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 인류의 역사 서평
안녕하세요. 덕왕입니다.
지난 2025년 11월 말, 회사의 독자분들과 함께 책 읽기 캠페인을 시작하며 첫 번째로 선택한 책은 데이비드 맥윌리엄스의 <머니: 인류의 역사>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는지요? 어떤 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 읽으셨을 테고, 어떤 분은 내가 어쩌자고 손을 들었는지 후회하며 숙제의 무거움에 포기하셨을지도 모르며, 또 다른 분은 어릴 때는 책을 꽤 읽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몇 장을 읽기도 전에 핸드폰에 시선이 가는 약해진 자신의 독서력에 놀라셨을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캠페인을 처음 제안했을 때 '과연 몇 분이나 손 들어주실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저요!'를 외쳐주셨고, 그 순간 그 옛날 동오의 땅에서 뜻을 세우고 분연히 일어났을 때 저를 따라 칼을 든 전우들이 생각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혼자 걷는 길은 외롭지만, 함께 걷는 길은 멀어도 즐겁습니다. 여러분이 계셔서 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모처럼 책을 읽으면 안 쓰던 근육 운동을 하는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읽으며 장맛처럼 습관으로 만들어 나가다 보면 한 달에 두세 권이 어렵지 않은 날이 옵니다. 제가 바로 그랬으니까요.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독서습관보다 값진 것도 드물기에, 부디 이 책과 함께한 시간들이 독서 근육을 키우고 거미줄처럼 촘촘한 생각의 격자틀을 만들어 주는 마중물이 되길 바랍니다.
이 책은 많은 긍정적 서평을 통해 선택한 책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기대를 뛰어넘는 흥미로운 내용들로 저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술술 쉽게 읽히기도 했고요. 흔히 돈에 대한 책은 금리니, 수요와 공급이니 하는 꽤나 머리가 아픈 내용들로 가득한데, 이 책의 저자는 돈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쉽고 재미있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갑니다. 재미도 있는데 깊이까지 있다니, 이건 완전 러키비키! 로또 4등 정도 당첨된 기쁨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이 책에 대한 덕왕의 감상평과 여러분의 생각을 비교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아일랜드의 경제학자이자 방송인인 저자가 수천 년에 걸친 돈의 역사를 한 권에 담아낸 이 책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면서도 정작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는 '돈'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제법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대단히 재미있는 신조어인 '플루토파이트(Plutophyte)'를 소개합니다. 그리스어로 부(富)를 뜻하는 Pluto와 식물을 의미하는 Phyte를 합친 말로, '돈에서 자라난 종'이라는 뜻입니다. 저자는 인류를 "돈에 적응하고, 돈에 의해 개조된 종"이라고 정의합니다. 총균쇠보다도 돈이 먼저라는 도발적인 책의 광고 문구가 허세가 아닌 것을, 이 한 단어와 이후 서술된 내용들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멋진 단어였습니다.
책의 1부는 인류가 정착 생활을 시작하고 농경을 통해 잉여 농산물을 축적하면서 돈이 탄생하는 과정을 다룹니다. 돈의 탄생과 함께 금리라는 개념도 등장합니다. 저자는 금리를 "미래의 소득을 끌어다 현재에 쓸 때 지불하는 값"이라고 정의합니다.
인간은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지길 바라는 욕망의 동물입니다. 누가 시켜서도 그렇게 교육받아서도 아니며, 그저 본능입니다. 미래를 앞당기고 싶은 본능은 신용을 만들어냈고, 신용의 확장은 인류 문명 발전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물론 과도한 신용의 확장기 때마다 경제는 붕괴되고 우리의 삶은 철퇴를 맞으며 고통의 조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때의 고통은 잊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부터 새로운 주기를 시작하며, 다람쥐 쳇바퀴 도는 모습을 반복합니다. 이 현상은 특히 금융에서 두드러지게 반복적으로 관찰되며, 투자와 금융의 역사를 다룬 많은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합니다.
이는 아마도 우리 인간들의 오래된 본능과 기억 편향, 혹은 '이번에는 다르다'는 망상 때문일 것입니다. 이 또한 오랜 세월 생존능력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갖게 된 인간의 본능 때문이겠지요.
최초의 화폐 단위인 셰켈부터 리디아의 주화, 그리스의 테트라드라크마에 이르는 화폐의 진화도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고대시대에도 기축통화가 존재하고 또 변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특히 리디아인들의 통찰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주화를 더 작은 단위로 쪼개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상품을 거래할 수 있다." 이 통찰은 경제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아이디어입니다. 비록 우리나라나 일본에는 현재 원이나 엔이라는 단일 통화단위밖에 없지만, 미국에는 달러와 센트가 존재합니다. 과거 피렌체에서도 플로린과 모네타 디 피콜리의 두 가지 화폐단위를 썼습니다. 플로린은 무역 거래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모네타 디 피콜리는 일반인들의 소비에 주로 쓰였다고 합니다. 당시 플로린은 대단위 무역대금을 빠르게 처리하는, 오늘날로 치면 SWIFT망과 같은 역할을 했고, 작은 단위인 모네타 디 피콜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서민경제 사이에서 실제 '돈의 흐름'을 만들어 경제가 활기차게 돌아가도록 도운 덕분에 피렌체는 중세 유럽의 상업 패권국이 되었습니다. 피렌체처럼 미국도 이중 화폐단위를 사용하고 있으며 패권국입니다. 그렇다면 이중화폐 단위, 혹은 이중 결제 시스템은 경제가 성장하고 순환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세분화된 통화 단위는 일물일가의 법칙에서 다양한 물건들의 가치를 세분화하여 평가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며, 이를 통해 무역의 품목과 수량도 당연히 증가했을 것이며, 무역에 의한 통화량 수요의 증가는 GDP 성장과 더불어 인플레이션 없이 통화량의 '부드러운 증가'에도 기여하였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비트코인에도 잘게 나눈 '사토시'라는 단위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비트코인도 이 역사적 교훈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차이점을 짚어야 합니다. 피렌체의 이중화폐는 단일 가치 시스템 내에서 '유통 범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습니다. 플로린과 모네타 디 피콜리는 같은 경제권 안에서 자연스럽게 교환되었습니다. 반면 비트코인은 온체인과 라이트닝 네트워크가 구분되는, 완전히 다른 '기술 계층'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온체인 거래와 라이트닝 거래는 사용법도, 수수료 구조도, 보안 모델도 다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탈중앙화'라는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기술 숙련도에 따른 새로운 계급 분화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디지털 금융 문맹이 새로운 형태의 배제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저자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차이도 설명합니다. 사용가치는 실제로 사용했을 때의 가치이고, 교환가치는 그것을 팔았을 때의 가치입니다. 당근에서 '몽X레르' 자켓이 급매물로 나와도 그 브랜드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와! 저 가격에 나왔다고?"라며 급 하트를 누를 것이고, 모르는 사람은 "와! 저 가격이라고?"라며 고개를 저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아는 상품의 경우에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극단적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가끔 정보의 불균형으로 인해 극단적 차이가 발생하곤 합니다. 주식 시장도 이와 같아서 기업의 내재가치와 가격이라는 교환가치 사이에 큰 괴리가 발생하곤 합니다. 모든 정보는 시장에 반영되어 있기에 누구도 초과수익을 거둘 수 없다는 효율적 시장가설이 장기적으로는 옳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물지 않게 가치와 가격 사이에 큰 간극이 발생하곤 하는데, 이 기회를 노리는 사냥꾼이 바로 얼마 전 은퇴하신 워런 버핏과 같은 가치투자자들입니다.
