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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사르 바에흐를 만난 날


    

세사르 바에흐의 시집을 읽는다

페루의 광산촌에서

산티아고 데 추코에서 혼혈로 태어나

1915년 대학을 졸업하고

1919년 시집 ‘검은 전령’을 발표한

.....    


나의 어휘는 모두 사망한 것인가

노쇠해진 나의 뇌는

그의 표현에 감탄하지만

감탄의 순간

그의 언어를 망각한다

다시 반복해 보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페루의 시인, 그의 이름

세사르 바에흐

조금 일찍 그를 만났더라면

난 그의 시를 송두리째 삼켰을 거다


읽는 순간 그의 언어는 

나의 언어가 되어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갈등과 

표절을 거부하는 내가

어쩔 수 없는 표절에 

한동안 절필을 선언했을 거다    


나의 어휘 나의 문학적

달콤한, 쓰디 쓴, 고통스러운

그러한 모든 것들이 사라진 것처럼

나는 지금 달콤하지도

몹시 쓰지도 고통스럽지도 않다


나의 언어는 

나이 든 사람의 냄새를 풍기며

더 이상 신선하지 않고

느리고 조심스럽다


실수하지 않으려는 듯

지적받지 않으려는 듯

완벽한 문장을 꿈꾼다

그러다 잃어버린 수많은 어휘들    


몰래 아주 몰래

나는 그의 언어를 

도둑질하고 싶어진다


언제였던가

좁은 흙길을 걸어 

나무 문 하나 밀고 들어가면

모딜리아니 그림같은 

목이 긴 여인이

나를 반기던 곳

그곳에서 샘 솟듯

솟아나던 언어들  

  

배부른 내가 마침내

진통 속에서 산모가 되어

언어를 깎고 다듬던 그 곳

그날의 언어를 다시 찾고 싶어진다.


세상의 모든 언어가 나를 떠났고

남아있던 순수의 어휘마저 

모두 죽었다고 의문하는 이 순간

나는 세사르 바에흐를 만난다

그의 숨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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