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ho am I Sep 12. 2023

허무의 공격성, 공격의 허무함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고

예전에 기형도의 시집을 읽다가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한 문학평론가 김현의 서평 속 이

문장을 발견한 적이 있다. '허무의 공격성, 공격의 허무함'. 평론가는 기형도의 시를 정의내리기를

한 없이 어려워했다. 20대에 쓰여진 처절하고 허무한 . 그 세계가 너무나 무섭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글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글이 기형도 사후에 쓰인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책의 발간과 함께 젊은 나이에 죽은 시인을 추모하는 성격이 같이 어우러져,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글이 되었다. 천재 시인의 사후 시집에 남은 전설적인 평론가의 추모사라니. 그러나 세월이 흘러 평론가마저 돌아가시고 시집은 완전한 예술적 영면의 세계로 들어가 책장에 꽂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 초반에 시집을 읽었던 독자인 내 기억마저 묻혀가는 중이다.


얼마 전에 80년 드라마를 보다가 '요즘 아이들은 TV스타는 알아도 조부모 이름은 모른다'라는 대사를 들었다. 지금도 아니고 40년 전에 만든 드라마다. 그럼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을 기억하는가? 나는나 자신에 물었다. 하지만 내 기억에 남는 건 돌아가신 친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100세를 기록하신 외할아버지 이름뿐이었다. 2010년 즈음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성함은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는 건 할머니 얼굴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할머니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전에 친정을 떠난 내가 할머니 이름을 찾을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물어보기도 왠지 민망했다. 유명인이 아니니 인터넷에 있을 리도 없고. 그러나 왠지 알아야 할 것 같고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돌아가신 분에게 미안했고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일제 강점기에 10대를 보낸 할머니는 글을 배운 적이 없었지만 50 넘어 서예를 배우면서 한글을 익혔다 한다. 본인의 호도 스스로 지으셨다.  심지어 여자라면 이름조차도 대충 짓던 시대였지만 할머니는 외동딸로 자랐고 목걸이 하나 반지하나도 허투루 고르지 않을 정도로 예쁜 걸 좋아하셨던 분이셨다. 본인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던 할머니의 모습은 항상 풍채가 좋고 허리가 꼿꼿하고 키가 크고 화장을 하시고 커트 머리에 단 한 번도 백발을 보여준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할머니의 이름은 지금은 세상 어디를 돌아봐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결국 거리 간판에서 한 글자 한 글자 이름을 조합해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 <코코>에서 '사람이 죽고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어질 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라는 대사가 생각이 났다.  세상에는 글자들이 넘쳐났지만 할머니의 이미지와 인생을 담은 그 '세 글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허무한 좌절감에 빠져들었다. 나의 기억의 경로는 뒤져보니 적어도 이 세계에 지금 존재하는  '그것' 말고는 활성화되어있지 않았다. 분명 기억에 남아 있을 테지. 하지만 어딘가에 잠자는 기억을 돌리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다 정말 우연찮게도 베트남 쌀국숫집을 지나가다. '남'이라는 단어를 찾았다. 할머니 이름은 '남길'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정말로 세상에 하나뿐이었다. 한 사람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졌다.

그 이름은 할머니 것이었고. 자손인 나에게 이름을 남긴 것이다. 나는 잊지 않게 이름을 다시 되뇌어보았다.


차를 타고 집에 오다가 라디오 광고 속에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추상적인 단어들의 흐름을 들었다. 나는 가끔 어울리지 않게 멋 부리는 단어를 조합한 분양광고나 자동차 광고로 생각하게 흘려버릴려던 찰나 내 귀에 꽂힌 건 '소설'과 '하루키 신작'이라는 단어였다. 마치 은퇴한 마술사를 다시 마계로 불러들이는 비밀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하루키라면 1Q84 이후로 읽은 적이 없긴 했지만 집에 돌아온 나는 나도 모르게 도서검색을 하고 있었다. 뭔가 책을 꼭 읽어야 할 것 같은 그런 강렬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최근 작인 <기사단장 죽이기>와 신작 <도시와 그 불가능한 벽들>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하루키라면 사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작가인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 두 작품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전작인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엇갈린 수준이었다. 어떤 리뷰어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말이 너무 많다. 고 적었다. 일본에서는

