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관세 전쟁이 만든 각자도생의 세계
안녕하세요. 덕왕입니다.
지난 1월 20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한 연설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연단에 선 인물은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였습니다. 골드만삭스 출신의 경제 전문가로,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와 300년 역사상 최초의 비영국인 출신으로 영국 영란은행 총재를 지낸 인물답게 냉철하면서도 날카로운 그의 연설은 청중석을 가득 메운 세계 지도자들과 기업인들에게 기립박수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앉아 있었습니다.
카니 총리의 연설은 미국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았습니다. 그의 비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강대국"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경제적 강압"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때마다, 청중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미국 대표단 좌석을 향했습니다.
카니 총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창문에 거짓 표어를 붙이는 일을 그만둬야 합니다."
이는 체코의 반체제 지식인 바츨라프 하벨이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할 때 사용했던 비유를 빌려온 것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창문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문구를 붙이는 채소 가게 주인은 그 문구를 믿어서가 아니라, 단지 권력에 순응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믿지 않는 거짓을 연기함으로써 체제는 유지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카니 총리는 지금의 국제 질서가 바로 그런 상태라고 진단했습니다. 모두가 "규칙 기반 국제 질서"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만, 아무도 그것이 제대로 작동한다고 믿지 않으며 강대국은 자기 편의대로 규칙에서 면제받고, 약소국은 눈치를 보며 참고 또 참는 세상이 되었다고.
"이 암묵적인 약속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돌리지 않고 바로 말씀드리자면, 지금 우리는 전환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알던 제도는 지금 이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연설이 끝난 직후에도 여유 있는 표정을 유지했지만 그날 밤, 그의 소셜 미디어는 불이 났습니다. 그린란드 인수 협상을 즉각 시작하겠다는 선언이 올라왔고, 캐나다가 중국과 손을 잡으면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협박도 이어졌습니다.
"대화의 정신"이라는 공식 주제로 열린 다보스 포럼은 아이러니하게도 "단절의 현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은 2026년 초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트럼프의 관세 전쟁이 촉발한 글로벌 무역 재편, 미국 빼고 돌아가는 세계 경제의 새로운 질서, 그리고 이것이 과연 제국의 종말인지, 아니면 또 다른 미국의 부활 전 진통인지를.
오늘 글은 여러 주제가 하나로 이어지는 긴 글이니만큼, 커피 한 잔 준비하시고, 편하게 앉아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2025년 2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취임 2주 차를 맞은 트럼프 대통령은 첫 번째 관세 폭탄을 발표했습니다. 대상은 캐나다, 멕시코, 그리고 중국. 캐나다와 멕시코에는 25%, 중국에는 10%의 추가 관세가 부과되었습니다. 명분은 언제나처럼 "무역 적자 해소"와 "국내 제조업 보호"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2025년 4월 3일, 트럼프 행정부는 전 세계 183개국을 대상으로 10%에서 50%에 달하는 ‘상호관세(reciprocal tariff)’를 확정 공표했습니다. 미국에 제품을 팔려면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이는 2018-2019년의 미중 무역전쟁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특정 국가가 아닌 전 지구를 대상으로 한 ‘보편적 보호주의’의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관세를 ‘동맹국의 안보 분담’과 연계했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 "그동안 미국이 대신 나라 지켜주며 공짜 평화 누리고 그 돈으로 미국에 물건도 팔고 좋았지? 하지만 이젠 안 돼"라는 논리입니다. 경제와 안보를 하나로 묶어 협상 테이블에 올린 것이죠. 일견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표현은 일찍이 국제정치에서 볼 수 없었던 파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트럼프의 입에서 이 협박이 나오자마자 전세계가 겁을 먹고 앞다투어 미국의 심기를 달래려 동분서주 뛰어다녔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의 세계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트럼프의 관세 폭탄은 각국을 겁먹게 했던 초반과 달리, 오히려 "미국 빼고 우리끼리 잘해보자"는 절박한 연대를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외부의 압력이 가해질수록 내부 결속이 강해지는 물리 법칙처럼 말이죠.
특히 인도의 행보가 눈에 띕니다. 인도는 독립 이후 70년 넘게 철저한 보호무역 정책을 유지해 온 나라입니다. ‘외제 자동차에 110% 관세’, ‘수입 위스키에 150% 관세’ 같은 정책으로 자국 시장을 굳건히 지켜왔습니다. 인도에서 수입차를 타는 건 그야말로 ‘부의 상징’입니다. 그런 인도가 2025년 5월부터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과의 FTA 협상을 시작으로, 연달아 5개국과 무역 협정 협상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극적인 변화는 EU와의 협상에서 나타났습니다. 19년간 지지부진하던 인도-EU 자유무역협정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갑자기 진전된 걸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미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트집 잡아 높은 관세를 매기자, 인도는 "그래? 그럼 유럽이랑 더 친하게 지내야겠네?"라고 판단한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 EU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느 추운 겨울날 드라마에서 “나.. 사실 너 좋아해.”라고 남주가 말하자 여주도 “나도 사실 널… 좋아한단 말이야. 이 바보!”라며 서로를 껴안는 장면처럼 말이죠.
미국이 유럽에도 관세를 때리자, 유럽 역시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인도라는 거대 시장을 열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두 절박함이 드라마처럼 운명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2025년 말부터 2026년 초 사이에 놀라운 일들이 연달아 터집니다.
첫째, 인도-EU FTA 타결. 2007년부터 시작해서 무려 19년간 지속되던 협상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습니다. 인도는 EU산 자동차 관세를 110%에서 10%로 단계적 인하하기로 합의했고, 와인은 150%에서 20-30%로, 위스키는 150%에서 40%로 낮추기로 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변화인지 감이 잘 안 오실 겁니다.
이것들은 지난 25년간 인도 정부는 "우리 농민과 제조업을 보호해야 한다"며 완강히 거부해 왔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완강함이 트럼프의 관세 한 방에 녹아버린 겁니다. 미국의 압박이 인도를 변화시킨 역설적인 결과입니다.
둘째, 메르코수르(Mercosur)-EU FTA 서명. 이건 더 드라마틱합니다. 1999년부터 시작된 협상이 무려 25년 만에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로 구성된 남미 경제 블록과 EU가 손을 잡은 것입니다. 세계 GDP의 약 30%, 7억 명 이상의 소비자를 포괄하는 거대 무역 블록의 탄생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TMI: 메르코수르 (MERCOSUR)
메르코수르(Mercosur)는 1991년 아순시온 협약을 통해 창설된 남미 공동시장으로, 회원국 간의 자유로운 무역과 인적 자원 이동을 목표로 하는 남미 최대의 경제 블록입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가 창립 회원국이며, 볼리비아가 2024년 7월에 정회원으로 공식 합류했습니다. 인구 약 2억 8천만 명, 국내총생산(GDP) 합계 약 3조 달러에 달하는 거대 시장으로, 전 세계 주요 농축산물 공급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베네수엘라는 2012년 가입했으나, 민주주의 원칙 위반 등의 사유로 2016년부터 회원 자격이 무기한 정지된 상태입니다.
이 협정이 25년간 막혀 있던 이유는 남미의 저렴한 쇠고기와 농산물이 유럽 시장에 쏟아지면 유럽의 농가가 몰락한다는 우려 때문에 프랑스, 이탈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이 번번이 제동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농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관세 위협이 더 무섭다"는 판단이 승리한 것입니다.