가치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주류 경제학에서 나오는 소위 '소비자 잉여(Consumer Surplus)'와 '생산자 잉여(Producer Surplus)'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소비자 잉여와 생산자 잉여의 합으로 시장 전체의 경제적 후생을 정의하는데, 이 경제적 후생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비트코인의 가치를 생각할 때 유용한 기준이 되어 주었습니다.
책에 나오는 로마제국의 금융 시스템도 흥미롭습니다. 'Salary(급여)'라는 단어가 로마 군인에게 주어진 봉급인 소금(Salt)에서 유래했다는 것, 상업의 신 메르쿠리우스가 헤르메스이자 머큐리였다는 것 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고대 로마인들에게 소금은 그야말로 '짭짤한' 보수였던 셈입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정책도 주목할 만합니다. 원로원 의원들은 총수입의 일정 비율을 이탈리아 본토에 보유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는데, 이는 최초의 지급준비금 정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당시에 로마의 황제는 무려 현대 은행의 핵심 원리를 터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책으로 로마는 기존 기득권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화폐의 힘을 계속 유지하는 일타쌍피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는데, 역시 황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책에는 이 정책의 영향으로 로마인들이 금을 사재기하기 시작했다는 아주 '오모시로이'한 내용이 나옵니다. 귀족이 땅을 팔아 마련한 돈을 지급준비금으로 넣어두면 전체 유동성이 악화되어 돈이 부족해지며, 이 때문에 오히려 기존 자산의 가치가 오르고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는, 교과서적인 지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발생하곤 합니다.
흔히 지급준비금이 낮을수록 대출여력이 증가하고 통화승수효과를 통해 시장의 유동성이 넘쳐납니다. 이 때문에 자산가격이 상승한다는 것은 경제와 투자를 공부하는 사람에겐 기본적 상식입니다. 그런데 지급준비금이 늘어나고 시장의 유동성이 줄어드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산 가격이 상승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지 않는 예외적 상황입니다. 심지어 이런 상황이 와도 경제학자들조차 정확히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하워드 막스의 메모 제목처럼 "Nobody knows"며 그저 사후적으로 분석이 가능할 뿐이지요. 그래서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결과론적으로 이 당시 안전자산으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은 금은 2000년이 넘는 지금도 그 성격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을 위기 때마다 구원하며 수천 년간 그 가치를 증명해 온 금은 2026년 1월 말, 온스당 5,000달러를 넘어서며 인류 역사의 신고가를 경신했습니다.
2부에서는 중세 유럽의 화폐와 금융 시스템의 발전을 다룹니다. 초기 중세시대는 문명이 후퇴하는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이성과 욕망의 자리를 종교와 절제가 차지했습니다. 화폐는 몰락하고 주화의 경제는 없어지며 물물교환으로 회귀했습니다. 경제의 대동맥이 멈추자 과학과 예술의 발전도 멈췄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암흑시대 속에서 환전상들이 등장했고, 어음과 신용장이 발명되었고, 초기 은행업의 태동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어두운 시기에 가장 눈부신 산업이 탄생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을 찾으려는 노력도 간절해지는 법이랄까요.
주화의 탄생은 극소수에게 계급 이동의 기회를 선사했습니다. 동시에 경제관념 없는 귀족에게는 몰락의 가능성도 부여했습니다. 저자는 "돈의 가장 큰 속성 중 하나는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존 보수 세력은 예절, 문화, 그 밖에도 학벌, 지연 등 온갖 교양 장벽을 세우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화성 갈 거라며 계급 이동의 꿈을 넘어 행성 이동의 꿈마저 꾸는, 새로운 주화의 탄생과 함께 9회 말 2 아웃 만루홈런 같은 인생역전의 순간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들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지 글의 후반부에 덕왕의 생각도 써보겠습니다.
중세 시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금융 혁신이 눈부셨습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만들어낸 금융 기법들은 현대 금융 시스템의 원형이 되었고 르네상스의 문을 연 열쇠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와중에 우리가 위인으로 알고 있는 구텐베르크가 사실은 사기꾼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인쇄술의 아버지가 실은 단지 기회주의자였을 뿐이라니,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하지만 책 속에 담긴 구텐베르크가 만든 성경의 이미지를 보니 사기를 치려면 이 정도 정성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면 사기도 예술이려나.
중세에 새롭게 등장한 여러 금융제도 중 '신용의 화폐화'는 가장 눈부신 혁신 중 하나입니다. 눈에 보이는 금화나 은화 없이, 그것도 단지 어음 한 장으로 먼 거리의 상인과 거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화도 아닌 고작 종이 쪼가리 하나로 금덩어리를 옮기는 효과를 낼 수 있다니, 중세인들에게는 천지개벽할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전보' 대신 '전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충격만큼 대단했겠지요. 비트코인은 '미래의 신용장'이 될 수 있을까요?
