에서 함께 여름 바다를 볼 때, 샌들 위로 보이는 네 발목이 너무 예뻤다는 말을 나는 못 했다. 네가 우리집에 놀러온 날이면 재채기처럼 튀어나올 것 같은, 자고 가란 말을 나는 안 했다.
재채기를 하기 전엔 숨을 몇 번이나 들이 마시게 된다. 나는 어쩌면, 4년 동안 들숨만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간질거리는 코 끝을 쓸며 우리는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손을 잡고 싶었다. 손을 잡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우리의 몸 옆 면은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손 등끼리 닿지 않게 힘을 주고 있느라 웃긴 꼴이었다. 나는 오른 팔만을, 그는 왼팔만을 흔들며 걸었다. 각자의 다른 팔은 꼿꼿하게 곤두세웠다. 그는 심지어 작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너는 왜 뼈가 예쁠까. 짜증이 날 정도였다. 주먹을 쥔 네 손 등 위로 동산이 다섯 개 솟아 있었다.
- "이건 뭐야?"
- “손이잖아"
- "이건 뭔지 모르겠네"
- "손 등에 있는 뼈..."
보통 영화에서는 여기서 서로 눈빛을 교환 하고 컷이 전환되고 슬로우가 걸리며 음악이 깔리고 깍지를 끼는 두 손이 앵글에 잡히지 않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마지막 대답 이후로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왜 그런 말을 뱉었나. 애당초 손을 잡고 싶어했던 내 모습이 통째로 부끄러웠다. 손을 보고 무엇이냐 물으면 슬쩍 손을 잡아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15초 전의 내가 망신스러웠다.
2차를 가자는 말보다 손잡는 게 어려운 나이 스물 아홉. 속을 보이는 대신 속이 없는 말을 하기로 했다. 청계천 위 다리를 따라 건다가 간판이 없는 노포를 발견했다. 나는 소주를 마시자고 말했다. 그가 소주는 싫다고 했다. 머리 속 서랍을 열었다 닫으며 종로 근처 괜찮은 술집들을 떠올렸다. 어디로 갈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실 아까부터 손 잡고 싶다는 마음밖에 안 들었다.
- "너희 집으로 갈까"
머리 속에 서랍이 모두 닫히고 내 방 건조대에 걸려 있는 팬티들이 생각났다. 오늘 아침에 벗어 놓은 팬티도 생각났다. 왜 팬티 생각만 나는 것인가? 나는 의연하게 택시를 불렀다. 종로 한복판은 택시가 안 잡혔다. 손등 뼈를 보고 무엇이냐 묻고 나서 소주를 마시자고 한 뒤 우리 집으로 가려 한다. 팬티 생각이 난다. 나는 끝없이 허둥댔다.
물감과 팬티가 어지럽게 뒤섞인 집에 네가 왔다. 너는 내 향수함을 손으로 차르르 쓸었다. 하나 뿌려보겠냐고 묻자 그러겠다 말했다. 나는 우드 세이지 향이 나는 향수를 집어 들었고 네 손목 근처에서 펌프를 살짝 눌렀다. 너는 내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어쩌면 너도 계속 말하고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면서도 모른척 했던 것 같다. 가끔 네 꿈을 꿨다는 말, 네 발목 덕에 제주 바다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 누구와 있을 때면 네가 더 그리웠다는 말은 못 했지만, 나는 이제 재채기를 할 차례인 것 같았다.
- "자고 갈래?"
에취, 너는 내 꽃가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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