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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Dec 08. 2023

라이벌 혹은 적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은 결국 나

적인가 동지인가 그게 문제


열 살 된 딸아이가 나에게 와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학원 가는 길에 같은 반 남자 친구가 목을 세게 때렸다고 말이다. 누가 그랬냐고 물어보니 00이라는데 사실 그 친구는 나도 잘 아는 아이였다. 유치원 시절부터 4년 넘게 한 동네에서 보아온 사이이니(애들에게 4년이란 어른의 10년에 맞먹는 수준) 말이다. 최근에는 그 아이가 부쩍 자기를 귀찮게 구는데 모둠에서도 자기가 말하면 말을 안 듣는다고 훼방 놓기가 일쑤라고 했다. 일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둘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서로를 웬만큼 잘 아는 사이이니 단순히 때리고만 싶어서 그런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친밀감(?)의 표시라기엔 목을 때리는 게 일반적인가? 그건 의심스러웠다. 남편은 그 남자애가 관심 있는 거 아냐?라고 되물었는데 나는 알 수 없었다. 선생님께 이야기할까도 했지만 그만두었다. 딸 말만 들어서는 어른이 개입하는 목적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딸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걔가 너한테 미안하다 했어? 어 하긴 했는데..  형식적으로 '미안해'하더라고. 그리고 나니 요샌 좀 조용해졌어. 딸도 솔직히 그 애의 속을 모르고. 나도 딸의 속을 잘 모르니. 그 문제는 그렇게 잠잠해졌다.


앤과 길버트의 관계도 그 실체가 드러날 때까지는 적인지 라이벌인지 서로 호감이 있는 편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모든 게 섞여 있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앤이 처음 길버트와 교실에 싸웠을 때는 적이었지만 화해로

까진 이어지지 못했다


관계는 오랫동안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로 남아있었다. 앤은 처음으로 갖게 된 그 편견 이후로 마음을 조금도 열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아무리 길버트를 칭찬해도 길버트가 사과의 뜻을 몇 번이나 전해도 마찬가지였다. 앤은 애초에 길버트를 자기의식 밖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그래도 길버트의 존재는 항상 앤 옆에 있었다. 길버트에 대해 아마도 한 번쯤은 자기 스스로 되짚어 봤으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앤은 레이철 린드 부인은 용서를 해도 길버트는 용서를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앤의 이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끝까지 마음에 두는 사람의 행동에는 사실 의도적으로 마음속으로 내보려 하지 않는 의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헤어질 결심을 하듯이) 그건 마음속에 두고 조금씩 맛보는 복수의 맛이든 혹은 자기 합리화의 맛이든 상대방에게 절대로 열어주지 않음으로 '즐거움'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앤은 나쁜 의도를 가진 아이는 아니었으나 본인의 마음에도 양면성이 있다는 걸 알만큼 성장한 편은 아니었다. 자기와 부딪혔던 어른 같은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든 풀어야만 본인 스스로가 편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같은 나이의 길버트 같은 경우엔 강제성이 없으니 오히려 그 미움을 오랫동안 묻어두었다. 같은 나이의 친구에게는 비교적 동등한 권력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고 조시 파이 같은 여자아이들과

어울리는 길버트가 보기 싫어서 일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항상 길버트가마음에 걸렸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앤이 자신 스스로 어느 정도 한계를 그리고 연애라든가 결혼에 대한 현실적인 계획을 안 하려고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고아로 자란 앤에게는 '이성 친구'란 너무 먼 이상이었고 그린 게이블즈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꿈꿔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사실은 자신도 여성으로 성숙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어린 시절의 안정적인 상태로 계속 남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앤도 인정해야 하듯이 그녀도 어른이 되어가고 매슈와 마릴라도 늙어가고 길버트도 철부지에서 점점 성인 남자로 성숙해 간다. 길버트가 언제까지나 장난꾸러기 남자애가 아니라는 걸 알았더라면 앤도 조금은 너그러워졌을 텐데 앤은 지지 않고  자신의 자존심을 끝까지 사수하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공부의 동기에 긍정적인 동기보다 상대방에 대한 불타는 경쟁심이 오히려 더 큰 에너지로 작용한다는 걸. 앤은 알고 있었을까. 그렇기에 대립의 진공 속 관계에도 그 둘은 항상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던 것이다. 어쩌면 다이애나가 절친으로서 앤을 지켜주었지만 어느 정도까지 밖엔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반면, 길버트는 그보다 더 넓은 지식의 세상과 대학이라는 길을 같이 가주는 좀 더 든든한 버팀목으로 역할을 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로맨스 영화에서 흔한 것이 평범한 여자와 특별한 남자와의 만남이라는 소재이지만, 이 소재가 앤과 길버트의 관계라고 단순하게 적용시키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앤과 길버트의 관계는 차곡차곡

쌓여온 것에 가깝다. 10년 넘게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동네친구의 미움과 우정이 변주되는 과정에 가깝다. 길버트가 앤셜리를 선택한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한때는 동네에서 제일 잘 나갔던 길버트와 고아였던 앤이 어느 쪽이 더 우월했느냐 따지는 건 이미 성년이 된 후에는 크게 의미가 없어졌다.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여러 의미

이상의 것이니 말이다. 그만큼 둘은 마을에서  잘 성장한 두 청년이 되어 마을의 미래를 그려나간다. 그래서 관계의 첫 시작도 중요하지만 어느 지점으로 끝을 향해 가느냐도 중요하다는 것.


앤은 비록 밖에서 싹을 틔우고 프린스에드워드의 땅에 옮겨진 사과나무 같은 존재이긴 했지만 탄생보다 더 값진 성장과정의 기쁨을 이 섬에서 자라고 배운 존재이다. 그리고 그녀가 맺은 수많은 인간관계의 한 줄기는 길버트와의 관계였고 가장 값지고 소중한 사랑으로 커가는 것 역시 그녀 인생의 일부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주로 아는 것은 앤의 어린 시절 이야기지만 두 권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소설이 한 여성의 삶을 전체를 다룬 이야기임을 알게 되고, 그 맥락에서 에피소드들이 하나하나 수놓아져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앤의 이야기가 더욱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초록지붕 집 앤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이 항상 나 자신이라는 것.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선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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