'난징 대학살'이라는 소재 때문에 판매가 금지되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부정적인 평가가 더 관심을 끌게 했다. '하루키 is 뭔들'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는 결국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내고 말았다. 하루키의 대부분의 책들이 대출된 것에 비하면 <기사단장 죽이기>는 서가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차곡차곡 1권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이한 이야기들


미스터리를 정의하자면 체스를 두다가 퀸이 아니라 룩이나 비숍한테 어이없이 뒤통수로 체크메이트를 당하는 그런 경우와 같다. 내가 미쳐보지 못한 관점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한동안은 왜 내가 졌는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 된다. 미스터리는 내가 대적하고 있는 앞의 수가 아니라 저 옆 혹은 멀리서 파악하지 못한 그런 사건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차곡차곡 구축되고 있다가 '갑작스레' 닥치는 것이다. 소설은 그것을 계획하고 통제하는 상황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독자 만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보면서 하루키에게 졸지에 체크메이트 당한 기분이었다. (체스에서 '체크'는 킹이 잡아먹히는 것이 이지만 '체크메이트'는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토록 슬프고 절절한 이야기를 마치 피할 수 없는 킹의 위치에 있는 것 같은 나를 향해 토로하는 동안 2박  3일이라는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초반에 책에 적응하느라 끌었던 하루를 제외하면 나머지 3일은 밤낮없이 소설에 파묻혀 지냈다. 밤에 책을 읽다 보면 새벽이었고 몇 시간 자고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 시간에는 다시 책을 주파했다. 이 책은 그렇게 한동안 놔주지 않더니 마침내 종지부를 찍고.

잊을 수 없는 문장을 몇 줄 남겼다. 책의 주인공이 거쳐갔던 그곳이 후쿠시마 원전이 있었던 그 자리라는 것.

나는 일본의 지명은 잘 모르지만, 그리고 책을 보면서 일일이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그 문장으로 인해 실제와 소설이 교차하는 그 지점이 입체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살아났다. 여느 때였으면 작가의 후기정도로 남을 그 책의 공간에 소설의 주인공이 직접 후기를 남겼다는 것은. 그 소설이 단순한 판타지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현실로 들어오고 싶어 하기 때문이 아닐까.

논란의 그 '부분'인 난징대학살 부분도 맥락상 픽션처럼 읽히지만 팩트라는 점이 묘하게 느껴졌다. (나는 여기서 작가의 고민을 읽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이것의 경계는 마치 바다를 정확하게 가르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나 작가는 그 두 가지를 둘 다 설명하려 하지 않고 굳이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은 것 같다. '역사적 사실'이란 가치판단을 요구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냥 꿀꺽하고 있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다.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기사단장의 말처럼.


책을 읽기 전의 3일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졌는가? 나는  그 차이를 안다. 나는 강을 건너듯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작품을 건너왔으니 다시 못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죽음도 보았고 늙음도 보았고 기형도와 김현이 표현했을 법한 막강한 허무와 그 허무에 대한 공격성도 남김없이 보았다. 책을 읽음으로 인해서

훨씬 나아진 것은 나의 내부가 이 괴이한 이야기를 빠짐없이 듣고 해석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딱히 답을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왜

스콧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자기식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었는지를, <오이디푸스 신화>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빌려왔는지에 대해 약간의 추측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본이라는 자기 아버지의 이데아를 스스로 탈피하고 자유로워지는 길은 오로지 자기 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이니 말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야기를 청취하는 수준의 게스트에 불과했던 수동적인 주인공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해결하는지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본인도 부모로 재탄생되었다. 일방적으로 부모를 미워했던 그 어린아이에서 벗어나, 정말 되고 싶은 부모 그 자체로 말이다.


나는 얼마후면 <도시와 그 불가능한 벽들>의 소설 세계로 다시 한번 들어가 보고자 한다. 정말 슬프게도 나와 동시대에 살았던 한 작가가 세상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혹은 더 이상 작품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노년이 된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몇 권의 책을 기념비로 삼아 그를 몇 번이고 추억할 것이다. 할머니의

이름처럼 잊히지 않는 것이 되기 위해서 이름을 기억해 줄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풀타임과 지하철 시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