피보나치의 수학적 공헌도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주가차트의 되돌림을 예상할 때 주로 사용하는 피보나치수열만 해도 그 원리와 독창성이 대단한데, 그 어려운 회계의 기초를 마련하고 세상에 널리 알리는 베스트셀러를 저술하기도 한 그의 능력에 역시 천재는 달라도 뭔가 크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뭐 하나 제대로 하기도 벅찬데 말입니다.
3부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근대 화폐 시스템의 형성과 금본위제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금본위제가 필연적으로 디플레이션을 유발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흔히 디플레이션이라고 하면 물건 가격이 싸지는 것을 생각하는데,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통화량에서 오는 영향입니다. 통화 공급량이 감소하거나 정체되면 상품 가격과 임금은 하락하고, 기존의 자산 가치가 상승하면서 실질 부채가 증가합니다. 사람들은 줄어드는 임금과 늘어나는 부채, 그리고 내일 더 싸질 거라는 기대감에 돈을 쓰지 않습니다. 이는 경제를 멈추게 만들며 사회 전반에 걸쳐 패배주의와 냉소주의를 조장하는 악순환을 불러옵니다. 물건값이 싸지니 좋은 거 아닐까요? 내 월급도 같이 싸진다면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인플레이션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30년 동안 고통의 디플레이션을 겪던 나라는 깔보던 옆 나라에게 따라 잡혔습니다.
19세기말 미국 농민들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철도 붐 시기에 농민들은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금본위제로 운영되는 달러로 빚을 졌습니다. 금의 가치와 연동된 달러의 가치는 계속 오르는데 농산물 가격은 계속 떨어지니 농민들은 엄청난 부채의 늪에 빠졌습니다. 빚은 100달러 그대로인데 내가 파는 밀 한 포대의 가격은 10달러에서 5달러로 줄어든다면, 수입은 줄어들고 돈을 갚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악몽 같은 상황이 펼쳐집니다.
이러한 디플레이션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금본위제에는 통화가치 유지라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금본위제로의 회귀를 원했고 오즈의 마법사의 작가인 프랭크 바움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오즈의 마법사>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등장하는데, 노란 벽돌길은 금본위제를 상징하며 원작 소설에서 나오는 도로시의 은색 신발은 은본위제 지지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이 동화가 금본위제에 관한 은유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있었으나, 이렇게 구체적인 설명은 처음 접했습니다. 듣고 보니 제목인 'OZ'와 금의 무게 단위인 온스(oz)가 철자가 같은 것도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도로시가 에메랄드 시티에서 만난 존재가 허상의 마법사였듯이, 금본위제도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허망한 꿈이라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원하지만 이어질 수 없는 사랑 노래처럼.
금본위제가 화폐의 부족현상과 디플레이션을 가져온다면 반대로 돈을 너무 많이 찍어내면 어떻게 될까요? 이에 대해 우리는 '인플레이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하이퍼인플레이션 사례가 그 극단을 잘 보여줍니다.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천문학적 배상금을 갚아야 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돈을 찍어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고, 그 결과 화폐 가치가 휴지보다 못해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초고물가에서는 누구나 가난해질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환차익 등을 통해서 돈을 벌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독일에서도 '라프케(Raffke)'라 불리는 투기꾼들이 등장하여, 대다수가 모든 것을 잃는 와중에도 환율 차익으로 부를 축적하며 사치와 향락, 투기 광풍을 조장하며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비난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선망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도덕적 해이와 극심한 양극화를 불러일으켜 혁명이나 전체주의 독재가 등장하기 딱 좋은 환경이 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토마스 피케티가 그의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언급한 내용이 떠오릅니다. 피케티는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을 앞지르게 되면,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속도보다 재산이 스스로 불어나는 속도가 더 빨라진다고 지적하며, 이 현상이 지속되면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어 사회적 역동성이 사라지고, 과거의 부가 현재의 노력을 압도하는 '세습 자본주의'로 회귀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세습자본주의는 사회 전체에 방만함, 무기력, 도덕적 해이를 양적 완화처럼 쏟아내며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킵니다. 이것이 임계점에 달하면 혁명이 일어나고 문명은 후퇴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토마스 피케티는 양극화 현상은 이제 되돌릴 수 없다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저 또한 금융소득을 얻으려는 투자자의 입장에 있지만 노동의 가치는 여전히 존중되어야 하며, 현재와 같이 이해할 수도 없는 파생상품이 난무하는 복잡한 금융시장의 형태와 투자 실패를 국민의 세금으로 구원해 주는 일그러진 금융 자본주의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했는데 따끔하게 혼내지 않고 오냐오냐하기만 한다면 결국 나중에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개인이 괴물이 되어가는 금융의 자기 진화를 막기는 역부족이라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라는 조바심이 납니다.
어두운 미래의 예언은 디스토피아만큼 우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성장이 전체를 이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자주 고민하곤 합니다.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기업에는 성장 동력을 제공하며, 개인에게는 기회를 제공하여 전체의 효용을 증가시킬 수 있는 부의 재분배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큰 '부'를 가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항상 가슴속에 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며 많은 분들과 지식을 나누는 것도 제 오랜 고민에서 나온 나름의 해답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깊게 고민하고 좋은 답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투자를 공부하면서 가장 원하는 것입니다.
4부에서는 금본위제를 버리고 신용본위제로 이행하는 과정을 다룹니다. 주식회사의 탄생과 네덜란드인들이 만든 최신 금융기법은 금융 부르주아의 탄생을 이끌었고, 주식이라는 황홀한 마법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밑도 끝도 없는 버블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욕망은 결코 제어할 수 없고 수요는 언제나 공급보다 앞선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급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공급 만능의 법칙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새 정권마다 주택 공급 확대 정책을 들고 나오지만 잘 먹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목마릅니다. 가격 상한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가 억지로 틀어막는 가격은 오히려 공급을 줄이고, 줄어든 공급이 암시장을 통해 거래되면서 물자는 더 부족해집니다. 부족해진 물자로 인해 물가는 정책을 시행하기 전보다 더 올라가고 국가의 재정상태는 악화일로를 걷습니다. 이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 시절에 가격 상한제를 도입했다가 물가가 천정부지로 솟구쳤던 역사적 사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솟아오른 물가는 훗날 ‘강철의 연준술사’라 불리던 폴 볼커(Paul Volcker)의 등장으로 이어집니다.
