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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Nov 18. 2020

홍차의 향에 취해 지내던 날들

생후 7주 정도부터 이도의 양쪽 입 주변이 벌겋게 부어오르더니 양쪽 볼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침독이라 생각했고 이도가 불편해하지 않는 것 같아서, 단지 피부가 예민해서 그럴 거라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도의 담당 소아과 의사도 세안 후 보습크림만 잘 발라주면 나아질 거라고 했으니까. 그 후로 두어 달이 지나도록 증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악화되고 있었다. 다시 찾은 소화과의 담당의사는 종합병원에 가보는 게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도 원칙적으론 마찬가지겠지만 독일에서 종합병원에 가는 경우는 개인병원에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개인병원을 거치지 않고는 갈 수 없으며 심각한 상태일 경우에만 내원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의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리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병원에 조금 더 일찍 와 볼 걸 하는 후회와 걱정이 섞인 눈물 이리라. 우리는 담당의사의 소견서를 받자마자 집에서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에 등록을 한 후 지루한 기다림이 계속되었다. 화장실을 몇 번 다녀오고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의 얼굴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이도의 이름이 호출되었다. 담당의사는 우리가 가져간 이도의 진료차트를 훑어보더니 이도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우린 그저 초조하게 이도를 진찰하는 의사를 바라보며 그가 무엇인가 희망적인 소견을 비추기만을 바랬다.


“아기가 환부를 가려워하지는 않나요?”

“만지거나 긁지 않는 걸 보니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피부가 약한 아기들에게 흔한 증상이에요.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극적인 음식물이나 타액이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으니 공갈젖꼭지를 물리지 마시고 음식이 묻었을 경우에는 바로바로 닦아주세요. 그리고 매일 두어 차례 진하게 우린 홍차를 거즈에 적셔서 해당 부위에 덮어주세요. 피부 안정 효과가 있을 거예요. 홍차는 꼭 향이나 맛이 첨가되지 않은 제품을 사용하시고요.”

“그렇군요. 다른 연고나 의약품은 필요 없나요?”

“네, 필요 없어요. 코르티솔이 함유된 연고를 바르면 빠른 효과가 있겠지만 피부가 그 약품에 적응이 되면 점점 더 많은 양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도 생겨서 추천을 드리지 않아요. 더욱이 아기 피부처럼 민감한 경우에는요. 심각하거나 위험한 증상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종합병원까지 왔기에 뭔가 개인병원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전문의의 소견과 함께 효과가 빠르고 뛰어난 의약품을 처방받을 거라 짐작했던 나에게 그리고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나와 비슷한 기대를 했던 마리에게 의사의 처방은 허무할 만큼 간단했다. 기적의 만병통치약까지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독일 종합병원 전문의의 처방이라기 보단 한국 할머니의 민간요법에 가깝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하여간 걱정했던 것보다 심각한 증상은 아니라니 한숨 돌렸다. 


주로 효과가 빠른 의약품을 처방하는 현대의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환자에게 접근하는 대체의학이 독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베를린의 가장 큰 종합병원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하긴, 동네 약국이나 슈퍼마켓에서 흔하게 보이는 일명’감기차’ 의 종류만 해도 코감기, 목감기, 기침감기 등등 여러 가지이며 증상별로 다른 허브를 섞어 차로 판매되고 있으니 일상생활에서도 이미 대체의학이 널리 소비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독일 소아과나 가정의학과에 대해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웬만한 증상에는 의약품을 처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아이가 고열로 시달리고 있어도 40도가 되지 않으면 그 흔한 해열제도 처방해 주지 않는다. 항생제나 주사? 이 곳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저 열이 내릴 때까지 젖은 수건으로 마사지를 해주고 물을 많이 주라는 것이 의사의 처방이다. 의사가 판단했을 때 위험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의 몸이 스스로 치유하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아이는 면역력을 기르고 불필요한 의약품의 사용도 방지할 수 있다. 물론 처음에는 의약품의 도움 없이 고통에 시달리는 아이가 걱정도 되고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힘들겠지만 결국 아이를 위한 것이기에 함께 버텨낸다.    


세계에서 항생제를 가장 많이 처방하는 나라 중의 하나가 한국이라는 기사를 최근에 접했다. 2018년 기준으로 한국의 항생제 사용량은 그리스 이탈리아의 뒤를 이어 OECD 회원국 3위이며 OECD 회원국 평균의 1.6배라고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항생제 사용량의 약 28% 정도가 부적절한 처방이라는 점이다. 빨리빨리 그리고 간편한 것에만 익숙해진 탓에 항생제를 (물론 제약회사의 리베이트 같은 어두운 현실도 커다란 이유겠지만.) 너무나 당연하고 쉽게 우리 몸에 허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다. 결국 항생제의 남용은 내성으로 인해 더욱 강력한 항생제를 필요로 하게 되고 우리 몸의 면역체계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현재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흔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종합병원을 방문한 뒤로 몇 달간 우리는 이도의 입 주변을 살피며 의사의 처방을 따랐다. 매일매일 진한 홍차 향이 이도에게서 풍겼다. 다행히도 이도는 홍차의 향을 싫어하지 않았고 벌겋게 부어오른 입 주변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또래의 아이들이 분신처럼 여기는 공갈젖꼭지를 물릴 수 없어 엄지 손가락을 빠는 버릇이 생겼다. 퉁퉁 불어 터진 엄지 손가락이 안쓰러워 보일 때마다 입에서 빼내어 닦아주었지만 그럴 때마다 이도는 보란 듯이 엄지 손가락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손가락에 크림 같은 것을 발라(실제로 손가락을 빠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바르는 크림이 독일에는 있다.) 빨지 못하게 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관두기로 한다. 손가락 빨기가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준다는 의견도 있었고 실제로 그런 효과가 있는 듯했다. 그저 보일 때마다 혹은 이도가 잠들었을 때 손가락을 빼내어 깨끗이 닦아주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이도의 입 주변은 깨끗해지기 시작했으며 손가락을 빠는 횟수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뭐든지 빠른 것에 익숙해져 있는 내게는 너무나도 답답하고 긴 시간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뻘겋게 부어오른 입 주변을 보곤 속상했는데 이젠 그런 걱정 없이 마음껏 사진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도 토마토소스처럼 산이 많이 함유된 음식을 먹고 나면 입 주변이 부어올랐지만 음식을 먹으며 스스로 입 주변을 닦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도 홍차를 마실 때면 가끔씩 이도의 피부 트러블이 절정에 달했던 때가 생각난다. 홍차의 향에 취해 지내던 그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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