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일, 그리고 벨기에 경계에서 - 1탄
핸드폰 알람은 요란하게 정글북 소리를 내며 6시 40분에 나의 아침을 깨운다. 오늘은 목요일. 아침부터 스산하게 비가 내리고 있다. 떡처럼 늘어진 몸을 겨우 침대 한켠에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침대 오른편에는 남편이 아직도 곤히 자고 있다. 거북이 보다 느리게 침대 매트리스에서 벗어나, 어두운 복도를 지나 샤워실로 가서 물을 튼다. 벨기에에서 마땅한 미용실을 찾지 못한 까닭에 하염 없이 기르고 있는 긴머리를 샴푸로 두어번 감고, 린스까지 했지만 여전히 머리결은 뻣뻣하다. 전동칫솔로 이를 닦는데 오른쪽 아랫니가 조금 시큰하다. 눈썹과 입술만 간단히 화장하고 말끔한 정장을 걸쳤다.
지난 3년동안 그런 것 처럼, 나는 8시가 되어 집을 또 나선다. 문밖을 나서니 온 세상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 처럼 고요하다. 지나가는 사람하나 없이 차분한 골목은 몽환적이고 신비롭기까지 하다. 곧 40분 후면 사무실에 앉아 분주하게 메일을 확인하고, 디자인을 만들고 있을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다. 부르릉 - 자동차 전조등의 불빛이 시린 골목을 따뜻하고 밝게 비춰 준다. 골목을 지나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어디 숨었다 나타났을지 모를 많은 자동차와 트럭들이 저마다의 머리를 들이 밀며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있다.출근시간 40분 - 이시간 동안 기억 뒷편에 잠시 잠들고 있전 과거의 시간들을 천천히 꺼내어 본다.
벨기에에 살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느냐는 것이다. 태어나 죽을때까지 자신이 태어난 도시와 고향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나도 가끔 나의 삶이 어쩌다가 벨기에에 돛을 내리게 되었을까 생각한다. 솔직히 벨기에는 나의 인생 계획에 없었다. 참,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글을 쓰는 지금은 벌써 벨기에 생활 4년 포함 총 유럽생활 7년 생활의 끝자락에 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엄마의 따뜻한 포옹, 독일에서 첫 직장 계약서를 받고 날아갈 것 처럼 기뻤던 순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따뜻한 기억들…과거의 중요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한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인생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고비들은 늘 의외의 순간에 다가왔다. 나는 그때마다 최선의 선택을 했고, 나의 결정을 믿고 따랐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벨기에에 살게 된 것이리라.
2017년은 한국에서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들어갔던 대학원의 졸업을 앞둔 해 였다. 나는 당시만 해도 나의 대학원 교환학생으로 왔던 독일인 크리스토프와 2년 넘게 교제하고 있었다. 대학원 졸업 후 남자친구와 롱디도 끝내고, 해외 경험도 할겸 가벼운 마음으로 독일로 향했다. 2017년 3월 말 독일에 도착 후, 그해 7월 나는 크리스토프에게 차였다. 2년 반의 연애가 4개월 짧은 동거 후 싱겁게 끝나버렸다. 일방적인 통보였다.어느 평온했던 저녁 그는 독일어로는 “Kein Schmetterling im Bauch”라고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 했다. 이 표현을 직역하자면 “배 속에 나비가 없다”는 뜻으로, 나비가 의미하는 것은 보통 사랑이나 설렘, 두근거림 같은 감정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표현은 “너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아, 설레지 않아”라는 의미 였다. 그리고는 우리의 연애 관계는 끝내지만, 내가 다른 거처를 살때까지 자신의 집에 머물러도 된다고 이야기 했다. 눈에서 눈물은 하염없이 떨어지고, 배는 쓰라렸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메슥거렸다. 이별 통보는 분노에서 자책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나는 발을 닿을 수 없는 공간에 떠다니며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했던 경험과 기억들이, 모래알처럼 나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예전에 읽었던 프란츠 카프카 <편지들>의 구절이 생각났다. “네가 내 곁을 떠나겠다고 말했을 때, 내 마음은 얼어붙은 듯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다만 눈앞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서 있었다. 너 없이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당시 독일어 어학원을 같이 다녔던 에콰도르 친구 릴리아나에게 내 사정을 설명하고 그 친구 집에 잠시 머물수 있는지를 물었다. 다행히도 릴리아나는 나의 딱한 사정을 이해해주었고, 자기 방에서 한동안 같이 살수 있게 해주었다. 그 친구네 집에 두달 머물면서 나는 쉐어 하우스를 찾아 다녔다. 릴리아나는 이혼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는 친구였다. 어찌된 일인지 아이는 에콰도르에 있고 본인은 독일에 와서 어학준비를 하며 새삶을 준비해 아이를 데려오고 싶다고 했다. 혼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릴리아나였기에 나를 아무 댓가 없이 자신의 소파에서 잘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겨우 독일에 온지 4개월, 앞으로 남은 어학비자로 독일에 있을수 있는 달은 고작 8개월. 나는 나를 위해 어떤 결심을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