닉슨 대통령 이야기가 나왔으니 금태환 중지 선언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1971년 닉슨 대통령이 금태환을 중지하면서 달러는 금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었습니다. 이후 화폐는 정부의 신용을 기반으로 한 '약속'이 되었습니다. 금으로 바꿔준다는 약속이 사라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정부를 믿으시오"라는 약속뿐이지요.
그런데 냉정한 국제 관계에서 믿음으로 대동단결하자는 그런 달달한 이야기가 가당키나 할까요?
미국도 이걸 알기에 신용 기반의 달러패권을 유지하고자 사우디와 전략적 관계를 맺으면서 '페트로 달러'를 성사시키기도 했습니다. 석유 결제는 달러로만 한다는 이 약속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패권국이 자국 화폐의 힘, 혹은 발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정학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이 2026 국방전략(2026 National Defense Strategy, NDS) 보고서를 내면서 방위의 핵심을 '자국 수호'로 설정하였습니다. 이는 기존의 세계경찰 역할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며 이는 달러 패권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이 된 '페트로 달러'가 흔들릴 가능성이 커졌음을 의미합니다.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힘의 공백까지 생기게 될 중동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흘러갈까요?
저자는 통화 공급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을 설명합니다. 중앙은행이 투입하고 시장이 반응하는 '투입설'과 시장 수요가 중앙은행을 끌고 다니는 '견인설'입니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투입설을 가르치지만 저자는 견인설이 훨씬 현실에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미국 연준과 상관없이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유로달러는 중앙은행과 관계없이 시장의 수요에 따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폭락하는 시장에서 연준이라는 어미새는 현기증 난다며 라면 끓여달라는 아기새들에게 어쩔 수 없이 먹이를 줍니다. 마치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Wag the Dog'처럼 시장이 중앙은행을 끌고 다니는 모습은 우리가 주식시장의 위기 때마다 보는 반등의 모습입니다.
많은 투자자들은 연준 파월 의장의 한마디 한마디에 마치 신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귀를 기울이며 단어 하나하나마다 나름의 분석을 합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 또한 연준 의장의 한마디에 시장이 움직이며, 연준의 정책에 따라 장기적 흐름이 바뀐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중앙은행이 아닌 시장의 수요가 정책을 만들어낸다고 말합니다. 일견 맞는 것이, 앞서 예시를 든 것처럼 금융정책의 충격 속에서 시장이 추락할 때마다 사람들은 "여기 지하실에 사람 있어요!"라며 '구조 요청'을 보냈고, 정부는 그때마다 소위 '연준 풋'을 행사하며 구조대를 보냈습니다. 대공황이나 베어스턴스 은행 사태 등 굵직한 금융위기 때에도 언제나 연준은 경제위기 가능성을 이유로 쓰러져 가는 마린에게 스팀팩을 주입했습니다. 경제학 교과서에는 투입설이 정석으로 적혀 있지만, 실제 전쟁터는 군인들이 보내는 다급한 무전에 의해 구원병을 보내고 대포를 쏘는 견인설이 훨씬 잘 맞습니다.
4부의 마지막은 패권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미국과 달러의 탄생, 그리고 바지 지퍼 단속을 잘하지 못하여 대통령이 아닌 죽음을 손에 쥔 알렉산더 해밀턴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미국 금융의 아버지가 사생활 관리에는 소홀했다니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5부의 제목 "인간의 손을 떠난 돈"은 현대 화폐 시스템의 본질적 변화를 포착합니다. 과거에는 돈이 내 손에, 내 주머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돈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화면 속에만 존재하며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듯 우리네 월급도 통장을 스쳐 지나갑니다. 지금 우리 주머니 속 현금은 전체 통화량의 10%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손에 쥘 수 있는 '화폐'보다 은행이 신용이라는 마법으로 만들어내는 '금융'이라는 돈이 훨씬 많다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돈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며, 보이지 않는 세금을 매깁니다. 우리는 유동성을 체크할 때 반드시 M2 통화량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주 봐야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통찰은 처음도 그다음도 "화폐의 수요는 항상 공급보다 많다"는 명제였습니다. 이 문장은 단순해 보이지만 화폐 경제의 본질을 꿰뚫습니다. 인간의 뇌는 진실보다 허상에, 실질보다 명목에 집중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임금이 5% 상승할 때 인플레이션이 2%라면 실질 임금 상승률은 3%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5%에 주목합니다. 은행에 적금을 들 때도 그 표면 이자율에 집중할 뿐, 인플레이션을 뺀 실질 이자율을 고민하진 않습니다.
이런 인간의 심리적 특성 때문에 화폐는 고정이 아닌 조금씩 늘어나야 좋습니다. 적당한 인플레이션은 우리에게 임금 상승이라는 심리적 만족감을 주고, 기존 부채를 실질적으로 탕감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각국 중앙은행이 2% 내외의 물가상승률을 목표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라는 수치는 측정 오차를 감안하고, 명목금리가 0% 아래로 내려가기 어려운 현실적 제약을 고려한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를 실험했다가 부작용을 겪었고, 스웨덴도 -0.5% 금리를 시도했다가 결국 포기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왜 각국 중앙은행이 그토록 2%를 고집하는지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신용의 과도한 팽창도, 신용의 과도한 축소도 모두 부의 불평등한 재분배를 가져온다"는 통찰입니다. 고통스러운 디플레이션 시기에는 부채를 진 중산층이 몰락하고 이들이 헐값에 판 자산을 사들인 부유층은 더 부자가 됩니다. 반대로 인플레이션 시기에는 고물가로 인해 사람들은 돈을 쓸 수 없고 불경기가 찾아옵니다. 이때 중앙은행이 경기부양을 위해 돈을 풀면 그 돈은 침체된 산업이 아닌 신용이 높은 부유층에게 낮은 금리로 먼저 분배되고 다시 자산가격을 끌어올립니다.
저자가 양적완화의 본질은 불평등의 심화라고 말한 것은 이 정책이 사실은 다수를 위한 정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론과 TV에서는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한다는 기사가 나오지만 사실은 그 돈은 기존의 부를 잡고 있는 부유층을 더욱 살찌울 뿐입니다.