EU가 인도와 메르코수르와 맺은 두 협정을 두고 유럽 각국의 셈법은 서로 다릅니다. 격렬히 반대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과 달리 독일은 인도와 남미의 자동차 시장 확대에 군침을 흘리고 있고 스페인도 자국의 농산물과 공산품 수출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만 메르코수르와의 FTA 협정의 최종 발효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일부 국가들의 격렬한 반발로 인해 최종 의결이 무산되고 유럽 의회는 334표 대 324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이 협정의 적법성을 유럽사법재판소(ECJ)에 회부하여 최종 법적 검토를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 유럽과 남미의 거대한 경제 공동체의 탄생은 필연에 가깝습니다.
셋째, 캐나다와 중국의 밀착. 2026년 1월 14일부터 17일까지,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습니다. 이는 2017년 이후 무려 9년 만의 캐나다 정상의 방문이었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 에너지, 우라늄, AI 분야의 협력 양해각서가 체결되었습니다. 캐나다는 원유, LNG, LPG를 중국에 공급하기로 했고, 중국은 캐나다산 돼지고기, 카놀라, 해산물의 관세를 대폭 인하했습니다.
이는 매우 충격인 소식이었습니다. 왜일까요?
캐나다 에너지 수출의 98%가 미국으로 향합니다. 사실상 미국 한 나라에 올인한 구조인데, 이제 그 구조를 바꾸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미국이 우리를 홀대하면, 우리도 다른 손님을 받겠다"는 메시지입니다.
트럼프는 당연히 분노했습니다. "캐나다가 중국과 FTA를 체결하면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는 "중국이 캐나다를 산 채로 잡아먹을 것", "너희 사회 구조와 생활방식이 송두리째 파괴될 것"이라는 트럼프의 경고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맞으면 맷집이 늘듯이 한 번 관세 협박을 당해본 나라는 다음번에는 덜 무서워합니다. "어차피 맞을 거, 맞으면서 대안을 찾자"가 되어버리는, 쓰면 쓸수록 효력이 떨어지는 관세라는 무기의 역설입니다. 관세를 높여서 미국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려 했더니, 오히려 미국 없는 세계 경제 질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미국이 쏘아 올린 관세라는 "작은 공"이 전 세계 무역 체계라는 당구대에 부딪혀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자, 이제 다시 2026년 1월 다보스로 돌아가 봅시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연설은 단순한 비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각자도생의 시대"에 중견국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이자 자립의 선언이었습니다. 사실 캐나다 총리가 이 말을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캐나다는 수출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국가인 것은 물론 미국이 주축이 되어 영미권 5개국이 결성한 가장 핵심 정보를 공유하는 정보 동맹체인 'Five Eyes'의 멤버이기 때문입니다.
카니 총리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연설 초반에 하벨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채소 가게 주인이 매일 아침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문구를 창문에 붙이는 이야기 말입니다. 믿어서가 아니라, 모난 돌이 되기 싫어서.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그는 이것을 "거짓 속에 사는 삶(living within a lie)"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국제 질서가 바로 그런 상태라고 진단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캐나다와 같은 나라들은 소위 '규칙 기반 국제 질서'라는 체제 아래서 번영을 누렸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질서가 내세운 이야기 가운데 적잖은 부분이 진실과 다르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강대국은 자기들 편의대로 규칙에서 면제받기 일쑤였고, 무역 규칙도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우리도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 중심의 질서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쓸모가 있었습니다. 미국이 공공재를 제공했기 때문이었지요."
미국이 제공한 공공재란 무엇일까요? 해상 무역로의 안전 보장, 안정적인 달러 기반 금융 시스템, 분쟁 해결을 위한 세계경찰 역할. 이런 것들입니다. 수십 년간 보안관 역할을 하면서 세계 경제가 돌아갈 수 있는 판을 깔아주었습니다. 물론 그 대가로 미국은 가장 큰 이익을 가져갔지만요.
"그래서 우리는 창문에 표어를 붙이고, 매일 의식에 참여했습니다. 이 질서가 말하는 세상과 진짜 현실의 차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카니 총리는 이 암묵적 계약이 깨졌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암묵적인 약속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돌리지 않고 바로 말씀드리자면, 지금 우리는 전환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알던 제도는 지금 이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그는 ‘전환(Transition)’이 아니라 ‘단절(Rupture)’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연설을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전환이라면 방향을 바꾸면서도 연속성이 유지됩니다. 하지만 단절은 다릅니다. 기존의 것이 완전히 깨지고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카니 총리는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카니 총리는 그 이유를 명확히 지적합니다.
"강대국들은 경제 통합이란 제도를 무기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관세를 이용한 압박, 금융 인프라를 동원한 협박, 공급망을 이용해 약점을 공략해 쥐어 짜내겠다는 엄포가 이어졌습니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공동 번영의 토대’가 아니라 ‘강압의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예전에는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서로 피해를 주지 않았습니다. "네가 다치면 나도 다치니까." 하지만 지금은? "나만 안 다치면 되니까"로 바뀌었습니다.
이건 게임의 룰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중견국들에게 새로운 전략을 제시합니다. 이른바 ‘가치 기반 현실주의(value-based realism)’라고 이름 붙인 접근법입니다.
그는 캐나다는 원칙과 실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길로 나아간다고 선언했습니다. 근본적인 가치들, 각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인정하고, UN 헌장이 허락하는 한도 외에는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인권을 존중하면서도 실용적인 자세를 잃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결합입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지키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냉정하게 보겠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도, 트럼프식 거래적 현실주의와도 분명 다릅니다. 미국이 "거래"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중견국들은 "연대"의 논리로 대응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카니 총리는 연설에서 캐나다가 이미 실행에 옮기고 있는 정책들을 나열합니다. 유럽연합과 포괄적 전략 파트너십을 체결했고, 유럽 방위조달협약(SAFE)에도 참여합니다. 지난 6개월 사이 우리는 4개 대륙에서 12개의 무역·안보 협정을 맺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 카타르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새로 체결했고, 인도, 아세안, 태국, 필리핀, 그리고 메르코수르와의 FTA 협상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6개월에 12개 협정. 엄청난 속도입니다. 캐나다가 얼마나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중국과의 파트너십입니다.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 중 하나인 캐나다가 미국의 최대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과 손을 잡았습니다. 이건 단순한 경제 협력이 아닌, 미국에 대한 명확한 메시지입니다.
"형님. 제가 언제까지나 형님 밑에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마십시오."
카니 총리는 바로 트럼프 옆에서 그린란드 문제도 직접 언급했습니다. (다른 걸 떠나서 정말 용감합니다)
"북극의 주권에 관해 우리는 그린란드와 덴마크를 확고히 지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린란드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는 온전히 그린란드 주민들에게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청중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트럼프가 그린란드를 "사거나 빼앗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카니 총리는 정면으로 반박한 겁니다.
나토 헌장 5조에 대한 헌신도 재확인했습니다. 나토 헌장 5조는 회원국 중 하나가 공격받으면 전체가 대응한다는 집단방위 원칙입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나토의 존재 의의에 의문을 제기하고, "유럽은 미국 돈으로 방위비를 충당한다"며 비난하는 상황에서, 캐나다는 "우리의 헌신은 변함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연설의 핵심은 이 부분입니다.
