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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Nov 03. 2023

11살 인생 처음만난 신뢰, 그리고 컴플렉스

- 끊어진 관계와 신뢰를 다시 잇는 '믿음'의 시작

에필로그


이 책을 처음 읽은 초등학생 시절로부터 무려 30년이 지났다. 애니메이션도 잠깐 봤던 것 같은데 주로 내가 읽은 건 책이었다. 학교 도서관에는 앤의 어린 시절을 다룬 책도 있었지만, 어른이 되고 난 후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학부모 교사를 위한 코너에 있는 그 책을 구경만 할 뿐 읽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제 어른이 되어 다시 앤 셜리의 인생을 다시 펼쳐본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 이야기 말고도 그때는 보지 못했던 여러 부분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마릴라 아줌마의 이야기도 눈에 들어오고 그녀가 가졌을 어려움과 고민도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이 장발장만이 아니듯 에이번리라는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앤을 중심으로 앤의 시각에서 그린 것이라는 것. 지역에 어느 순간 부족해진 젊은이들 늙어가는 노인들 간의  세대 갈등.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고민하는 작가의 시각이 눈에 보였다. 이 아름다운 마을. 잊히기 아까운 마을을 어떻게 하면 계속 지킬 수 있을까.  여성- 아이- 가족- 지역사회로 이어지는 고리를 중심으로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되짚어보게 된다.


1908년 초판본 표지 디자인


11살과 60살의 첫 만남


11살이라는 나이는 신기한 나이다. 유아기가 완전히 지나고 10대에 들어간 첫해이기도 하거니와 말도 많고 세상일에 대해 호기심도 가장 높은 나이. 세상이 무섭긴 하지만 왠지 한 발은 내디뎌보고 싶다가 책에 빠지면 한편으로 무섭게 지식의 세계로 빠지기도 하는 나이. 여러모로 푸릇푸릇하지만 어떨 때는 영리해 보이고 어떨 때는 한 없이 어설퍼 보이는 나이기도 하니까. 앤 셜리는 이렇듯 한창 피어나는 시기에 그리고 벚꽃이 피어나는 봄에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도착한다. 어두운 과거를 다 접고 새로운 인생을 기다리는 그날. 처음으로 초록 지붕 집으로 오는 길에 대한 묘사는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에 속한다. 앤의 과거가 어땠든 사실은 착오로 오게 된 것이든 아름다운 꽃길은 그 자체로 그녀를 환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앤은 말 그대로 이곳에 반해버린다. 이 소설의 배경이 주인공만큼이나 한 몫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행복한 날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과 비교해 역설적으로 앤은 자신의 미약함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름다움을 보는 그녀의 훌륭한 시각과 너무나 다른 자신의 콤플렉스인 외모.


반면 매튜는 60살이라는 나이가 될 때까지 장가도 못 가본 숙맥 남이다. 여자라고는 동생과 이웃에 사는 레이철 밖에 모른다. 여자들이 접근하는 것도 같이 말을 하는 것도 섞는 것도 어색하다. 외모에도 자신감이 부족하다. 날마다 여동생의 잔소리를 들으며 살면서 농사일 밖에 해본 적이 없는 전형적인 시골 할아버지. 보통은 동생에게 다 양보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마릴라만이 이런 오빠의 성격을 잘 안다. 이렇게 세상과 담쌓고 일만 하는 그이지만 기차역에서 앤을 처음 만났을 때 부담이 없고 편하다는 느낌이 들어 입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인생에서 그가 가장 주체적으로 결정한 첫 번째 선택이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이렇게 여자에 관심이 없었던 것을 아는 마릴라는 신기해한다.



어긋났던 첫 만남, 처음 만난 신뢰감


아마도 앤의 입양이 제대로 이루어져서 처음부터 그녀를 환영하는 상황이었다면 아마 기차역으로 마중 나온 양부모에게 자신의 이름과 나이 정도에서 간결하게 자기소개가 이뤄졌을 것이다.  그렇게 강렬하진 않지만 있었을 법한 전개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기차는 너무 빨리 와버렸고, 앤은 30분 넘게 의자에 앉아 오지 않는 양부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충분히 초조하고 불안감을 가질 수 있는 상황. 그녀는 상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는 11살 아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그것뿐이었던 것.