현대 금융에서는 인플레이션 혹은 디플레이션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존재하며 두 방향 모두 장점만큼 치명적인 단점들이 존재합니다. 화폐 정책의 핵심은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외줄 타기와 비슷한 것인데, 역사적으로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은 이것이 정말 어려운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적완화는 경제에게 놓는 모르핀 주사와 같습니다. 처음엔 통증이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지지만, 내성이 생기면 더 강한 용량이 필요하고, 끊으려 하면 금단 증상이 옵니다. 똑같은 자극이 반복되면 더 이상 느낄 수 없고 더 큰 자극을 원하듯, 기존의 금리인하보다 훨씬 더 매운맛인 양적완화를 맛본 시장은 이후 웬만한 부양책에는 반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경고신호가 울림에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아프면 정부가 또 살려주겠지"라는 안이함에 빠져버린 스스로 나을 의지가 없는 환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부의 불평등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양적완화의 새롭고 신비롭고 짜릿한 경기부양이 계속된다면 종국에는 체제의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지점에서 저자와 덕왕은 똑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 저자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가져보고자 합니다. 한쪽 이야기만 듣고 판단하는 것은 덕왕스타일이 아니니까요.
우선 맥윌리엄스는 비트코인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시각을 보입니다. 금은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자산으로서의 유효성이 검증되었지만, 비트코인의 역사는 고작 15년 정도에 불과하다며, 차라리 케냐의 엠페사(M-Pesa)가 가상화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효용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자의 비트코인 비판은 현재의 경제학적 관점과 가치 판단 기준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맥윌리엄스는 전통적인 화폐의 기능, 즉 교환의 매개, 가치 저장, 계산 단위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비트코인을 평가합니다. 평가는 타당하지만 이 기준 자체가 기존 화폐 시스템에서 도출된 것이라면,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을 평가하기에 적합한 도구인지 의문이 듭니다. 마치 자동차를 마차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저자가 칭찬하는 엠페사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이 가능합니다. 엠페사는 분명 금융 포용의 훌륭한 사례입니다. 2023년 기준 케냐 GDP의 약 59%가 엠페사를 통해 흐르고, 6,600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2007년 출시 당시 케냐 성인의 20% 미만이 은행 계좌를 보유했으나, 엠페사 덕분에 금융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엠페사는 본질적으로 케냐 실링에 연동된 '자국 내 결제 시스템'입니다. 이것을 국경을 넘나드는 거시적 화폐 흐름이나 국제 기축통화의 대안과 비교하는 것은 맥락이 다릅니다. 엠페사가 해결한 문제는 '은행 없는 사람들의 금융 접근성'이라는 구체적이고 지역적인 문제였습니다. 반면 비트코인이 제기하는 질문은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가치 이전 수단이 가능한가'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둘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맥윌리엄스의 전체 논지를 흔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핵심 통찰, 즉 화폐의 본질이 수천 년간 변하지 않았다는 점, 신용 팽창과 수축이 반복된다는 점, 그리고 어떤 화폐 시스템도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만 새로운 것을 평가할 때는 기존의 잣대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글을 마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읽는 분들이 계시니, 혼자였다면 귀찮아서 넘어갔을 질문들을 끝까지 파고들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비트코인 책 두 권을 더 읽고, 주말에도 자료를 찾았습니다. 누군가 같이 공부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글 쓰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2024년 12월 말부터 2025년 1월 말까지 오태민 작가의 <더 그레이트 비트코인>과 사이페딘 아모스의 <비트코인 화폐의 미래: THE FIAT STANDARD>를 추가로 읽으며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사이페딘 아모스는 비트코인을 옹호하는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입니다. 그의 핵심 논지는 비트코인의 공급이 2,100만 개로 고정되어 있어 인플레이션에서 자유롭고, 중앙권력의 통제를 받지 않으므로 정부의 비효율적 자원 배분을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태민 작가는 비트코인을 "문명사적 사건"으로 정의하며 더 철학적인 접근을 취합니다. 그 또한 사이페딘 아모스처럼 "가격이 상승해도 공급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공급의 비탄력성이 비트코인의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두 저자 모두 비트코인의 공급 제한성을 통한 가치 유지와 탈중앙화를 통한 비용 효율성과 신속성, 중립성 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중간중간 떠오르는 의문에 대해서는 추가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비트코인에는 분명한 특성들이 있습니다.
첫째, 공급의 예측 가능성입니다. 총 2,100만 개라는 한도가 코드로 정해져 있어 정부의 자의적인 통화 증발이 불가능합니다. 중앙은행 총재의 기분에 따라 돈이 찍히는 일은 없습니다.
둘째, 검열 저항성입니다. 비트코인 거래는 특정 정부나 기관이 막기 어렵습니다. 이는 특수한 상황에서 실질적인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특성이 양면성을 가진다는 점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범죄의 도구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막기 어렵다고 해서 완전한 익명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완벽한 자금세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불법 거래에 사용된 비트코인을 대규모로 압류한 바 있습니다. 2020년 미국 법무부는 암시장 웹사이트 '실크로드(Silk Road)'와 연관된 해커로부터 69,370 BTC를 압류했으며, 2024년 12월 30일 연방법원은 약 65억 달러 상당의 이 비트코인 매각을 승인했습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암호화폐 압류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나라들에게는 비트코인이 큰 기회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자주 보지만,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나라는 자산동결을 당합니다. 이는 국제 SWIFT망을 통해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최근에는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가 자산동결을 당했고, 이를 옆에서 쳐다본 중국은 금을 쓸어 담고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멀쩡히 일해서 번 돈을 찾을 수 없고, 그 돈이 오히려 적국의 재건에 쓰이는 모습을 보면 지금의 국제 결제환경은 중립적이지도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특히 현재의 국제 결제망은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기에, 미국과 척을 지는 나라들에게 비트코인은 매력적인 선택지로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국경 없는 가치 이전입니다. 비트코인은 24시간 365일, 국경과 시간에 상관없이 가치를 저렴하고 신속하게 이전할 수 있습니다. 패권국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운데 빠르고 저렴하기까지 하면 안 쓸 이유가 없습니다.