"강대국끼리 경쟁하는 세상에서 그 사이에 낀 국가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강대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서로 경쟁할지, 아니면 강대국이 아닌 나라끼리 힘을 합쳐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낼지 말이죠."
이게 핵심입니다. 중견국들 앞에 놓인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습니다.
첫 번째 선택지는 강대국에 줄을 서서 눈치보기입니다. 기존 질서에 순응하면서 미국 편에 붙을지, 중국 편에 붙을지 선택하고, 선택한 쪽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남는 길입니다.
두 번째 선택지는 중견국끼리 연대하여 어느 한쪽에 종속되지 않고, 함께 힘을 합쳐 협상력을 키우는 제3세력을 만드는 길입니다.
카니 총리는 분명히 두 번째를 선택했습니다.
"각자 자기 요새를 쌓는 것보다는 공동의 회복력을 기르는 데 함께 투자하는 편이 훨씬 더 저렴합니다."
경제적 논리로도 연대가 유리하다는 겁니다. 혼자서 미국의 관세에 대응하는 것보다, 여러 나라가 함께 대응하는 게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이죠.
카니 총리는 강렬한 비유로 연설을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테이블에 앉지 못한다면, 그건 우리가 메뉴에 올라와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이는 냉정한 현실 인식입니다. 협상 테이블에서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못하면, 다른 나라들이 우리를 두고 거래하게 된다는 것.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선언합니다.
"그게 곧 캐나다의 길입니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또 자신 있게 이 길을 선택합니다. 우리와 함께 가려는 모든 나라에 이 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캐나다는 위험한 도전을 시작하며 전세계 중견국가들에게 초대장을 내밀었습니다.
한편 글로벌 리더들이 미국에 반기를 들고 있을 때, 트럼프 행정부는 국내에서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2026년 1월 7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 조나단 로스가 르네 니콜 굿이라는 37세 여성을 사살했습니다. 굿은 미국 시민권자였습니다. 세 자녀의 어머니이자 시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불법 체류자가 아니었습니다. 국토안보부 장관은 법대로 처리했다고 주장했지만 현장에서 촬영된 영상에서는 다소 과잉 대응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미니애폴리스 시장 제이콥 프라이는 사건을 "무모하다(reckless)"고 비판했습니다. 미네소타주 일한 오마르 연방하원의원도 "ICE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라며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18일 후, 또 다른 비극이 발생합니다.
2026년 1월 25일, 미니애폴리스에서 ICE 단속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습니다. 시위 현장에서 국경순찰대 요원이 알렉스 프레티라는 37세 남성을 사살했습니다. 프레티는 중환자실 간호사였습니다. 그 역시 미국 시민권자였습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프레티는 먼저 후추 스프레이를 맞았고, 쓰러진 상태에서 여러 발의 총격을 받았습니다. 18일 만에 같은 도시에서 두 명의 미국 시민이 연방 요원에게 사살당한 겁니다.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폭발했습니다.
1월 20일에는 "ICE 테러를 멈춰라(Stop ICE Terror)"라는 슬로건 아래 전국적인 시위가 조직되었습니다. 1월 30일에는 "일도 학교도 쇼핑도 없는 날(No Work, No School, No Shopping)"이라는 이름의 전국 동맹휴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미니애폴리스 시장은 "수만 명이 평화롭게 행진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충돌도 있었습니다. ICE 요원들과 시위대 사이의 대치가 계속되었고, 미네소타주와 미니애폴리스시, 세인트폴시는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ICE 요원들이 주민들의 시민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미니애폴리스 근교 브루클린 파크의 경찰서장 마크 브룰리는 기자회견에서 충격적인 증언을 했습니다.
"주민들이 아무 이유 없이 정지당하고, 체류 자격을 증명할 서류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는 신고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비번 중이던 우리 경찰관들도 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미국 시민이, 그것도 경찰관이, 자기 나라에서 "서류를 보여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는 처참합니다.
CNN-SSRS 조사에 따르면, 굿의 사망 직후 미국인의 56%가 해당 사격이 "부적절한 무력 사용"이라고 답했습니다. 단 26%만이 "적절했다"고 봤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ICE에 대한 인식 변화입니다. YouGov 조사에서 47%의 미국인이 "ICE가 미국을 더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고 답했고, 34%만이 "더 안전하게 만들고 있다"고 봤습니다.
로이터/입소스 조사에서 트럼프의 이민 정책 지지율은 39%까지 떨어졌습니다. 취임 초기 51%에서 12% 포인트나 급락한 수치입니다. 58%의 응답자가 ICE의 단속이 "지나치다(too far)"고 답했습니다. 프레티 사망 이후에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YouGov 조사에서 ICE 폐지 지지율이 역사적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심지어 공화당 지지자 중에서도 20%가 ICE 폐지에 찬성한다고 답했습니다.
트럼프의 이민 정책은 2024년 선거에서 그의 핵심 공약이었습니다. "불법 이민자 추방"은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정책이 미국 시민을 죽이는 결과로 이어지자, 지지 기반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위기가 심각해지자 트럼프도 어느 정도 물러섰습니다.
1월 27일, 그는 "국경 차르" 톰 호먼을 미니애폴리스로 파견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같은 날 미네소타 주지사 팀 월츠, 미니애폴리스 시장 제이콥 프라이와는 전화 통화를 하며 내용이 매우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며칠 전과 완전히 다른 태도였습니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트럼프는 월츠와 프라이를 "반란을 선동한다(inciting insurrection)"고 비난했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도 트럼프는 프레티를 사살한 요원에 대해 명시적인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모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만 말했습니다. 이것도 이례적입니다. 보통 트럼프는 자기편을 무조건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공화당 내부에서도 동요가 시작되었습니다. 상원 국토안보위원회 위원장 랜드 폴은 ICE, 국경순찰대, 시민권이민서비스국(USCIS) 수장들에게 2월 12일 청문회 출석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하원 국토안보위원회 위원장 앤드루 가르바리노도 유사한 청문회를 요청했습니다. 공화당이 행정부를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트럼프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강경 이민 정책이 자신의 핵심 지지 기반을 결속시키는 도구입니다. "불법 이민자 추방"은 MAGA 운동의 상징적인 요구 중 하나입니다. 이걸 후퇴시키면 지지자들의 실망을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그 정책이 미국 시민을 죽이고, 전국적인 시위를 촉발하고, 지지율을 깎아먹고 있습니다. 심지어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추진하자니 여론이 등을 돌리고, 후퇴하자니 지지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 중간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인에게 이보다 어려운 상황은 없습니다.
이 국내 위기가 대외 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지지율 급락의 위기를 대외적인 수단을 통해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린란드 분쟁과 이란 사태 개입 가능성, 그리고 관세 협박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내치’의 불안함은 지금의 상황을 파멸적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여러 번 보여줬습니다.
2026년 1월 30일, 금융 시장에 또 하나의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케빈 워시(Kevin Warsh)를 차기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으로 지명한 겁니다. 제롬 파월의 임기가 5월에 끝나면 워시가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됩니다.
이 발표가 나오자마자 금융 시장은 요동쳤습니다.
