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스며드는 것이 더 무섭다.
입사 발령을 기다리는 일이 이렇게 힘이 들 줄은 몰랐다. 발령이라는 사형선고가 내게 내려지기 전까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적당히 알바나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하루에 10시간 넘게 책상에 붙어있던 습관이 빠지지 않았는지 사람을 만나도, 여행을 다녀와도 결국 불안함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시험을 핑계로 미뤄두기만 했던 영화나 드라마들을 하나씩 꺼내보기 시작했고, 첫 시작은 '반의반'이었다.
사실 '처참한 시청률', '조기종영'이라는 악랄한 프레임이 씐 탓에 이걸 보는 게 맞는 지 많은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반의반'의 OST를 정준일이 불렀단 이유 하나만으로 '반의반'은 내게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드라마였다. 이보다 배보다 배꼽이 큰 경우가 있을까.
<너라고 생각해>, 정준일
많은 이들의 평가대로 첫 화를 보는 것이 가장 큰 곤욕이었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나라 이게 일반적인 전개인지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첫 화부터 아무런 개연성 없이 '지수'를 찾는 '하원'의 모습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아무리 봐도 MP3같아 보이는 기계에서 '지수'를 찾는 '하원'의 모습에서 내가 정말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언제쯤 '너라고 생각해'가 나올지 수십 번씩 인내하며 '반의반'을 보던 나는 어느새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완벽히 인물들의 감정에 몰입하고 있었다. 나 역시 드라마의 완결을 보진 못했지만, 뒤의 사족을 통해서 이 드라마가 '명작'임을 강하게 어필하려고 한다. 조기종영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이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들이 없길 바란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자제하고 이야기하자면,
#1. 느린 전개의 미학
'반의반'을 시청한 많은 이들의 얘기처럼 스토리를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고, 전개가 답답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많다. 1, 2화 만으론 인물들이 가진 깊은 내면의 갈등을 알아내기도 어렵고 문제해결 방향 역시 쉽게 예측할 수 없다. 또한 드라마 전반에 흐르는 '망자와의 대화'라는 키워드는 '반의반'이 갖는 다소 어려운 키워드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망자를 좇는 '하원'의 모습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고, 그런 '하원' 옆을 지키는 '서우'의 모습이 절절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담담한 전개와 담담히 변화하는 인물들을 보는 것은 분명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나, 그런 모습들이 더욱 솔직하게 다가온다.
#2. 망자와의 대화, 축복일까 저주일까?
#1의 연장선으로, 격정적인 사랑싸움 끝에 '폴 인 러브'라는 목적으로 숨가쁘게 달리는 여느 드라마와는 다르게 '반의반'은 '망자와의 대화'라는 대주제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진다. 어느 누군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기계 속에 망자의 기억과 음성을 담고, 집 안 모든 음성인식 AI의 이름을 망자의 이름으로 저장해두는 것. 사랑이 너무 극진한 탓에 가능한 행동일까, 아니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독한 집착일까? '하원'이 망자를 그리워하는 방식은 너무나 특이해서 '서우'와 마찬가지로 시청자들은 거부감과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에게 '하원'의 추억 방식은 충분히 논리적이다.
#3. 인물들의 속도를 닮은 OST
'반의반'의 OST는 등장인물들의 속도와 감정선을 많이 닮았다. 노랫말이 없는 연주곡들이 OST의 주를 이루고, 멜로디가 있더라도 기승전결이 웅장한 곡은 찾아볼 수 있다. '하현상', '정준일'과 같은 가창자들의 목소리도 인물들의 감성선, 화려하지 않은 경희궁길과 잘 어울린다. 복잡하지 않은 서울과 강원도의 모습, 그리고 차분하게 흐르는 가창자들의 목소리와 피아노 연주는 '반의반'이라는 드라마가 지향하는 이미지를 완벽하게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 물론 수수하게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정해인(하원)'과 '채수빈(서우)'의 모습도 드라마에 몰입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제공한다. 장담컨대 배우, 배경, OST 삼박자가 이렇게나 조화로운 영상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이렇게나 장황하게 '반의반'을 포장했지만, 비판을 피해 갈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위에 언급했듯 참을 수 없이 느린 전개와 이해하기 어려운 스토리 등은 '반의반'의 매력을 저하시킨다. 하지만 일상의 차분한 템포를 찾고자 하는 이에게,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여운을 원하는 이에게 '반의반'은 담담한 만족감을 가져다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