번호표 뽑고 기다릴 필요도,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수수료까지 싸다는 건 분명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비트코인 옹호론에는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먼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모스는 비트코인 채굴이 '쓸모없는' 저가 전기를 소비하며 이것이 비트코인의 경쟁력을 더욱 높인다고 주장합니다. 세상 어딘가에 남아도는 전기는 분명히 있고, 비트코인 채굴은 그런 전기를 활용하므로 그리드 전기를 빼앗지 않으며 상생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2025년 현재의 전력 시장 상황은 이 주장과 상당히 다릅니다.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 성장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시쳇말로 먹고 죽을래도 없는 전기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4년 글로벌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약 415 TWh로 전 세계 전력 소비의 약 1.5%를 차지했으며, 2030년에는 945 TWh로 두 배 이상 증가할 전망입니다. 미국의 경우, 2024년 데이터센터가 전체 전력 소비의 4% 이상(183 TWh)을 차지했으며, 버지니아주에서는 무려 26%에 달합니다.
미국 북버지니아의 데이터센터 집중 지역에서는 그리드 연결 대기 시간이 7년에 달한다고 합니다. 유럽에서는 전기 부족으로 데이터센터 증설이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AI 시대에 '남아도는 전기'라는 전제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경쟁에서 과연 비트코인이 하이에나처럼 버려진 고기만 먹으면서 클 수 있을까요?
더 중요한 것은 전기의 '질'입니다. AI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이며, 이를 위해 높은 가격을 기꺼이 지불합니다. 반면에 비트코인 채굴은 중단 가능한 저가 전기에 의존해야 하는데, 데이터센터 혼자 쓰기도 부족한 지금 시점에 '잉여 저가 전기 사용'이라는 주장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비트코인 채굴 업체들 중 일부가 AI 데이터센터 사업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같은 전기를 쓸 때 AI 쪽이 수익성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채굴기 돌리느니 AI 돌리는 게 낫다는 판단이지요. 이런 현상은 아모스의 에너지 지속가능성 논거와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음으로 시장 실패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모스는 중앙권력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본 배분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주장하며, 통제받지 않는 비트코인이 자본의 효율성을 높이고 문명의 발전속도를 높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인간의 이기심만으로 움직이는 자본이 항상 효율적일까요? 경제학에서 오랫동안 연구해 온 '시장 실패' 개념을 생각해 보면, 이 주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트코인의 에너지 소비는 '외부성의 전형'입니다. 채굴자는 온난화 비용을 반영하지 않고, 그 비용은 사회 전체가 부담합니다. 규제 없는 비트코인 네트워크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주장과 달리, '자유로운 자본 배분'은 환경과 같은 공공재 문제에서 무력합니다. 영국의 전력 민영화 후 요금이 상당히 오른 사례나, 병원 민영화가 진료 서비스의 불균형을 가져온 사례를 보면, 규제 없는 자본이 항상 효율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아모스가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 학파의 거두 하이에크도 순수한 자유 시장만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이에크조차 공공재의 정부 제공이나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의 필요성을 인정했습니다.
오태민 작가의 책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철학적 통찰은 흥미로웠지만, "현상이 이미 벌어졌으니 믿으라"는 식의 논증에는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현상이 벌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영구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예상한 결말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가슴을 가질수록 말은 차가워야 하며 검증은 날카로워야 합니다. 그의 글은 흡사 불꽃에 휩싸인 것 같았습니다.
다음으로 화폐로서의 비트코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비트코인은 화폐일까요? 이 질문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습니다. 화폐의 세 가지 기능인 교환의 매개 수단, 가치 척도(회계 단위), 가치 저장 수단 중에서 지금의 비트코인은 아직 어느 것 하나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환의 수단으로써 사용하기에는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성이 여전히 큰 편입니다. 2025년 1분기 기준 비트코인의 연간 실현 변동성은 약 52%로, 금의 약 15.5%에 비해 3~4배 높습니다(NYDIG 리서치 기준). 하루에 몇십 프로가 오르내리는 아찔한 변동성 때문에 일상적인 거래 매개나 가격 표시 기준은 물론 가치를 저장하는 데에도 불안함이 따릅니다.
교환 수단으로써의 어려움은 기술적 한계에도 있습니다. 비트코인의 레이어 1 온체인 처리량은 초당 3~7건 정도입니다. 우리가 카드회사로 알고 있는 Visa는 사실 "카드사"라기보다, 여러 은행이 발급한 비자 브랜드 카드들이 서로 쓸 수 있게 해주는 '네트워크 회사'입니다. 실제 신용제공과 청구·수납은 각 발급은행이 맡고, VISA는 승인·정산을 위한 결제망과 규칙, 기술 인프라를 제공하지요. Visa는 이 과정을 초당 수만 건 처리합니다. 초당 10건도 처리하지 못하는 비트코인과 비교하면 과연 비트코인이 대중적 결제 수단이 될 수 있는지 물음표가 따라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결점을 극복하기 위해 라이트닝 네트워크 같은 2차 레이어 솔루션이 등장했지만, 아직은 대규모 채택에 한계가 있습니다.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했던 엘살바도르의 경험도 참고할 만합니다. 2021년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했던 이 나라는 금융 포용 확대와 송금 비용 절감을 기대했습니다. 사이페딘 아모스는 이 과정에서 엘살바도르의 경제 고문의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비트코인 사용률은 초기 관심 이후 꾸준히 하락했고, 송금 시장에서의 점유율도 미미했습니다. 결국 2025년 초 엘살바도르는 IMF 대출 조건으로 비트코인의 법정화폐 지위를 사실상 폐지했습니다. 물론 엘살바도르라는 특수한 환경의 한 사례만으로 비트코인의 가능성 전체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국가 단위의 법정화폐 채택이 기대만큼 순조롭지 않았다는 점은 생각해 볼 만합니다.