금(gold) 가격이 하루 만에 약 12% 폭락했습니다. 온스당 5,400달러 수준에서 4,800달러대로 떨어졌습니다. 은(silver)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무려 약 30% 넘게 급락해 1980년 이후 최악의 하루를 기록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달러와 장기 채권금리는 치솟았습니다.
케빈 워시는 55세의 경제학자이자 투자 전문가입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연준 이사로 재직했습니다. 이 기간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포함합니다. 그는 연준 안에서 위기 대응의 최전선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입장은 당시 다수파와 달랐습니다. 그는 연준의 양적완화(QE)에 비판적이었습니다. 금리를 낮추고 채권을 매입해서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정책에 반대했다는 얘기입니다. 2010년 연준 회의록을 보면, 그는 QE에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이런 입장 때문에 워시는 "매파(hawk)"로 분류됩니다. 매파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금리를 높게 유지하려는 성향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반대로 "비둘기파(dove)"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낮추려는 성향입니다.
최근 워시는 현 연준 의장 파월을 공개적으로 비판해 왔습니다. 지난해 CNBC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연준에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연준 현직자들에게 신뢰성 적자가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최근 그의 입장이 차기 연준 의장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다소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트럼프 진영에 윙크를 보내며 자신이 금리 인하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이 아닌, 합리적인 사람임을 어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은 전통적으로 변동성이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안전자산"으로 분류됩니다. 불확실성이 커지면 사람들은 금을 삽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금값이 오릅니다.
첫째, 인플레이션 우려. 화폐 가치가 떨어질 때 금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오릅니다.
둘째, 달러 약세. 달러가 약해지면 달러로 표시된 금 가격이 오릅니다.
셋째, 금리 인하 기대. 금리가 낮으면 유동성이 증가하고 금을 보유하는 기회비용이 줄어들어 금 수요가 늘어나고 가격은 오릅니다.
넷째, 정치적 불안. 세계가 불안정해지면 금이 오릅니다. 최근에는 러우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에 대한 일방적인 자산동결이라는 정치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중국이 금을 쓸어 담고 있습니다.
지난 1년간 금은 엄청나게 올랐습니다. 트럼프 2기의 불확실성, 관세 전쟁, 지정학적 긴장(베네수엘라 공습, 그린란드 위협, 이란 위기 등) 때문이었습니다. 은도 마찬가지로 급등했습니다.
(‘은’은 산업재의 성격을 띠고 있어 금과는 움직임이 다르며 산업 사이클에 의해 변동성이 커집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원자재 편을 쓰며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그런데 워시 지명이 이 흐름을 뒤집었습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워시가 연준 의장이 되면 연준의 독립성이 유지될지 모른다는 시장의 불안감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계속 금리 인하를 요구해 왔습니다. 애초에 많은 사람들은 트럼프가 자기 말을 잘 듣는 인물을 연준 의장에 앉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연준이 정치적 압력에 굴복해서 금리를 무리하게 낮추고, 이는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많은 사람들이 금을 사모았습니다.
하지만 과거 금리인하를 반대했던 '매파'적인 인물이 지명되자 시장은 "연준 독립성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겠구나. 금리인하가 마냥 쉽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라고 판단하며 자금이 빠져나오면서 금과 은이 폭락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역설이 있습니다.
트럼프가 원하는 건 금리 인하입니다. 그는 취임 이후 계속 파월을 비판하며 금리를 낮추라고 압박했습니다. 주식시장에 계속 돈을 땔감으로 넣어줘야 시장은 계속 상승하고 사람들은 부자가 된듯한 ‘부의 효과'를 느낍니다. 트럼프는 이 돈의 축제가 중간선거까지는 계속되길 원합니다. 또한 주택 시장을 살리고, 천문학적인 국가부채 이자 부담을 인플레이션을 이용해 살살 녹이기 위해서라도 금리 인하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트럼프가 지명한 워시의 행적은 지금까지는 매파에 속합니다. 왜일까요? 여기에는 트럼프가 원하는 사람과 반대되는 성향의 인물을 차기 연준 의장으로 앉힘으로써 시장을 안심시키고 미국 장기국채 금리를 안정시키려는 베센트 재무장관의 노림수가 들어있습니다.
물론 워시도 그에 화답하여 최근 입장을 바꿨습니다.
“오우,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야. 걱정은 노노. 돈 워리, 비 해피!”
사실 연준 의장이 되면 제도적 압력과 시장의 눈치 때문에 완전히 트럼프 말대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말 한마디가 시장에 미치는 파급력의 수준이 그전과 다름은 물론 연준 내 다른 위원들 다수가 현재 추가 금리 인하에 신중한 입장에 있음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가 과거에 매파였기 때문에 앞으로 금리 인하가 멈출 것이라거나, 아니면 임명해 준 트럼프를 위한 ‘은혜 갚은 까치'가 되기 위해 금리 인하를 할 거라는 한 방향으로의 확신은 위험합니다. 많은 금융 전문가들이 워시를 이념적 매파가 아닌 실용주의자로 봐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도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이 좋아 실용주의자지 사실은 기회주의자와 종이 한 장 차이지만요.
실제로 신념을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연준의장이라는 무거운 자리에서는 더욱 그렇겠지요. 여기에 전해지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1950년대부터 1970년까지 무려 19년간 연준 의장을 지낸 윌리엄 맥크치니 마틴 주니어는 "의장이 되면 작은 알약(pill)을 먹게 되어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라고 말하며 “그 약효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그의 후임인 아서 번즈도 취임 후 "나도 마틴처럼 작은 알약을 먹었다(I took Martin's little pill)"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진짜 알약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연준 의장직이 본래의 신념과 다른 결정을 내려야 할 수도 있는 그만큼 독이 든 성배와 같은 자리임을 풍자한 유머입니다. 말 그대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죠.
워시도 그 알약을 먹을 겁니다. 그 약효가 트럼프에게 충성하는 쪽으로 나올지, 아니면 연준의 독립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올지는 앞으로 몇 달간 그의 행보를 지켜봐야 알 수 있겠지요. 다만 연준 의장들의 계보를 살펴보면 권력에 대한 아첨보다는 이 방향이 맞다는 확신에서 -비록 그 결정이 나중에는 틀렸을지라도 - 정책을 결정한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아서 번즈 제외) 연준의장의 임기는 4년뿐이지만 권력에 빌붙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영원히 남게 되는데 자신이 그 대명사로 기록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중간선거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의 유보적 스탠스를 취하면서 2026년에 1회 정도의 금리 인하를 실시할 가능성이 지금으로선 가장 높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실제로 CNBC 분석에 따르면, 시장은 연준이 2026년에 1회, 2027년에 1회 정도의 금리를 인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이는 트럼프가 바라는 "공격적인 금리 인하"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결국 트럼프는 연준의 독립성 우려에 대한 시장의 발작을 막기 위해 워시를 선택했지만, 그 대가로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밀어붙이기는 어려워졌습니다. 그의 책사 베센트가 다음 수를 어떻게 둘지 정말 궁금합니다.
