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선택과 책임의 연속
우리 가족은 현재 7년째 독일 이민살이 중이다.
한국 회사를 다니다가 독일로 물 건너와 해외 살이에 지치고 긴장되고 힘든 시기가 있다 보니 '한국 주재원으로 발령 나면 완전 꿀이겠다' 싶었던 때가 있었다. 완벽하게 한국으로의 역이민도 아니기에 다시 독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과 한국어가 부족한 아이들을 한국 학교로 바로 보내지 않고, 회사돈으로 독일 교육과정을 따르는 서울독일학교(독일 국제학교)에 보낼 수 있다면 교육 문제도 별로 없어 보이고, 국제이사 및 월세나 주거지 비용도 회사에서 대줄 테고, 기타 등등의 장점들이 스쳐 지나갔더랬다. 어차피 한국 주재원으로 발령이 실제로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에 그냥 가볍게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한국 주재원으로 3년 다녀올 생각 있냐는데?
그러다 갑작스레 엊그제 남편이 "한국 주재원 3년 제안을 받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물어오는 것이 아닌가. 기대조차 안 했던 일이라 맨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와.. 진짜 로또 당첨된 것 같은 기회네?"였다. 폭풍우 같은 해외 적응을 위한 나날들이 어느덧 잦아들고, 이제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것 같은 다소 심심한 독일 살이에 한국 주재원 발령은 매우 신선하고, 행복한 고민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나는 남편의 한국 주재원 이야기에 진지하게 반대의견을 내었다. 처음 한국에서 독일행을 결정했을 때보다도 어쩌면 지금 이 결정은 더 무겁고, 신중해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인생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독일에 3년만 살아보자고 가볍게 떠나왔던 우리는 이제는 한국행을 쉽게 결정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 만약 독일에서 한국으로 가볍게(?) 떠난다면 그 결과는 우리의 예상처럼 가볍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그려볼 수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생각보다는 쉽게 한국 주재원이라는 달콤한 사탕에 쉽게 현혹되지는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잠시나마 복잡했던 나의 마음을 정리해 보고자 내가 남편의 한국 주재원 발령을 고사하길 원했던 이유를 기록해두려 한다.
1) 커리어
독일에서 한 직장에서 계속 머무르기보다는 보통은 이직을 통해서 연봉 협상을 하는 것이 승진이나 커리어상에 더 유리한 루트이긴 하다. 아니면 해외 주재원으로 나갔다가 경험과 실적을 쌓고 다시 돌아오면 승진 기회도 더 많다고 알고 있다. (물론 그 반대로 다시 돌아왔을 때 포지션이 애매해지는 경우도 있다.) 주재원을 요청한 부서는 한국 쪽이고, 독일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현재 독일 부서장으로서는 남편을 한국으로 보낼 이유가 없고, 팀에 이득이 될 것도 없는 상황이라 남편의 독일 커리어에도 도움될 케이스는 아니었다.
게다가 독일에서의 근무환경은 만족스러운 편이다. 코로나 이후로는 주 2회 정도만 회사에 나가고 거의 재택근무를 했고, 회사 통근 시간이 아우토반으로 차로 20분 내외, 아이들 학교는 1분 거리라서 삶의 질이 좋다. 심지어 한국에서 한 두 달 정도는 원격으로 근무할 수도 있다. (한 달 전에만 신청서를 쓰면 된다) 휴가 많은 것, 병가 쉽게 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출장도 거의 없다.
한편 한국에서 한국 업무만 하다 3년을 보내고 독일로 돌아오는 것은 남편에게 그리 득 될 것도 없다. 그래서 한국업무 외에 다른 중국, 일본 등 해외 업무 프로젝트를 함께 하다가 해외에서 좀 더 일하다 독일로 돌아오든 해외에 머물든 하는 루트를 짜야하는데 그것이 과연 정말 커리어에 도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불확실성에 미래를 맡기기에 현재도 승진교육도 받고, 잘하고 있고, 독일에서 그동안 하나씩 천천히 다져온 안락함을 포기할 만큼의 메리트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2) 사춘기 아이들
가족이 있고, 자식이 있다면 해외 발령에는 분명 가족의 희생이 따른다. 부모의 선택으로 세상에 태어나 빛을 보고, 어릴 때는 부모의 선택으로 인해 자라온 터를 벗어나 낯선 땅에서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적응을 해내야만 하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도 꼭 생각을 해봐야 한다. 성향과 기질, 환경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기회와 도전, 날개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것에 정답은 없기에 가족이 함께 결정을 해야 한다.