비트코인에게는 스테이블 코인도 경쟁자입니다. 비트코인이 자산으로 작동하려면 수요가 몰려야 하는데, 미국 단기채와 연동된 스테이블 코인은 많은 자금을 흡수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달러의 약세는 용인해도 달러 패권 자체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왜 스테이블코인이 비트코인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는지 그 논리 구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비트코인의 기술적·경제적 한계가 확인되었습니다. 높은 변동성, 낮은 처리 속도, 에너지 문제 등으로 인해 비트코인은 '일상적 화폐'보다는 '투기적 자산'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 비트코인이 기축통화를 완전히 대체할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지털 화폐에 대한 수요 자체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비트코인을 완전히 금지하기보다 '규제된 스테이블코인 활성화'라는 전략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2025년 7월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GENIUS Act(스테이블코인 규제법)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미국 재무장관 스콧 베센트는 이 법안에 대해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금융의 혁명"이라고 선언하며,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2030년까지 약 3조 7천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베센트의 전략은 단순 명쾌합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은 발행량의 100%를 미국 단기 국채나 현금 등 유동성 높은 자산으로 보유해야 합니다. 이는 곧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커질수록 미국 국채에 대한 수요도 함께 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센트는 "번성하는 스테이블코인 생태계는 민간 부문의 미국 국채 수요를 견인할 것이며, 이는 정부의 차입 비용을 낮추고 국가 부채를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현재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는 약 3,000억 달러이며, 대표적인 발행사인 테더(Tether)와 서클(Circle)은 이미 미국 국채의 주요 매수자가 되었습니다. 베센트 장관은 테더와 서클 경영진과 직접 만나 단기채 발행 비중 확대를 논의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미국은 돈을 풀면서도 인플레이션을 자극하지 않고 기업의 혁신을 가속하는 묘수를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테이블 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단기채를 발행하여 돈을 풀고 기업에게 흘러가는 자금 외의 유동성은 다시 스테이블 코인 구입에 필요한 단기채를 매입하는데 씁니다. 베센트가 정말 머리가 보통인 양반은 아닙니다. 미국 정부는 이 방법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아닌 다른 대통령이 와도 이 정책은 향후 몇십 년은 지속될 확률이 높습니다. 이 정책은 미중 패권전쟁에서 미국의 경쟁력과 중국에 대한 대항력을 유지하는 데 가장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부 전문가들은 스테이블코인이 국채 순수요를 증가시킨다는 주장에 회의적입니다. 스테이블코인을 구매하기 위해 머니마켓펀드(MMF)를 환매하면, 그 펀드가 보유한 국채가 매각되고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다시 국채를 매입하므로 순효과는 제로에 가까울 만큼 제한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의도가 명확한 만큼, 이 방향으로의 정책 드라이브는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비트코인과 스테이블 코인은 상생할 수는 있지만, 비트코인이 스테이블 코인을 넘으려 하는 순간 철퇴가 내려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트코인이 미국의 패권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다면 얼마든지 정책적으로 스트레스를 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적당히 먹고 나와야지라는 보통의 생각이 가장 옳을지도 모릅니다.
세 권의 책을 읽고 여러 자료를 살펴본 후, 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물론 미래는 아무도 모르기에 확신에 찬 예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현재까지의 정보를 바탕으로 조심스럽게 추론해 볼 뿐입니다.
저는 비트코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비트코인은 화폐가 아닙니다. '디지털 자산'이라고 불러야 옳습니다. 비트코인으로 실제 물건을 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비트코인을 받으며 물건을 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열광하는 비트코인으로 과연 얼마나 많은 거래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미래는 다를 것이라고 말하기엔 엘살바도르의 모습은 실패한 현재를 보여줄 뿐입니다.
리디아인과 피렌체인의 지혜를 떠올려 봅시다. 화폐는 잘게 쪼갤수록 경제의 심장을 더 잘 뛰게 만듭니다. 비트코인을 주고받으면 거스름돈이 생길까요? 잘게 쪼개서 물건의 값을 매기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가치는 또 어떤가요? 금처럼 수천 년 동안 안전자산으로 증명된 것도 아닙니다. 금도 변동성이 있지만 비트코인에 비하면 장난인 수준입니다. 자산은 쉽게 보관이 가능해야 합니다. 젊은 세대에게는 보관이 어렵지 않겠지만 장년층은 어떤가요? 장롱에서 금반지 꺼내듯 쉽게 꺼내 팔 수 있는 것일까요? 콜드 월렛을 사용하며 애지중지 관리한다 해도 잃어버리면 끝이고, 기계가 고장 나면 또 어떤가요?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면 쇼핑사이트 비번 찾기처럼 쉽게 되찾을 수 있을까요? 그걸로 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솔직히 어떤가요? 비트코인을 통해 자본의 효율성을 높이고 문명이 발전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나요? 아니면 비트코인의 상승으로 거머쥐게 될 거대한 달러 지폐더미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고 있나요? 부의 단위를 비트코인으로 계산하고 있나요? 아니면 달러로 계산하고 있나요?
저는 이 질문에서 다른 답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비트코인은 화폐가 아니며 앞으로도 '화폐'가 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적 확장성에도 한계가 있고,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으며, 비밀번호를 잊으면 그걸로 끝이며, 실험은 실패했고 노년층에게는 불친절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자산'으로서의 역할은 부분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과의 비교가 유용한 것 같습니다. 금도 한때는 화폐였지만, 지금은 화폐가 아닌 자산입니다. 일상 거래에는 쓰이지 않지만, 가치 저장 수단이나 포트폴리오 다변화 수단으로써의 역할은 합니다. 비트코인도 비슷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성이 충분히 낮아진다면, 국가 간이나 기업 간의 대규모 거래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존 SWIFT 시스템의 일부를 보완하며 대량 거래를 처리하는 정도의 역할이라면 수수료는 오히려 저렴하기에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달러 결제망 전체를 대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축통화의 자리는 그렇게 쉽게 내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현재 비트코인 시가총액은 약 2조 달러로, 금 시가총액의 15~20% 수준입니다. 이미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자산 클래스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비트코인이 국제결제망의 일부를 대신할 수 있다면 그때는 큰 상승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비트코인의 분배 구조를 보면, 소수의 초기 채굴자들이 상당 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2024년 10월 기준, 상위 100개 주소가 전체 비트코인의 약 15%를 보유하고 있으며, 1,000 BTC 이상을 보유한 '고래' 주소들이 전체 공급량의 약 24%를 차지합니다. 채굴도 대형 채굴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탈중앙화'라는 이상과 달리, 현재의 모습은 새로운 형태의 중앙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집중 현상이 발생했을까요? 제도권 자본의 대규모 유입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2024년 비트코인 ETF가 승인된 이후, 블랙록, 피델리티 같은 거대 자산운용사들이 막대한 자금으로 비트코인을 매입했습니다. 탈중앙화를 외치던 비트코인이 결국 월스트리트의 품에 안긴 셈입니다. 저 심연에서 코인을 움켜쥔 채 움직이지 않는 존재들을 우리는 '고래'라고 부릅니다. 바닷속 고래들은 아직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처럼 인류에게 새 불을 주려는 건지, 아니면 그냥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건 지금의 모습이 사토시 나카모토가 주장했던 진정한 탈중앙화의 가치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트코인은 탈중앙화를 외치며 오히려 제도권 안으로 들어왔고, 비트코인 자체의 경쟁력은 오히려 거대한 제도권 금융세력들의 자금으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마치 새로운 시대를 외치던 작은 정당이 정권을 잡은 후 여러 거대 당들과 연정을 구성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의 비트코인의 가격 뒤에는 제도권의 금융권력들이 너무 많이 붙었습니다. 이는 오히려 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모습과 훨씬 가깝지 않을까요?