다만 당장은 금융 시장이 워시 지명을 "연준 독립성 유지"의 신호로 해석하면서 당분간은 트럼프가 연준을 완전히 장악할 것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했을지라도, 연말에 중간선거라는 빅이벤트가 있고 금리인하를 통한 유동성 공급으로 주식시장을 끌어올리려는 트럼프의 의지와 그에 대한 논리적 추론의 타당성이 살아있는 한, 금가격이 재상승할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큰 질문을 마주할 시간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트럼프의 관세 전쟁, 미국을 제외한 무역 블록의 형성, 내부의 정치적 혼란, 연준 의장 교체까지.
이것은 미국 패권의 종말일까요? 아니면 미국이 겪는 또 하나의 진통에 불과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두 명의 거장이 서로 다른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의 창업자 레이 달리오는 그의 저서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서 지난 500년간의 제국 흥망을 분석했습니다.
달리오의 핵심 주장은 이렇습니다.
"제국에는 '빅 사이클(Big Cycle)'이 있다. 부흥기, 절정기, 쇠퇴기의 세 단계를 거친다. 이 사이클은 대략 250년 정도 지속된다."
네덜란드 제국, 대영제국, 그리고 미국. 모두 같은 패턴을 밟았다는 겁니다.
부흥 단계에서는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혁신이 일어나고, 경쟁력이 강화됩니다. 무역이 성장하고, 금융 중심지가 형성되고, 군사력이 커집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통화가 세계 기축통화가 됩니다.
절정 단계에서는 번영이 계속되지만, 그 대가로 부채가 쌓입니다. 사회가 풍요로워지면서 근검절약보다 향유가 중시됩니다. 다음 세대는 전 세대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교육 수준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쇠퇴 단계에서는 부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릅니다. 화폐를 찍어내 부채를 해결하려 하고, 이는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집니다. 부의 격차가 벌어지고, 내부 갈등이 심화됩니다. 동시에 외부에서는 새로운 경쟁자가 부상합니다. 결국 전쟁이나 혁명으로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탄생합니다.
레이 달리오는 현재 미국이 다음과 같은 쇠퇴 단계의 특징을 모두 보이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첫째, 거대한 부채. 미국 국가부채는 37조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GDP 대비 부채 비율은 역사적 최고치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둘째, 내부 갈등. 정치적 양극화가 남북전쟁 이후 최악 수준입니다. 좌파와 우파의 대립,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 인종 간 긴장이 모두 고조되어 있습니다. 미네소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셋째, 외부 도전자의 부상. 중국이 경제력, 기술력, 군사력 모든 면에서 미국을 빠르게 추격하고 있습니다.
그는 최근 경고의 수위를 높이고 있습니다. 2026년 1월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 가지 질서가 동시에 붕괴하고 있다. 법정화폐 질서, 국내 정치 질서, 국제 지정학적 질서. 우리는 전쟁의 문턱에 서 있다."
레이 달리오의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의 관세 전쟁은 쇠퇴하는 제국이 외부 도전자를 억누르려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주듯, 이런 시도는 대개 실패합니다.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이 그랬습니다. 쇠퇴의 근본 원인(부채, 내부 분열, 경쟁력 약화)을 해결하지 않으면 외부를 압박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특히 부채의 증가는 패권을 잃어버리는데 가장 치명적인 원인임을 레이 달리오는 강조합니다.
미래 학자 조지 프리드먼은 그의 저서 <다가오는 폭풍과 새로운 미국의 세기>와 <100년 후>에서 전혀 다른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프리드먼도 사이클 이론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의 관점은 달리오와 다릅니다. 그는 미국이 건국 이후 두 가지 큰 사이클을 반복해 왔다고 봅니다.
첫째, 80년 주기의 "제도적 사이클(institutional cycle)". 독립전쟁/건국(1780년대), 남북전쟁(1860년대), 제2차 세계대전(1940년대)이 그 예입니다. 대략 80년마다 미국의 통치 구조가 근본적으로 재편됩니다.
둘째, 50년 주기의 "사회경제적 사이클(socioeconomic cycle)". 산업화 시대, 전후 황금기, 레이건 시대 등. 경제 구조와 사회 계층이 재편되는 주기입니다.
조지 프리드먼의 핵심 통찰은 이것입니다. 2020년대는 이 두 사이클이 ‘동시에’ 전환점을 맞는 시기라는 것. 80년 전인 1940년대와 50년 전인 1970년대의 특징이 겹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프리드먼은 2020년대가 "미국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가 될 것이며 정치적 분열, 경제적 불안정, 사회적 갈등이 모두 극대화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레이 달리오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프리드먼은 이 위기가 미국의 "쇠퇴"가 아니라 "재탄생"의 전조라고 봅니다.
"미국은 주기적으로 스스로를 재창조해왔다. 위기의 시기를 거친 후 더 강해졌다. 2020년대의 고통 뒤에는 2030년대의 번영이 올 것이다."
프리드먼은 트럼프 현상도 이 맥락에서 해석합니다. 트럼프는 기존 질서에 대한 반발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미국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지요.
두 관점 모두 설득력이 있습니다.
레이 달리오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은 대영제국이 20세기 초에 겪었던 것과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과도한 제국적 부담, 산업 경쟁력 약화, 부채 증가.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이 "한 때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의 쓸쓸한 노후"처럼 보이듯, 미국도 그런 미래를 향해 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프리드먼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에도, 대공황 이후에도, 베트남전 패배 이후에도 부활했습니다. 위기는 미국의 끝이 아니라 재탄생의 계기였습니다. 트럼프 시대의 혼란도 그런 패턴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정답"이라고 확실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카니 총리가 다보스에서 말했듯, ‘전환(transition)’이 아니라 ‘단절(rupture)’의 순간이거나 조지 프리드먼의 말대로 오히려 미국의 ‘대전환(big transition)’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기존의 미국 중심 세계 질서가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가정하는 건 더 이상 현명하지 않습니다.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당장은 중간선거를 통한 미국인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중견국들은 두 시나리오 모두에 대비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야 할 때입니다.
2026년 1월 26일,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15%에서 25%로 인상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같은 미국 시장에서 경쟁하는 일본과 EU 자동차에는 15%가 적용되는데, 한국에만 10% 포인트 더 높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겁니다.
(아니 도대체 이 양반은 협정을 뭘로 보는 걸까요)
명분은 한국 국회의 "대미투자특별법" 입법 지연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은 선택지가 없으니 더 쥐어짜도 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무섭습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 추산에 따르면, 25% 관세가 적용되면 현대차와 기아의 미국 시장 추가 비용이 연간 5조 3천억 원에서 8조 4천억 원으로 58% 증가한다고 합니다. 이미 2025년 2-3분기에만 관세로 인한 손실이 4조 6천억 원에 달합니다.
이건 단순한 비용 증가가 아니라 일본, 유럽 자동차와의 경쟁에서 꽤 오랫동안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는 뜻입니다. 같은 가격이면 10% 포인트만큼 영업이익이 줄어드니까요.
한국 앞에는 캐나다가 직면한 것과 유사한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첫 번째 선택지는 미국과의 협상에 집중하고 형님에게 충성서약을 하면서 25% 관세를 15%로 낮춰달라고 협상하는 것입니다. 대미 투자를 더 늘리고, 안보 분담을 더 강화하고, 미국이 원하는 것을 더 들어줍니다. 단기적으로 국익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이번에 양보하면 다음번에도 양보해야 합니다. 트럼프식 협박이 효과가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면, 더 많은 협박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 의존도는 더 높아지면 우리의 무역 불안정성은 역설적이게도 더 높아집니다.
