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이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세계가 있었다. 단지 인간 세계와 요정들의 세계인 무어스만 나누어져 있을 뿐. 한때는 인간과 요정이 친구로 지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인간의 배신으로 서로의 신뢰는 깨졌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유명한 동화의 시작에는 사실 우리가 알지 못한 반전 배경이 있음을 알린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주연이 아닌 마녀가 주인공인 영화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속 사악한 마녀를 뒤집어서 말레피센트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어쩌면 이전부터 디즈니가 추구해왔던 ‘프린세스’의 새로운 해석은 좀 익숙한 편, 이번에는 마녀 캐릭터를 바꿔서 생각해보도록 한다. 마녀는 원래부터 마녀였을까? 만들어진 것인가? 타고난 것인가?
말레피센트는 디즈니가 제작한 2014년 다크 판타지 영화로, 앤젤리나 졸리의 카리스마 넘치는 액션으로 유명하다. 실사 영화인 말레피센트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녀가 아니면 표현이 안되었을 독보적이다. 2편은
2019년에 나왔다.
큰 뿔과 붉은 입술 하얀 얼굴, 깎아지는 듯한 광대뼈와 번뜩이는 눈동자 그리고 검은 날개. 그녀는 그 자체로 그냥 블랙이다.
그녀는 어디로 보나 악마의 상징과 닮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외면이었다.
그녀의 종족은 원래부터 그런 모습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내면이 처음부터 차가운 것은 아니었으니, 그것은 처음으로 만났던 인간 친구 스테판의 배신으로부터 시작된 것. 스테판은 요정의 영지에 보석을 훔치러 왔다가 말레피센트와 친해졌고, 그 후로 연인관계로 발전하지만 어른이 된 후, 권력을 얻기 위해 말레피센트의 날개를 빼앗는다. 인간 세계의 입장에서는 모르는 것은 위험한 것이고, 위험한 것은 나쁜 것이기에 당연히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건 요정 세계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던 이 두 세계.
그리하여, 우리가 잘 아는 핑크 공주 오로라의 탄생에 불청객으로 찾아온 그녀는 옛 연인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 있었던 것. 그녀는 오로라에게 16살이 되면 쇠 바늘에 찔려 영원한 잠이 들것이라고 저주를 내리는데, 저주를 푸는 방법은 단 하나다. 진정한 사랑의 입맞춤. 그녀가 이러한 저주를 내린 이유는 이미 쓴 맛을 본 그녀가 ‘진정한 사랑이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정반합
개인적인 분노와 종족을 지키겠다는 의지는 복합되어 복수를 불러왔고, 가장 큰 피해자는 오로라다. 아이는 요정들이 데려와 거의 숲에 방치되다시피 버려진다. 공주라는 이름이 아까울 만큼 아무도 돌보지 않는 오로라를 말레피센트는 안타까운 눈길로 쳐다본다. ‘저러다가 애가 굶어 죽겠어’
그렇게 오로라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위험상황에서 그녀를 지켜준다. 그리하여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말레피센트의 뿔을 만지고 자란 아이는, 그 모습이 위험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요정’의 모습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두 세계의 불화는 한 어린아이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그녀는 자신의 세계가 아닌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다시 자기 세계로 돌아가야 할 불행한 운명이었다. 더욱이 돌아간 자기 세계는 곳 죽음이나 다름없는 잠의 세계다.
이를 지켜보는 말레피센트의 내면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자신이 저주를 내렸기 때문에 애초에 사랑할 필요가 없었던 아이였다.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두 번 도와주다 보니 자꾸만 정이 든다. 왠지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리하여 저주를 풀어주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으로 돌아간 오로라를 다시 찾아서 저주를 막고자 한다. 그러나 저주는 그대로 실현되었다. 오로라는 잠들어버린다.
말레피센트는 그녀를 다시 살리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동원된 풋내기 왕자도 있었지만 (무슨 풍선 인형도 아니고. 그냥 공중에 띄워서 끌고 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왕자가 방 바깥으로 던져진 후, 그녀는 잠든 오로라를 향해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 미안했다고. 그리고 깨닫는다. 진정한 사랑의 열쇠는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모든 이를 위하여
사실 따지고 보면 오로라에게 자신을 낳아준 부모는 ‘선’ 이어야 했다. 자신을 지키고 보호해주는 존재여야 했다. 하지만 낳아준 부모는 처음에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 그리고 딸로 하여금 아버지의 원수를 돕게 만든다. 말레피센트는 처음에는 ‘악’이었지만, 오로라를 키운 존재이며, 다시 부활시킨 존재였기에 ‘선’한 존재로 탈바꿈한다. 이렇듯 영화에서 선과 악을 보는 시선은 보다 복합적이고 다면적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애초에 악을 저질렀더라도 끝까지 책임을 지는 존재만이 ‘성장’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화의 형식을 빌리긴 했지만, 서사의 방식은 어른들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의 눈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오로라는 비록 자신을 구하긴 했지만, 애초에 자신에게 저주를 내린 대모를 용서해야 할까?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고는 하지만 인간세상과 차단시키고 전쟁을 벌인 아버지를 이해해야 할까?