<머니: 인류의 역사>와 비트코인 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혼자 읽었다면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하고 정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맥윌리엄스가 말한 것처럼, 결국 돈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돈은 모두를 위해 생겨나 본능에 의해 움직이다 권력을 만들어내고, 그 권력은 역설적이게도 불평등을 만들어냅니다. 금이든, 달러든, 비트코인이든 그 본질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 화폐 시스템의 구축이 아니라, 그 시스템의 운영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체제는 그 태생부터 몰락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고 이는 비트코인도 마찬가지입니다.
TV에서는 매일같이 당신 옆에서 항상 지켜줄 거라며 힘내라는 은행들의 광고가 나오지만, 사실 정말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돈은 무엇일까요? 어떤 금융시스템이 우리를 버블과 절망의 시험에 들게 하지 않고 꾸준함과 정결함의 가치를 계속 존중할 수 있게 도와줄까요? 책에 나오는 넉살 좋게 생긴 아저씨와 아줌마가 돈을 주고받는 그 모습이야말로 돈이 가장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복잡한 것일수록 단순하게 생각하라는 ‘오컴의 면도날’처럼, 결국 돈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감상평은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도 재미있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덕왕의 생각을 비교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저와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들도 많으실 텐데,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댓글로 남겨주십시오. 그런 다양한 관점들이 서로를 성장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비트코인에 대해서는 저도 여전히 배우는 중이고, 열린 마음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확신에 차서 무언가를 주장하는 것보다 겸손하게 배우는 것이 더 현명한 자세일 테니까요. 훗날 비트코인에 대한 입장이 바뀌게 되더라도 저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지 소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머니: 인류의 역사> 말미에는 저자가 추천하는 참고 서적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도 정말 백미입니다. 읽은 책이 몇 권 나와서 좋아했고 또 몇 권은 바로 주문했습니다. 화폐와 금융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그 책들도 함께 읽어보시면 좋은 공부가 될 것입니다. 돈과 화폐에 대한 이해는 투자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주니까요.
마지막으로 오직 비트코인에만 투자하고 계시다면 일반 주식이나 원자재 투자에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비트코인은 그 자체로 가치를 만들어내거나 배당을 주지도 않습니다. 전통적 기업분석 방법으로는 비트코인의 내재가치는 0에 수렴합니다. 하지만 종이가 가치를 지닌 지폐가 되었듯이 사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전 적자투성이인 성장주의 밸류에이션 방법이 딱히 없었을 때 PSR(Price to Sales Ratio, 주가매출비율)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분석의 지평을 연 '켄 피셔'처럼 가상자산의 가치계산법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인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 길에서 마주한 비트코인이라는 이 희한한 자산은 정말로 화성에 갈 수도 있고, 또는 가다가 추락할 수도 있고, 어쩌면 출발조차 못한 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위험성에 대비해 상대적으로 검증된 자산에도 포트폴리오를 배분하여 전체 방어력을 높이는 것이 현명합니다.
처음으로 독자분들과 함께 책을 읽었습니다. 저 혼자 읽었으면 '음, 얜 뭐 좀 재밌네' 하고 끝났을 텐데, 여러분 덕분에 책 두 권을 더 읽고 새벽까지 자료를 뒤지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뭐가 되었어도 크게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여러분께 쓰는 독후감이라 평소와 달리 살짝 떨리기도 합니다. 마치 학창 시절 조별과제 발표 전날 밤 같은 긴장감이랄까요. 하지만 '저요!'를 외쳐주신 그 순간의 설렘을 기억합니다. 여러분이 있어 이 글이 존재합니다. 만약 이 번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아니 다음에도 책을 같이 읽고 싶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덕왕이 마음을 다해 다음 책을 골라오겠습니다.
그저 자신의 감상평과 함께 다시 “저요!”라며 힘차게 손을 들어주십시오.
오늘도 같이 공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엄
서적
데이비드 맥윌리엄스, 『머니: 인류의 역사』
오태민, 『더 그레이트 비트코인』
사이페딘 아모스, 『비트코인 화폐의 미래: THE FIAT STANDARD』
토마스 피케티, 『21세기 자본』
데이터 및 자료 출처
국제에너지기구(IEA), "Energy and AI" 보고서 (2025년 4월) -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 통계
미국 재무부, 스콧 베센트 장관 연설 및 GENIUS Act 관련 성명 (2025년)
NYDIG Research, "Comparing Bitcoin and Gold" (2025년) - 비트코인 변동성 52%, 금 변동성 15.5%
Morningstar, "Gold vs. Bitcoin: Why the Safe-Haven Debate Is Shifting in 2025" (2025년 11월)
Warwick Business School, "How M-PESA cornered the market in Kenya" - 2023년 기준 케냐 GDP의 59%가 엠페사 통해 거래
CCN, "Bitcoin Rich List" (2024년 10월) - 상위 100개 주소가 비트코인의 약 14.5% 보유
CoinDesk, Fortune, Decrypt 등 암호화폐 전문 매체의 미국 정부 비트코인 압류 관련 보도 (2024-2025년)
CNBC, "How the stablecoin bill gives Treasury Secretary Bessent a new tool to fund the US deficit" (2025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