두 번째 선택지는 캐나다처럼 미국 의존도를 줄이는 구조 개혁을 단행하는 것입니다.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가입, 인도와의 FTA 협상 강화, 중국과의 경제 관계 재검토 등이 있습니다. 이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길입니다. 실제로 과거 인도를 중심으로 한 비동맹 세력의 결성도 결국 실패한 역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국제적 위상이 약했던 국가들이 모였던 과거와는 달리 이번에는 선진국, 그것도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 깃발을 올렸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만약 이 미션에 참여하여 성공한다면 미국의 입김을 벗어나 다변성을 확보할 수 있겠으나 중국의 부상이라는 ‘트레이드오프(trade off)’를 일정 부분 피할 길이 없습니다.
1월에 이재명 대통령이 CPTPP 가입 검토를 언급한 것은 이런 맥락으로 보입니다.
CPTPP는 미국이 빠진 환태평양 무역 협정입니다. 일본, 호주, 캐나다, 멕시코, 베트남 등 11개국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일본이 주도하는 CPTPP에 미온적인 입장이었으나 가입하면 미국을 우회한 아시아-태평양 시장 진출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인도는 14억 인구, 평균 연령 28세를 자랑하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한국도 일찍이 인도와 2010년 1월 1일 공식 발효된, FTA와 다름없는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인 한-인도 CEPA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를 맺고 상품·서비스 무역 자유화와 투자 확대를 통해 양국의 경제관계를 강화하고 있는데, 방산과 가전분야를 필두로 협력을 더욱 가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중국은 좀 복잡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의 압박을 받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한국의 최대 교역 상대 중 하나입니다. 캐나다가 중국과 협력을 강화한 것처럼, 한국도 중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고 분야가 제한적입니다.
투자자 입장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방어적 관점에서, 미국의 흔들기는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한국 자동차, 반도체 기업들의 리스크를 다소 증가시켰습니다. 단기적으로 주가 변동성이 높아질 것이고, 영업이익이 감소할 수 있지만 한국이 미국의 조선업과 AI산업 생명줄을 단단히 쥐고 있는 한 단기적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공세적 관점에서, 인도 관련 산업(섬유, 의류, 의료용품, 자동차 부품), 캐나다 에너지 기업, 동남아시아 FTA 수혜 기업들의 중장기 성장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인도가 유럽 시장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인도 주요 산업에 투자하고 있는 ETF를 주목해 볼 만합니다.
전략적 관점에서, CPTPP 가입이 결정되면 한국의 화학, 기계, 부품 기업들의 "제3국 기지 전략"이 활성화될 것입니다. 베트남이나 말레이시아에 공장을 세우고, 그곳에서 CPTPP 회원국으로 수출하는 구조가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현재 맥을 못 추고 있는 중후장대한 시클리컬 산업들의 회생시기가 조금 더 빠르게 도래할 수 있으며, 특히 현금여력이 매우 부족한 회사들의 사정이 나아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건 단순화한 것입니다. 실제 투자 결정은 개별 기업의 상황, 밸류에이션, 시장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개별 기업에 대한 분석을 더욱 철저히 한 후 집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그림에서 보면 대다수 개인 투자자들이 추구하는 "미국 성장주 일변도"에서 "다국가 다변화"로의 방향전환은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2026부터 향후 2년 간이 한국에게 결정적인 시기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CPTPP 가입 여부는 의외로 빠르게 결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난 한일 정상 간 셔틀외교가 빠르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에 대한 가능성이 조금 올라갔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가입한다면 미국 의존도를 상당 부분 경감할 수 있지만, 미국의 보복이 따를 수 있음을 알기에 정부와 재계는 소통하며 계산기를 두드려 볼 것입니다.
인도와의 협력 강화 논의도 본격화될 것입니다. 현대차, 삼성전자 등의 인도 시장 진출 확대를 통해 "제2의 기지"를 구축할 시기입니다. 특히 유럽연합과 인도와의 FTA로 강화된 유럽 자동차의 경쟁력이 한국 자동차의 점유율을 위협할 수 있기에 이는 절대 미룰 수 없습니다. 20년 전 대한민국의 산업기지가 중국이었다면, 베트남을 지나서 이제는 인도의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재평가도 피할 수 없습니다. 정말 어려운 문제지만 캐나다가 중국과 손을 잡은 것처럼, 한국도 경제적 고립을 피하려면 중국과의 관계를 단순한 "경쟁과 경계"가 아닌 "부분적 협력 관계"로 재정의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핵잠수함이라는 전략무기의 끝판왕을 반드시 확보해야 하기에 미국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일정 수준 이상의 협력 관계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어려운 선택들뿐입니다. 문명 게임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캐릭터와 헬 난이도를 선택한 것은 덕왕이 삼국지에서 천하를 통일하는 것보다 더 어려워 보입니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속에서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퀘스트들을 해결하며 눈치껏 다음 업데이트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미국의 우산 밑에서 등따시고 배부르게 살아온 그 시절이 그리워도 이제 그 시간은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이는 미국의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당장 큰 형 밑이 안전하다며 경제적 협박에 굴복한다면 끓는 물속의 개구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마크 카니 총리가 말했듯, "테이블에 앉지 못하면 메뉴에 오른다"는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대한민국도 직시해야 합니다.
글을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2026년 초, 우리는 미증유의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트럼프의 관세 전쟁은 세계 무역 체계를 흔들었고, 그 반작용으로 "미국 빼고" 돌아가는 무역 블록들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인도-EU, 메르코수르-EU, 캐나다-중국. 이 움직임들은 트럼프가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입니다.
캐나다의 총리는 다보스에서 "거짓 표어를 떼어내자"라고 선언했습니다. 미국이 팬티까지 벗어던진 마당에 규칙 기반 국제 질서라는 점잖던 허구를 벗어던지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자고.
미국 내부에서는 미네소타의 비극이 정치적 위기를 촉발하고 있습니다. 이민 정책의 강경 집행이 미국 시민의 죽음으로 이어지자, 트럼프의 핵심 공약이 역풍을 맞으며 중간선거의 결과를 점점 안갯속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금융 시장은 케빈 워시 지명에 요동쳤습니다. 연준의 독립성이 유지되리라는 기대에 금이 폭락했지만 금값 하락의 근본적인 불확실성이 해소된 건 아닙니다.
레이 달리오는 이것이 제국의 쇠퇴의 모습이라 말하고, 조지 프리드먼은 새로운 미국으로 태어나는 여명 전의 어둠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옳은지는 아직 모릅니다. 아마 수십 년 후의 역사가들이 판단해 줄 것입니다.
투자자에게 중요한 건 "어느 쪽이 도덕적으로 옳은가"가 아니라 "현실이 어떻게 흘러가는가"입니다. 트럼프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의 정책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합니다.
첫째, 미국 중심의 질서는 분명히 약화되고 있습니다. 이건 단기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대안적 무역 블록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인도, EU, 남미, 캐나다, 중국을 연결하는 새로운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각국은 각자도생의 길을 거칠게 찾아 나설 것입니다.
