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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May 04. 2022

풀타임과 지하철 시위

-그들이 싸우는 대상은  '당신'이 아니다


전주 국제 영화에 관한 정보를 읽어보다가, 폐막작으로 나온 에리크 그라벨 감독의 [풀타임]이라는 영화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접했다. 간단한 줄거리를 요약해 보자면 ' 쥘리는 파리 교외에서 홀로 두 아이를 기르며 파리 시내의 고급 호텔에서 룸메이드로 일하느라 온갖 애를 쓴다. 마침내 오랫동안 바라 온 직장의 면접을 보게 된 날, 하필이면 전국적인 파업이 벌어지고 대중교통 시스템도 마비되면서 쥘리가 잡고 있던 깨지기 쉬운 균형이 위태로워진다. 그리고 쥘리는 모든 것을 놓칠 위험을 무릅쓰고 시간과의 필사적인 싸움을 시작한다. [제23회 전주 국제영화제]'였다.


이 영화는 아직 개봉 전인 듯해서 실제 영화에 대한 리뷰는 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간단한 리뷰를 읽고 난 뒤 떠오른 생각은 프랑스 직장인도

한국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또 생각난 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였다. 만약 내가 서울에서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상황이고, 쥘리처럼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인 상황에서 출근에 늦어 뛰는 아침에 우연히 '지하철 시위'와 마주치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 아마도 순간만큼은 입에서 고운 말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건 사람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내가 출근길에 마주친 고통을 누군가에게 대체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전달될 것인가 말이다. 그렇게 SNS와 각종 매체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슈 파이터가 되어서 싸우고 있다. '내 출근길의 고통을 너희들이 아느냐' '그러는 너희는 지난 세월 고생한 장애인의 고통을 아느냐' 식의 논쟁들.


그런 이유로 지난 4월 13일에 있었던 이준석 국민의 힘 당 대표와 박경석 전국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의 썰전 라이브를 다시 돌려보았다. 여느 토론이 그렇지만 토론 자체가 어떤 해결을 주진 않았다. 하지만 토론이 귀한 현실에서, 이렇게라도 말할 기회를 얻는 것에 대해 가치평가를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입장차를 확인하고 끝나는 한이 있어도 몸이 아닌 말로 싸운다는 것 자체가 중요해 보였다.

개인적으로 토론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논리적인 면에서 이 대표가 훨씬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슈를 끌어가는 능력은 정치인으로서 그의 능력과 전략이었다. 박 대표는 계속해서 따라가질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계속 충돌이 이어졌다. 유튜브의 댓글들을 보면 '답답하다' ' 이 대표가 이긴 것 같다'라는 식의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처음에 페이스 북 발언으로 논쟁을 점화한 것도, 썰전 라이브에서 논리로 이긴 것도 모두 그의 능력이었다.


무엇이 실질적인 평등인가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문제가 있다. 왜 두 사람은 토론이 안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나는 '근본적인 인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약속에 A는 42.19km를 물도 안 마시고  뛰어왔고, B는 차를 타고 도착했다고 생각하자. A와 B는 같은 시간에 도착했다. 하지만 A와 B가 동시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그들이 똑같이 편한 상태에서 말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같은 현장에 A와 B는 앉아있지만, A는 B에 비해 상당히 불편한 상태이다. 그런 상황에서 B가 A와 대화를 하려면 사전 정보가 있어야 한다. A에게 "뭐가 불편한지

이야기해봐?"라고 묻는다. A는 정확히 대답을 못한다. 목도 마르고 피곤하고, 다리도 아프고, 머리도 어지럽고 화장실도 가고 싶고 전체적인 모든 불편을 호소한다. B는 어쨌든 자리에 앉아 물을 한잔 마시라고 말한다. A가 마시자 B는 묻는다. "자 이제 다 됐지?". 그래도 A는 계속 뭔가를 호소한다. B는 들으려고는 하지만 잘 이해하지는 못한다.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근본적으로 42.19km를 뛰어온다는 것에 대한 경험 부족이다.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두 번째는 A가 자신의 불편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A의 문제는 너무나 복합적이어서 B가 하나씩 해결하자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또 금방 좋아질 것이라는 말도, 시간이 걸리면 해결된다는 말도 믿을 수가 없다. 고통은 즉각적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A와 B는 같은 위치에서 대화를 한다고 수가 없다. A는 위로라는 감성을 요구하고 B는 이것을 논리로 판단한다. 결론적으로는 B의 과연 승리인가?