아이가 스스로 결정을 할 만큼 크지 않았던 어린아이 시절에는 결국 부모의 판단이 중요하다. 그 정도 어린 나이에는 사실 어느 나라에 살건 부모와 함께 한다면 아이들은 안정적으로 잘 적응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다. 특히 보통은 근무환경이 더 좋은 곳으로 이동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들에게는 부모와의 시간을 늘리고, 더 많은 관심과 사랑 속에서 유년기를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자녀가 학령기가 아닌 어린 나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짐을 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학령기 아이들과의 이동이다. 이 때는 이미 아이들이 친한 친구도 생기고, 모국의 문화와 언어에 적응이 완료된 때이다. 자아도 강해지고, 변화에 대해 거부감이 생길 수 있다. 물론 이때에도 아이들이 전부 다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에 부모가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아이들의 미래에도 좋을 것으로 판단이 되면 선택하고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말고, 충분히 경험해 보고 대화를 통해 결정하는 방식으로 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사춘기 시기 이상이라면 결정에 아이들의 의사를 더 많이 반영해야만 한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예민하고, 가장 중요한 자아 형성기로 이 때는 이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때 만약 부모가 독단적으로 결정을 해버린다면 아이는 상처를 받게 되고, 사랑받고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아이들이 지금 다니는 독일 학교에 적응이 잘 안 됐거나 학교를 떠나고 싶어 했다거나 한다면 나는 고민 없이 곧바로 독일 내 이사를 하든, 국제 이사를 하든 뭐라도 했을 것이다. 국제학교에서 독일 학교로 전학을 할 때도 3년 동안 고민을 했고,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때 아이들은 전학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12년을 국제학교에 보낼 계획을 했고, 독일에 집도 샀던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3년 즈음 후에 국제학교 특성상 친구들이 자주 들락날락거리고, 많은 친구들이 독일학교로 전학을 하면서 아이들도 독일 학교로 가보겠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 시기에 힘겹게 독일학교에 적응해서 지금 학교에 잘 다니고 있고,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학교 전학을 원하지 않는다. 사실 아이가 영재로 판정이 나고, 근처 영재 학급이 운영되는 학교로의 전학도 권유받았는데, 아이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서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고 지금 학교에서 잘 다니고 있다. 한국 주재원에 대해서도 물었을 때 아이는 단호하게 전학이 싫다고 의사를 밝혔고, 나는 그 의견을 존중해주고 싶다.
3) 시민권, 영주권 문제
남편은 독일 영주권을, 나는 EU 영주권을 받은 상태이다. 내가 EU 영주권을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도, 독일 영주권에 비해 부득이하게 해외에 거주해서 장기적으로 독일에서 체류할 수 없을 경우 영주권 자격이 박탈되는 기한이 더 길었기 때문이다. EU 영주권은 EU 국가는 6년까지, EU 외 국가는 1년까지 해외 체류해도 자격이 박탈되지가 않는다. 그러나 독일 영주권은 그 기한이 6개월 정도로 알고 있다. 물론 독일 회사에서 해외 주재원으로 발령을 내서 해외에 머물게 될 경우는 특수한 경우이기 때문에 외국인청에 미리 승인을 받아두면 영주권 유지에는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예측이 된다. 하지만 독일은 워낙 케바케의 나라이고 외국인청마다 그것을 허락해 줄지, 허락해 준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처리가 될 지도 믿음이 잘 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지역 외국인청은 워낙 악명 높기로 유명해서 더 그렇다. 나도 영주권 받기까지 처리 기간이 1년이 넘게 걸렸으니.
지금 남편과 나는 독일 시민권을 받지 않고, 영주권만 유지 중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한국어나 한국 문화가 이제 많이 소원해졌기 때문에 한국대학을 가거나 한국에서 직업을 가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독일 시민권을 받을 예정이다. 부모가 독일 시민권자가 아니고 영주권만 소유하고 있을 경우, 일반적으로 자녀의 경우 만 16세 이후에 독일 거주 8년 정도, 독일 학교에 진학해서 독일어가 충분한 경우 등등의 전제조건에 따라 시민권을 준다. 만약 우리가 한국 주재원으로 나가서 한국에서 거주할 경우에 외국인청에서 그 기간을 문제 삼을 경우, 자칫하면 시민권 처리가 늦어지거나 못 받게 될 수도 있다. 지금 현재 아이들의 경우에는 부모가 영주권이 있음에도 우리 지역 외국인청은 아이들 영주권은 만 16세 이후에 신청하면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아이들은 거주 비자로 독일에 거주 중인 상황이다. 또한 시민권 신청 후에 1년 반 후에나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며, 미리 기한을 넉넉하게 두고 신청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도 받은 상태라서 더더욱 함부로 해외로 나가는 것을 쉽게 선택할 수가 없었다.