오로라의 아버지인 스테판 왕이 불행한 진짜 이유는 그가 자신을 용서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맨 처음 말레피센트를 배신했을 때, 아마도 그렇게 연인을 팔아서라도 자신의 신변을 보호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처지를 비관했을 것이다.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자신에게도 뜻밖의 왕 자리가 찾아왔고 자신은 권력의 중심에 섰다. (스테판은 용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관계를 속였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둘의 관계를 모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대상을 증오하면서 자기 자신도 버렸다. 원래도 별 볼 일 없었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자존감이 낮아진 건 왕좌에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또 연이어 찾아온 불행에 그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되돌리고 감추고 복수하려 하지만, 한 번도 온전히 자기를 수용해 온 적이 없는 그는 타인을 수용할 줄도 모른다. 그는 그냥 미쳐갔다. 용서받지 못하고 죽는다.
겨울왕국이라면..
나는 이 과정에서 조금은 비슷하지만 다른 맥락의 드라마인 <겨울왕국>을 떠올려본다.
엘사의 아버지는 엘사가 마력을 갖고 태어났고 성장하면서 자신의 마력을 조절하는 것을 힘들어하자 장갑을 주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말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완전한 해결책이 나오고, 엘사가 성장해서 자신의 힘을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 성문을 모두 걸어 잠근다. 둘째 딸의 기억은 모두 지워진 상태다.
나는 처음에 <겨울왕국>을 봤을 때, 만약 저것이 현실의 드라마라면 어떨까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아이가 태생부터 남과 다른 능력 혹은 장애가 있었다고 가정하고 그걸로 인해 사고가 있었다. 그리고 부모는 없었던 일처럼 살아가라고 큰아이와 작은 아이 둘 모두에게 주문한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부모는 중간에 사고로 죽고 아이들은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는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 그 부모는 좋은 부모인가? (겨울왕국 2에서는 1보다는 부모에 대한 책임과 비중을 늘려 그런 부분을 모두 이해하도록 한다만)
<말레피센트>의 오로라의 부모는 <겨울왕국> 보다 문제가 더 많은 편이지만, 이 두 부모는 공통적으로 보호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세상과 차단시킨다. 그러나 일시적인 이 차단은 결국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세상과의 절연은 부모와 아이 가족뿐 아니라 왕국 전체의 침체를 불러일으켰다.
왕국을 다 가질 만큼의 부와 권력을 가진 그들이지만, 자기 자신 더 나아가 세상과 화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아들과 딸들도 제대로 된 능력을 갖춘 진정한 후계자로 성장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엘사처럼 후퇴하거나 오로라처럼 무방비로 자신의 운명에 당할 수도 있다.
말레피센트는 외부자의 역할이지만, 가장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존재로서 이 모든 문제를 조정해 이상적인 엔딩의 결말에 이끄는 존재이다. 그녀가 가진 상징적인 악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사실 1편에서는 그녀 혼자 시 작해서 혼자 끝나는 면이 없지 않아서 (그녀에게 대적할 만한.. 뭐가 없다는 것도 사실) 내면도 완벽하고, 똑똑하고 매력적이고, 거기다가 모성과 책임감마저 보여주어서 좀 아쉬운 면도 있었다. 2편은 1편의 단점을 보강해 말레피센트에 대적하는 또 한 명의 악녀가 등장해, 재미를 높인다. (그래 봐야 말레피센트에는 약하지만)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에게 인상 깊었던 장면은, 가장 순수하면서 아름다운 존재인 핑크공주인 오로라의 옆에서 나란히 들어오는 블랙의 말레피센트다. 두 캐릭터의 극명한 대조, 그리고 색채, 그리고 반전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내면에 두 가지 인격을 지닌 크루엘라를 보았을 때보다도 더. 그런 면에서 디즈니가 디즈니만 할 수 있는 특수한 작품과 세계관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동화가 아이들 이야기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어른들까지도 포섭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다.
피와 폭력과 성에 대한 내용 없이도 다크 판타지의 세계를 그려내는 높은 상상력에 한 표.
또 하나 코로나로 인해 더 이상 자유롭게 나갈 수 없게 된 모든 아이들을 위로하며, 이 글을 마친다. 어른들이 조금 더 자유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많이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그들에게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