(박 대표는 계속해서 20년 넘는 투쟁을 말했다. 그건 그가 가진 고통의 총량이다. 그는 그 고통을 100프로 받아들이기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중 일부라도 무관심 속에 잊혀가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당장은 이해가 안 가지만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한 영역이 있다)

사실 토론에 나온 것처럼 한국에도 장애인을 위한 교통수단이 있다. 최근에는 지방 어느 도시를 가도 길에서 전용 콜택시와 이동 차량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인이 타는 지하철과 버스와는 다르다. 일반 교통수단 자체가 장애인 입장에서는 접근성이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막히고 밀리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대중들 사이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출발 시간을 늦추는 장본인이라는 오해를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실제 저상버스가 도입이 되고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있어도 장애인 입장에서는 현실적이지 않을 수가 있다. 그렇게 이용률이 떨어지면, 점점 변화의 속도는 늦춰지고,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장애인과 일반인의 교차점은 점점 줄어들면서.

무엇이 문제일까? 나는 이동편의시설의 설계가 행정적인 관점이 아닌, 이용자 관점에서

논의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주 사소한 문제, 타고 내리는 문제부터 카드를 찍는 위치의 문제, 버스와 지하철의 환승 문제, 밀집 시간시 이용했을 때의 문제, 버스 기사가 안전벨트를 묶어주는 문제, 다른 승객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하는 인식 문제와 같이 아주 디테일한 부분에서 말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지속적으로 고쳐가야 할 현안들이, 여러 가지 다른 정치 현안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접목이 안되고 흘러가 버린 것이다.

문제는 논의의 장이 부족했고 관심이 없었다는것


낮은 문턱의 의미

그래서 첫 번째로 바뀌어야 할 것이,  시민 인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건 위선도 아니고 동정도 아니다. 다만 실질적으로 도와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주고 도와주어야 할 상황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문턱을 낮추거나 높이는 건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겠다는 타인의 의지다. 애초에 약자의 입장에서 같이하겠다는 인식과 의지가 없다면, '요즘 세상 좋아졌다'는 말로 어떻게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냉소는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시위의 대상이 시민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실 시위로 제일 피해를 입는 것은 지하철을 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정책을 바꾸고 결정하는 인물들은 지하철에 없다. 그들은 대중교통이 아닌 개인 교통수단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위 장소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마치 이슈의 쟁점이 시민과 장애인의 대결처럼 비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하지만 박 대표의 말에 의하면 지하철 시위란 단지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지하철의 특정성이나 시민이라는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3.1 만세 운동이 장터에서 벌어졌다고, 시장 상인을 향해 시위한 게 아니 듯이 이슈에 좀 더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에 대한 연관성을 의도로 해석하는 것은 프레임 정치의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다 ) 그래서 전장연 입장에서는 오해에 대한 해명이 필요했던 것 같다. ( 그러나 현재 뉴스에 올라오는 것을 보면 지하철 시위가 연장되고 점점 시위가 과격해지는 상황이다. 한번 부정적인 여론을 받은 곳에서 또다시 시위를 한다는 것은 '이동권 보장'과 '탈 시설화' 이슈에 집중시키기보다 여론을 부정적인 쪽으로 키우는 것 같아 안타깝다. 방식적인 전환이 필요하지 않은가. 인터넷을 주로 사용하는 젊은 층이 여론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삭발과 오체투지, 휠체어로 연착시키는 식의 방식이 불러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더불어 이슈의 수가 너무 많고 복잡한 것도 메시지 전달력을 떨어뜨리는 것 같다.

나는 부탁하건대, 이 사회가 몸이 아닌 말로 싸우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100차의 토론이 있을지언정.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대규모 시위로 지하철을 못 탄 쥘리는 어떠게 되었을까.  영화의 결말은 어떤 식으로 이어질까에 따라 감독의 창의성은 평가될 것 같다. 정말 뻔한 말이지만 세상이 연결되어있다는 것. 그것이 단지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다양하지 못한 방식으로 생각지 못하게 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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