셋째, 미국의 내부 혼란이 대외 정책을 제약하고 있습니다. 국내 정치가 불안정하면 외교적 협박의 신뢰성이 떨어집니다. 이는 중간선거의 악재로 작용할 것입니다.
넷째, 금융 시장은 아직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연준 정책, 달러 가치, 금 가격 모두 높은 변동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향후 새로운 연준의장이 될 워시의 입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과연 강단 있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이름처럼 입을 싹 씻고 권력의 비위를 맞추는 변절자가 될까요?
시장의 방향은 알 수 없지만 변동성이 커질 확률은 그 어느 때보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국 시장 일변도에서 벗어나 신흥국, 유럽, 원자재 등에 대한 포트폴리오 다변화와 함께 유동성 확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변동성이 클 때는 현금은 기회를 잡는 도구가 됩니다. 단 변동성이 클 때 레버리지는 절대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투자자이기 이전에 저는 한 사람의 세계인으로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카니 총리가 인용한 하벨의 말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채소 가게 주인이 매일 아침 창문에 붙이는 거짓 표어. 믿지도 않으면서 권력에 순응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도 비슷한 표어를 붙이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미국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국제 질서는 규칙대로 돌아간다.", "열심히 하면 보상받는다."
이런 믿음들이 진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우리가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벨이 말했듯, 체제의 힘은 항상 진실에서 나오지는 않습니다. 국제 정치의 현실은 모두가 거짓을 연기하는 데에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체제의 약점도 정확히 같은 곳에 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연기를 멈추고 진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환상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Quo Vadis?” (어디로 가는가?)
라틴어인 이 말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가 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각자 자기만의 답을 찾아 살아남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에서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연대마저 깨질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한 이 시기에 명연설을 남긴 마크 카니 총리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끝으로 마크 카니 총리의 다보스 포럼 연설문 전문의 번역본을 실어드립니다.
같이 시간 내서 읽어보시고 댓글로 의견을 주시면 감사히 읽어보겠습니다.
오늘도 함께 공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엄
<구시대 질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Principled and pragmatic: Canada's path
우리는 매일 "지금 세상은 강대국 간 경쟁의 시대"라는 말을 듣습니다. 규칙을 기반으로 한 질서가 점점 사라지면서 힘 있는 자들은 원하는 걸 뭐든지 해도 되고, 약자들은 그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투키디데스가 한 저 말은 국제 관계의 자연스러운 논리를 꿰뚫은 통찰처럼, 즉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현실처럼 들립니다. 다들 이 논리에 기대 세상을 바라보다 보니, 어떻게든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고, 당장의 굴욕을 감수하면서도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참고 또 참으며, 이렇게 하면 '적어도 우리는 안전하겠지...'라고 생각하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뭐가 있을까요?
1978년, 체코의 반체제 인사로 훗날 대통령이 된 바츨라프 하벨은 "힘없는 자들의 권력"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글에서 하벨은 "공산주의 체제가 스스로 체제를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그는 한 채소 가게 주인의 사례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매일 아침, 이 가게 주인은 가게 문을 열자마자 창문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문구를 붙여 놓습니다. 물론 이 말을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사실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죠. 그런데도 매일 열심히 잊지 않고 이 문구를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는 권력에 순응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거죠. 모난 돌이 돼 정 맞기 싫은 겁니다. 같은 이유로 거리에 있는 모든 가게가 똑같은 문구를 예외 없이, 너도나도 걸어 놓음으로써 공산주의 체제는 유지됩니다. 폭력을 앞세워 짓누르는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보여주는 의식에 가까운 순응이 체제를 떠받치는 겁니다. 심지어 이 사람들이 속으로는 매일 내 거는 문구가 잘못됐다는 걸 다 아는데도 말이죠.
하벨은 이를 "거짓 속에 사는 삶(living within a lie)"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체제의 권력을 떠받치는 힘은 진실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모두가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연기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데서 나오죠. 체제의 약점도 그래서 정확히 같은 데 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연기를 멈추고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즉 채소 가게 주인이 먼저 아무런 믿음도 없던 껍데기뿐인 문구를 떼어내 버리면, 그 순간 환상은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제 모든 기업과 국가들이 잘못된 문구를 떼어내고, 거짓된 순응, 쉬쉬하는 일을 그만둬야 할 때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캐나다와 같은 나라들은 소위 "규칙 기반 국제질서"라는 체제 아래서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 제도에 참여해 질서와 규칙을 칭송했고, 앞날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던 덕분에 혜택을 누렸습니다. 우리는 그 규칙과 질서가 제공하는 보호 아래서 가치를 추구하는 외교를 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내세운 이야기 가운데 적잖은 부분이 진실과 다르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강대국은 자기들 편의대로 규칙에서 면제받기 일쑤였고, 무역 규칙도 공정하지도, 공평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국제법도 피고 또는 피해자나 누구냐에 따라 고무줄처럼 일관성 없이 적용된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이 허구는 쓸모가 있었습니다. 특히 패권국인 미국이 일종의 공공재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아줬기 때문입니다. 무역에 필요한 해상로를 열고 보호해 줬고, 안정적인 금융 시스템, 집단 안보,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를 조정, 해결하는 제도적인 틀을 제공한 것도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문에 표어를 붙이고, 매일 의식에 참여했습니다. 이 질서가 말하는 세상과 진짜 현실의 차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이 암묵적인 약속은 더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돌리지 않고 바로 말씀드리자면, 지금 우리는 전환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알던 제도는 지금 이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지난 20년간 발생한 금융, 보건, 에너지, 지정학적 위기는 극단적인 세계화와 통합에 얼마나 큰 위험이 뒤따르는지를 분명히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보인 강대국들의 행보에는 지금껏 드러난 위기와 명백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강대국들은 경제 통합이란 제도를 무기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관세를 이용한 압박, 금융 인프라를 동원한 협박, 공급망을 이용해 약점을 공략해 쥐어 짜내겠다는 엄포가 이어졌습니다.
경제 통합이 공동 번영의 토대가 아니라, 약한 쪽의 굴종을 강요하는 경제 종속의 다른 말에 불과한 것이 드러날 때 "상호 이익이라는 거짓 속에 사는 삶"은 더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중견국들이 의지해 오던 세계무역기구(WTO), 국제연합(UN), 기후변화회의(COP) 같은 다자 기구와 제도, 즉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자고 애써 만들어 놓은 제도적 틀, 기반이 모두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나라들이 똑같은 결론에 다다릅니다. 바로 각자 스스로 에너지, 식량, 핵심 광물, 금융, 공급망 전반에 걸쳐 전략적 자율성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이죠.
