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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시선에 나를 가두지 않기

카메라가 담지 못하는 것들

by Alice

원근법은 3차원 공간을 2차원 평면에 표현할 때, 실제 눈으로 보는 것처럼 거리감을 느끼도록 하는 회화 기법이다. 아래 사진처럼 복도를 바라보면 내 시선에서 멀어질수록 복도와 양쪽의 벽이 결국 하나의 점(소실점)으로 모인다. 이러한 소실점을 그림에 응용하여 멀고 가까움과 깊이를 주는 화법이다.


이는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를 중시하고, 인간을 창조의 주체로 보는 르네상스 인본주의 사고의 토대를 마련한 중요한 발견이었다.


그전까지는 인간의 시선이 제한적이고 신의 전지전능함에 종속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 발견은 신의 시선에서 벗어나, 화가의 실제 시점이 예술의 기준이 되는 시대로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를 실제로 체계화한 사람은 이탈리아 건축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였다. 1420년, 피렌체 두오모 성당 앞 성 요한 세례당에서 그는 거울과 구멍 뚫린 판화를 이용한 실험으로 선원근법을 증명했다.


Screenshot 2025-06-29 at 2.12.34 PM.png 출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나무위키



이후 원근법의 공간 개념은 건축, 공학, 해부학 등 여러 분야에 활용되었으며, 오늘날 카메라 기술의 토대가 되었다.


예를 들어, 팔 길이(약 50cm)로 찍은 셀카에서는 코가 렌즈에 가까워 실제보다 약 30% 더 커지고, 귀는 작아진다. 그래서 셀카로 보던 사람을 실제로 만나면 인상이나 이목구비가 다르게 느껴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두 눈(양안)으로 세상을 입체적으로 인식하는 반면, 사진이나 그림은 평면(2D)에 고정된 한 눈(단일 시점)에서 본 모습만 담기기 때문에 왜곡이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이 왜곡을 이용해 멋진 인생샷을 남기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원근법은 인간 주체성을 확립한 동시에, 인간을 제약하는 반인본적 요소를 함께 만들어냈다. 실제로 원근법을 이론화한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의 <회화론>은 세계를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공간으로 재구성해 인간 이성의 우위를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이 '측정 가능성'은 오히려 인간의 시점을 구속했다.


위의 카메라 예시처럼, 인간은 두 눈으로 움직이며 다양한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하지만 원근법은 단일 시점을 강제하며, 인간의 실제 경험과는 다른 인공적인 시각 공간을 만든다. 일부는 이러한 '합리성'이 다차원적인 현실을 단순화해, 르네상스 인본주의가 추구한 개별 주체의 자율적 인식을 오히려 제약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19세기 사실주의 화가인 에두아르 마네는 이런 점을 꼬집어 원근법에 의도적으로 반하는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폴리 베르제르의 바>다.

Screenshot 2025-06-29 at 2.34.37 PM.png Un Bar aux Folies-Bergère, 1882. Édouard Manet


나는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왜 이게 원근법을 무시했다고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가운데 여성의 팔 근처에 갈색 프레임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거울의 프레임이다.


즉, 프레임 뒤로 보이는 배경은 전부 거울에 비친 모습이고, 실제로 여성 오른쪽에 보이는 뒷모습은 이 여성의 반사된 모습이다. 그리고 그 뒷모습과 이야기하는 남성 역시 거울 속 장면으로, 사실상 우리는 남성의 뒷모습만 보아야 맞다.


이 설명을 듣는 순간, 아, 마네가 정말로 원근법을 과감히 무시했구나 하고 깨달았다.


당대의 일상과 사람들의 모습을 충실히 담으려 했던 마네는 스스로를 철저한 사실주의 화가라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세잔의 정물화나 피카소의 입체파처럼 복수 시점(다시점)을 의도적으로 사용해 원근법의 규범을 깨뜨렸다.




원근법의 이론이 강제하는 단일 시점의 공간이 우리가 늘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보통 사회가 요구하는) 정해진 '정답'과 '시선'이 만들어낸 사고와 같지 않을까.


한 걸음 물러서 보면, 우리는 결코 단일 시점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 눈을 가지고 있고, 이 두 눈은 언제나 조금씩 다른 각도와 깊이로 세상을 본다. 즉, 우리의 시선은 하나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층적이다.


셀카나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멋지고 예쁜 순간들'을 보며 우리는 종종 현실의 나와 비교하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사실 카메라가 켜지는 순간,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단일 시점 안에 최고의 모습을 담으려 애쓴다. 즉, 그 결과물은 의식적인 연출과 도구의 한계가 결합된 일시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현실의 나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시도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진전을 즐겨 찾고, 특히 일상적인 순간을 담은 사진을 좋아한다. 그러나 결국 사진은 멈춘 한 순간일 뿐, 움직임도, 냄새도, 소리도 담지 못한다. 비디오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진짜 순간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은 내 두 눈, 그리고 나의 감각과 마음뿐이다.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눈을 보고, 움직임을 느끼며, 핸드폰 대신 서로의 감정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약속 자리에서 핸드폰을 뒤집어 두거나 꺼낸 적이 거의 없다. 급히 메시지를 보내야 할 땐 꼭 양해를 구하고 사과한다. 상대방도 나에게 그렇게 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여행지에 가면 나 역시 당연히 사진부터 찍고 싶어진다. 기록하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서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나는 사진보다 두 눈으로 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진을 못 찍어도 좋으니,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기억하는 것이 더 소중했다. 그리고 그랬던 적이 실제로도 더 기억에 남는다. 그날의 바람 세기나 공기 촉감과 냄새, 사람들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바이브, 배경 음악으로 울려퍼지던 오르골 소리 등...


삶은 순간의 연속이다. 그 속에서 두 눈과 오감을 동원해 느끼고 생각할 때, 더 충만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표현만이 진정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진짜 순간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은 내 두 눈, 그리고 나의 감각과 마음뿐이다.


Screenshot 2025-06-29 at 3.14.22 PM.png 포르투갈 서핑 여행에서 건진 멋진 사진. 하지만 그날의 바람, 냄새, 소리, 감각들은 사진이 아닌 내 머리와 마음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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