우리 같은 영주권만 있는 부모의 경우 미성년자 아이들 시민권을 빠르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주권자 부모 중 한 명이 시민권을 신청하면서 동시에 자녀들의 시민권도 같이 체크해서 신청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아이의 나이에 상관없이 곧바로 부모의 시민권과 함께 아이도 시민권을 받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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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삶의 질 문제
독일 본사와는 달리 한국의 해외 법인 회사의 경우에는 한국적으로 야근이나 회식도 꽤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 분위기를 제외하고서라도 일단 회사의 위치가 수도권 외곽이고, 독일학교는 서울에 있다 보니 출퇴근 시간이 최소 1시간 이상은 걸리는 데다가 출퇴근 교통지옥 및 왕복으로 치면 하루에 많은 시간을 길거리에서 소비를 해야 한다. 독일에서 유년기를 아빠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거의 아빠가 집에서 일하는 것이 익숙해진 상황, 학교도 1km 거리 내에 있어서 더더욱이나 삶의 질이 좋은 지금의 독일 생활을 접고, 갑자기 한국으로 가서 가족이 오히려 함께할 시간이 적어진다면 과연 우리가 행복할까.
5) 방과 후 활동 및 교우관계
아이들이 한국에서 한국 먹거리, 문화,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최대의 장점은 있으나 생각보다 아직은 한국어가 부족해서 한국의 방과 후 활동을 하는 것에 제약이 많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의 경우에는 독일에서도 국제학교에 3년을 다녀 영어만 배웠고, 지금도 가정에서 1 언어가 영어로 아이들끼리는 대화를 하는 형국에, 독일어 노출을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방과 후 활동 등 외부 활동을 통해서도 늘려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독일학교 내에서만 독일어 노출이 있을 것이고, 학교 학급이 작아서 학년 당 한 학급에, 고학년으로 갈수록 인원수도 적어지는데 독일어 학습에 최적의 환경은 될 수가 없다. 이제 본격적으로 독일어 고급 단계로 접어드는 중요한 시기에 독일어 책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독일 문화와 언어 등을 학교에만 의존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 우리 입장에서 좋은 선택이 아니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방과 후 활동들이 무료나 매우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데, 한국에서는 비싼 사교육이 대부분이고, 한국어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리 아이들에게는 선택의 폭도 좁아질 가능성이 더 많다.
교우관계 또한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독일에서 학년 당 한 학급만 운영되는 국제학교에 보내보아서 잘 안다. 학생수가 적기 때문에 가족 같은 분위기일 수도 있으나 맞는 친구를 찾을 수 있는 범위가 적고, 주재원 자녀들이 많다 보니 본국으로 돌아가는 케이스가 많아 친구 관계가 꾸준히 유지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독일어를 사용하는 친구들이 편할 테니 국제학교라는 큰 섬 안에서만 관계를 이어나갈 확률도 높다. 내가 독일로 이민 와서 국제학교에 보냈을 때 처음에 아이들이 독일어를 못하니 외부 활동에 제약이 많고, 국제 학교 내에서 국제학교 친구들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것이 넓은 세상을 보러 해외에 나와서 더 좁은 시야만 갖는 기분을 느꼈었기에 그 부분도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여러 이유로 한국 주재원 옵션은 정중히 고사를 했다. 아마도 한국의 해당 부서 업무를 돕기 위해 한국에 장기 출장으로 자주 나가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 것 같다. 한국 출장이라면 우리 입장에서는 매우 좋은 대안이다. 남편이 한국 가족들도 만나고, 한국 음식도 먹고, 힐링도 하고 돌아오면 독일에서도 더 힘내서 지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남편이 출장 가 있는 동안 나는 독박 육아를 해야 하지만 그 정도는 남편을 위해 기꺼이 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가족이 힘들지만, 그래도 독일에서 꾸역꾸역 잘 적응하면서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고, 이 정도면 잘 지내고 있는가 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냉큼 잡지 않고 이런저런 가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 자체가 그러한 것 같다. 어디서든 가족이 함께하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찾으면서, 마음 편안하게 있는 곳이 집이고,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정답은 없어. 다 선택이야. 우리가 잘 해야하는 거는 선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선택을 옳게 만드는 노력이야. 그리고 그 노력을 다 했다면 후회하지 않고 또 다른 선택을 하면 돼. 선택과 책임이 반복되는 거, 그게 인생 아닐까? -<굿 파트너>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