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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Mar 19. 2024

김창옥 쇼를 보면서 깨달았다.

어른이 어른을 위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뉴스만 틀면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들리고, 결혼을 안 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날마다 나오지만 김창옥 쇼를 들으면서 문득 생각은 '그러면 기혼자들이 결혼에 대해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사는 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결혼은 쉬운가?' 대답은 아닐 것이다. 결코 쉽지 않다. 어렵다. 실패할 확률이 생각보다 높다. 쇼에 출연한 가족관계에 대한 어려운 질문들을 듣다 보면, 결혼이나 출산 자체가 어떤 인생에 해결점이나 답이 아니다. 인구 명을 늘렸다고 나라에서는 감사할지는 모르겠으나, 그에 비하면 개인이 감당하고 살아야 하는 가족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는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라는 사람도 복잡한데  우리 가족이 가진 복잡한 가족역사에 결혼을 하면서 또 다른 남편과 아내의 가족역사를 더하고, 더불어 아이와 남편과의 새로운 가족사를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가족에게 한 번 생긴 문제는 생각보다 잘 사라지지 않아서 그 문제가 결혼으로 또 배우자에게 이어지고 아이와 맞물려서, 다들 그 짐을 몇 개씩 안고 사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어려운 것은 육아도 어렵지만 친어머니 보다 어려운 존재인 남편, 아내의 부모님과 가족들과 함께 소통하는 것은 젊은 세대에게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참고살자니 답이 없다.

사실 우리도 알고 있다. 내가 자란 집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 나와 남편은 다르게 자랐다는 것. 배우자의 가족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 처음부터 달랐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것. 그러나 그것을 서로에게 어떻게 전달하고 이해할 것인가에 결국 결혼의 해법이 달려있다. 서로 치열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처음부터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이었건만,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것은 배우자이지 배우자의 가족이 아니었건 간 인생에서 완전히 물리고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함부로 관여하고 조언도 할 수 없는 그런 관계. 이것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어쩐지 머리로는 이해해도 배우자의 가족에게 까지 완벽하게 잘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두 번 명절에 가든, 혹은 주말마다 처가나 시댁에 들르건 횟수에 상관없이 가기 전엔 뭔가 심박수부터 올라가고 돌아오면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보편적이다.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며느리가 자주 연락을 안 한다고 느끼실 수 있지만, 사실 며느리나 사위는 자주 연락하면 어색한 존재인 것이 당연하다. 전화기를 드는 것 자체가 어딘가 부자연스러우니. 처음부터 거리가 있는 존재고 거리가 있게 사는 것이 서로에게 상처를 안주는 그런 관계가 맞는 것이다. 그러니 잔소리에는 유연하게 넘어가는 수밖에...

다만 이런 것을 다 생각하더라도 한 가지 유념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아이에게 관여하는 것과는 또 다르게 어른이 된 사람들끼리 서로의 고통을 어떻게 지켜볼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병과 노년기, 경제적 문제, 죽음 이런 것들을, 우리는 다 같이 겪으면서 살아간다.

이럴 때 내가 누군가의 옆에 어떻게 함께 해줄 있을까. 지인이나 친구한테 이야기를 들어도 힘든 이야기를 결혼관계로 맺어진 부모가 겪고 있다면, 고통과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에게 딱히 짜증을 수도 그렇다고 크게 도와줄 없는 안타까움.

나는 김창옥 쇼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 적어도 어른을 위로하는 다른 어른의 방법은 그냥 들어주는 것. 그리고 지켜보고 같이 있어주는 것. 그것뿐이라는 것을. 경제적으로 도와줄 있다면 정말 은혜겠지만, 본질에서는 물질적인 것도 후순위이다.

만약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내 부모나, 혹은 배우자의 부모나 가족이라면 무엇을 딱히 하려고 너무 애쓰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고통은 그 자체로 인정하고 두고 보는 것이다. 내가 그 부모, 어르신의 세계에 잠시 같이 머무르면서 있어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어머니나 아버지라는 사람의 세계를 같이 봐주고 사람의 인생 자체를 자체로 인정하면서 지켜보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어릴 우리가 그분들의 노력으로 이렇게 성장했지만 우리는 어떻게도 부모의 마음을 알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미워하거나 너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함께 해주는 것. 그것만이 답이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어차피 원래부터 멀었던 누군가 하는 너무 많은 말도, 위로도, 오버를 섞은 표현들도 결국 관계를 진전시키거나 회복시킬 수 없다. 마음으로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것이니,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으로 있는 일은 거기까지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도 상대방은 안다. 내가 자기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그래서 횟수를 정해서라도 자꾸 들러주고 안부를  물어야겠다 생각했다. 어떤 관계차원을 넘어, 개인적인 감사의 의미로 생각하면서. 내 남편을 잘 키워줘서. 우리를 여기까지 살게해줘서. 그것만 생각하려 한다. 점점 아이처럼 되어가는 어른들이 보호받고 살아야 할 만큼 약해졌다는 것. 그럴때 혼자가 아니라고 일깨워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성숙해 가며 그리고 나도 내 아이의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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