이날 매튜를 만난 건 앤이 살면서 가진 그 수많은 행운 중에 하나였다. 매튜가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다는 것.  매튜는 고아원의 착오로 남자아이 대신 앤이 왔지만, 차마 다시 돌아가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내성적이고 수줍은 성격의 할아버지를 11살 소녀는 단번에 말로 사로잡아버렸다.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여차 저차 해서 기차역에 혼자 있는 아이를 데려오긴 했는데, 집에 돌아오니 성격이 만만치 않은 동생이 잔소리를 퍼붓는다. 그래도 한 번은 대항해 본다. 키우고 싶다고 까지 말은 아니지만 다시 보내지 말라고. 여기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앤과 앤을 받지 않으려는 마릴라. 그리고 어색한 이웃들. 여기서 다뤄지는 에피소드는 재밌긴 하지만 인물들의 미약한 도덕성을 시험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폐쇄적인 마을에서 갑자기 들어온 아웃사이더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대조적인 인물이 중요한 이유


소설이 제일 먼저 시작하면서 등장하는 레이쳍 린드 여사는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 그녀는 동네에서 말 많고 퍼뜨리기를 좋아하는 아줌마 중에 하나이다. 쉬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소식을 퍼 나르는 그녀의 성격은 정직하고 조용한 성격의 마릴라와 대조적이고 부도덕한 면도 있지만 그녀의 장점은 마릴라에 비해 심리를 잘 알고 세상일에 빠르다는 것.  그녀는 육아를 전혀 해본 적이 없고 폐쇄적으로 살아온 두 남매가 아이를 키운다고 할 때 '거의 불가능'이라고 판단한다. 아이 입장에서도 전통적인 가치를 따르는 노인들과 부딪힐게 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중에 알겠지만 전혀 근거 없는 걱정이 아니었다)


그녀의 이런 성격은 마릴라의 고지식한 점을 좀 더 부각하면서 앞으로 있을 각종 사건에 대해 대략적으로 예언하는 역할을 한다. 낯 모르는 아이를 입양하는 그들의 순진함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실제로 마릴라는 앤을 몇 번인가 돌려보낼지 고민을 하게 되는데 이때마다 레이철 린드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마릴라는 자존심이 세고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성격을 뚝심을 지녔다. 그녀는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추진력을 가진 인물이다. 자기 스타일을 지키면서도 앤을 허용하는 길을 택한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하고 규칙적인 그녀이기에 역설적으로 앤의 자리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앤이 고아지만 자존감을 버리지 않을 수 있던 것은, 어설프게 위로해 주는 것도 아니고 어설프게 가족 행세를 해주는 것도 아니었던 것.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봐주는 마릴라의 강한 멘털이었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직설적인 조언들 덕분에 감정적인 앤은 자신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받아들여할 카드는 앤의 손에 달려있는 것을 알려준다.

자연은 다양성을 기본으로 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


마릴라의 심리를 분석해 보면..


앤의 성격 가운데 싫어하는 것도 존재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많지만 앤이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났으니 자신이 도와주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튜가 단순히 앤의 인상에서 긍정적인 느낌을 보고 판단한 것이라면, 그녀는 다른 입양처가 마땅하지도 않고 아이의 교육에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눈으로 보고 나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비록 아이를 위한 자원도 없고 맞춰줄 환경도 부족하지만 자기 하나 만은 바른 인간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아래 입양을 선택한 것이다. 그녀가 연민을 느껴서 라기보다 도덕적으로 아이를 돌려보내는 것이 나쁜 가정에 또다시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양심에 심하게 걸렸기 때문이다.

 

완전히 천사 같다고 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녀는 '바른 어른'이었던 것. 지금도 그렇지만 양심이 부족한 사회에선 이런 캐릭터 마저 귀하다. 아이를 버리거나 도덕 관념없이 키우는게 흔한 시대에. 그녀 자신이 좀 오래되고 낡은 관념 속에 살아왔지만  그래도 도덕적으로 흠없이 살아왔다는 것은 그녀만의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진정으로 선택한 도덕적 선택에서 미약하지만 '신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릴라가 결심한 이 입양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나는 이해한다. 단지 낭만적인 소설이어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한 이 선행이 후에 그녀의 인생에 미친 영향과 결과를 생각하면, 인생에 대해 좀 더 밝고 낙관적으로 보게 된다. 앤이 오기 전까지 어쩌면 아름답지만 이름 없었던 폄범한 수많은 일상들이 앤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그녀가 얻은 행복이다. 하지만 앤이 마릴라에게 빛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마릴라가 자신을 믿는 자기 신뢰였다. 그것은 마릴라가 앞으로 다른 인생을 살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야기는 앤의 도전기 이기도 하지만 마릴라의 도전기이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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