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더의 삶

우울증이 미치는 영향

by 보라구름

책을 항상 끼고 살았던 때가 아득할 정도로 도통 독서를 하지 못하며 지내온 지 오래다. 책을 읽더라도 발췌독을 하거나 아니면 스토리가 몰입감이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휘몰아쳐 읽는 경우는 그래도 더러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최근 1권의 책을 완독하고 2번째 책을 읽고 있다.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리단 지음, 반비 펴냄. 오랫동안 앓아온 정신질환을 아픔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치료를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온 작가의 진솔한 경험담과 여러 가지 정보들이 들어 있어 혼자 읽기 아까울 정도로 귀한 콘텐츠다.


4장 고양이처럼: 우울증 환자가 삶을 운영하려면, 에 나온 내용 중 나를 확 낚아 채는 글귀가 있다.


중증 우울증 환자들의 공간은 호딩의 공간이 되기 쉬우며, 또 그렇게 산 물건은(불필요한 소비를 했다는 패배감이 느껴지므로) 쳐다보기도 싫고 처분하기도 귀찮아하기 때문에 언제나 짐짝처럼 취급됩니다.


하, 그렇다. 이미 너무도 오래되어버린 이야기다. 화장품, 가방, 책, 마스크, 옷, 문구류, 생활용품(화장지, 여성용품, 세제)등이 넉넉하다 못해 차고도 넘치고 많아서 어떤 집에서 살건 상관없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창고를 넘어서 그냥 호딩의 공간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게.


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택배 상자가 켜켜이 쌓일 만큼 폭주하는 주문을 해대는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정말 필요한 게 아닌데 기분이 나아진다는 착각으로(혹은 그거라도 해야 살 것 같아서) 이것 저것 주문하는 굴레에서는 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가지 긍정적인 사인은 누구도 시키지 않았음에도 최근 3주에 걸쳐 집에 쌓여 있는 책을 매주 두 박스씩 중고서점에 팔고 있고, 옷과 가방, 화장품도 한바탕 정리를 해서(일단 시작했다는 것에 의의를) 끔찍한 수준은 조금 벗어났다는 것이다.


물건을 사는 나, 쌓아두는 나, 정리하지 못하는 나, 다시 또 사는 나, 엉망이 되어가는 집안, 그걸 매일 보며 견디는 나.. 그런 나. 와 내가... 화해하지 못하고 계속 으르렁대는 삶에 나 자신은 얼마나 절망적이고 괴로웠는지 모른다.


사치와 낭비벽인 건가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 중증 우울증이었던 거다. 하지만 이젠 그걸로 충격받거나 울지 않는다. 또 다른 긍정적인 사인이다. 이제는 그 모든 게 나라는 걸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엉망인 집 상태를 그대로 보고, 조금이라도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주변에 누가, 뭔가 자꾸만 소비하면서 정신적 허기와 우울을 채우려고 한다면 금전적 개념이 없다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저 사람 우울증인 건가? 하고 살펴봐 준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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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우울증 회복을 위한 활동 지침, 에도 남기고 싶은 글귀가 하나 더 있다.


어떤 우울증 환자는 옷을 정리하기 위해 전부 꺼내놓았지만 옷은 대충 밀고 그 위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옷을 다시 개어 넣는 행위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6개월 후 우울 증상이 좀 나아지자 비로소 옷들을 다시 옷장에 넣었고 방은 깨끗해졌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정리를 했다는 성취감보다는 지난 시간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꼈다.


아, 정말 지금 내 침대 한 구석에 옷 정리하다가 꺼내 둔 옷들이 마구 엎어 놓은 채로 그대로 처박혀 있다는 걸 보고 쓴 글 같다. 이게 나만 이상한 게 아니라 이런 게 병에 따른 행동이라는 게 더 놀라웠다. 정리를 시작하긴 했고, 상당 부분 한 건 맞지만 완성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옷들이 방치되어 망가지고 있다.


언젠가 다시 상태가 좋아지면 옷들을 치우겠지. 그때가 오면 자괴감 대신에 와, 그래도 내가 이걸 결국 해냈구나 하는 성취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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