이런 위기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식량과 에너지를 자급자족하지 못하고, 자주국방을 실현하지 못하는 나라는 수시로 강대국의 위협에 직면할 테니까요. 규칙을 기반으로 한 질서가 제공하던 보호가 사라진 세상에서 나 자신을 지키려면 스스로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면 결국 어떻게 될지 한번 찬찬히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각국이 자기만의 요새를 쌓아 올리고 그 안에 갇혀 살면, 전체적으로 모두가 더 가난해지고, 더 취약해지며, 그 시스템은 지속하기 어려워집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죠. 바로 강대국들이 규칙과 가치를 중시하는 척이라도 하던 걸 멈추고 노골적으로 자기 이익만 추구하면, 거래를 통해 빼앗고 독차지할 수 있는 이익의 크기가 갈수록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패권국이 동맹국과의 관계를 이용해 직접 돈을 버는 게 장기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간단합니다. 동맹국들은 패권국이 규칙과 질서를 내다 버릴 때 생겨나고 커지는 불확실성을 상쇄하기 위해 관계를 다양화하고 위험을 분산시키려 할 겁니다. 즉, 여기저기 보험을 들어놓고, 선택지를 늘려 두며,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역량을 키울 겁니다. 전에는 규칙과 질서를 바탕으로 인정되던 주권을 이제는 압박에 굴하지 않을 만한 힘을 길러 필요하면 행사하려 할 테죠.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지금 제가 말하는 고전적인 위험 관리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들입니다. 공짜로 위험을 관리할 수는 없죠. 언제나 비용이 드는데, 또 중요한 건 이렇게 전략적인 자율성을 추구하는 데 드는 비용을 처지가 비슷한 나라들끼리 분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각자 자기 요새를 쌓는 것보다는 공동의 회복력을 기르는 데 함께 투자하는 편이 훨씬 더 저렴합니다. 같은 기준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서로 다른 데서 초래하는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서로 부족한 데를 채워주는 건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말 그대로 플러스섬 게임입니다. 캐나다 같은 중견국 앞에 놓인 질문은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냐 마냐가 아닙니다. 그에 관해선 이미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새로운 현실을 헤쳐나갈 길을 찾아야 합니다. 대신 우리의 과제는 우리 스스로 높다란 요새를 쌓을지, 아니면 좀 더 야심 찬 길을 갈지 정하는 겁니다.
캐나다는 비슷한 나라 중에 비교적 일찍 경보음을 들었고, 전략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기 위한 논의를 바로 시작했습니다. 캐나다인들은 우리의 지리적 위치, 동맹과 우방이 튼튼한 안보와 번영을 자연히 보장한다는 오랜 가정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걸 아주 잘 압니다. 그리고 우리가 택한 새로운 접근법은 핀란드 알렉산더 스텁 대통령이 말한 "가치 기반 현실주의(value-based realism)"를 기초로 합니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원칙과 실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길을 간다고 말이죠. 근본적인 가치들, 각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인정하고, UN 헌장이 허락하는 한도 외에는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인권을 존중하면서도 실용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겁니다. 즉, 진보라는 건 대개 더디게 오고, 동맹 사이에서도 이해관계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며, 우리가 내건 가치를 다른 동맹국이 똑같이 공유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 세계와 폭넓게, 하지만 전략적으로,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열린 마음으로 교류할 겁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올 때까지 막연히 기다리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먼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냉철히 분석하고 전략을 세워나갈 겁니다.
우리는 관계의 깊이가 우리가 중시하는 가치와 비례하도록 여러 관계들을 재조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유동성과 그로 인한 위험, 또 앞으로 닥칠 상황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우리의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세상의 일에 폭넓게 참여하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는 그저 우리가 믿는 가치가 얼마나 강력하고 좋은 가치인지 읊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해 가치를 실현해 나갈 겁니다. 우리는 그 힘을 캐나다 안에서 구축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출범 이후 소득세와 자본소득세, 대기업 투자에 대한 세금을 인하했고, 주(州) 간 무역 장벽을 모두 철폐했습니다. 에너지, AI, 핵심 광물, 새로운 무역 루트 등에 총 1조 달러에 이르는 규모의 투자를 신속히 추진하고 있습니다. 2030년까지 국방비를 두 배 늘리되, 국내 국방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운용할 겁니다.
우리는 해외에서도 발 빠르게 다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과 포괄적 전략 파트너십을 체결했고, 유럽 방위조달협약(SAFE)에도 참여합니다. 지난 6개월 사이 우리는 4개 대륙에서 12개의 무역·안보 협정을 맺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 카타르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새로 체결했고, 인도, 아세안(ASEAN), 태국, 필리핀, 그리고 메르코수르(MERCOSUR)와의 FTA 협상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세계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가변적인 기하(variable geometry) 전략을 추구합니다. 다시 말해, 공동의 가치나 이해관계에 따라 사안별로 유연한 맞춤형 연합을 구축해 협력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 문제의 경우 캐나다는 의지의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에 든 핵심 참여국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의 방위, 안보에 인구 1인당 가장 큰 비용을 부담하는 나라입니다.
북극의 주권에 관해 우리는 그린란드와 덴마크를 확고히 지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린란드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는 온전히 그린란드 주민들에게 있습니다.
나토(NATO) 헌장 제5조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변함없습니다. 우리는 이에 따라 노르딕, 발틱 국가를 포함한 나토 동맹국들과 동맹의 북부, 서부 방어선을 강화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으며, 초장거리 레이더, 잠수함, 항공기에 대한 투자, 지상군 파병에도 전례 없는 규모로 임하고 있습니다. 지상군이지만, 땅이 아니라 얼음 위에 발을 딛고 임무에 투입될 테니, 빙상군(氷上軍)이라고 불러야 하겠군요.
캐나다는 또 그린란드와 결부해 매기려는 관세에 강력히 반대하며, 북극의 안보와 번영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모든 당사자가 집중적으로 협상에 임할 것을 촉구합니다.
다자무역 분야에서 캐나다는 TPP(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와 유럽연합을 잇는 다리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낼 준비가 돼 있습니다. 두 지역을 합치면 15억 명을 아우르는 무역 블록이 형성됩니다. 핵심 광물에 관해 우리는 G7 회원국을 중심으로 구매자 연합을 만들어 특정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다변화를 꾀할 수 있게 할 겁니다. AI 분야에서도 캐나다는 패권국이 주도하는 초대형 플랫폼 말고는 선택지가 없어 사실상 주어진 플랫폼을 강요받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우리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채택한 국가들과 협력해 나갈 겁니다.
이는 순진한 다자주의도 아니고, 기존의 제도에 맹목적으로 의존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안별로 추구하는 가치와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져 협력할 유인이 많은 나라들을 잘 모아 실제로 작동하는 유연한 연합을 섬세하게 구축하는 일입니다. 사안에 따라서는 전 세계 대부분 국가가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거대한 연합이 구축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역·투자·문화 전반에 걸쳐 앞으로 도전과 기회가 한꺼번에 밀려올 때 적재적소에 기대고 활용할 수 있는 촘촘한 연결망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중견국들이 함께 행동해야 하는 이유는 많지만, 가장 현실적이고도 날카로운 비유를 들자면, "우리가 테이블에 앉지 못한다면, 그건 우리가 메뉴에 올라와 있다는 뜻"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죠. 강대국들은 적어도 지금은 자기가 원하는 걸 관철해 낼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췄습니다. 시장 규모나 경제력, 군사력 등 어딜 봐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규칙을 바꾸거나 예외를 둬도 됩니다. 반대로 중견국은 그런 힘을 갖추고 있지 않죠.
그런데 우리가 특히 패권국가와 홀로 협상에 나선다면 우리는 협상에 쓸 만한 카드를 하나도 쥐지 못하고 끝없이 양보할 수밖에 없는 협상을 벌이는 셈입니다. 다른 중견국과 강대국의 마음에 들기 위해 혹은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운명이죠. 구조 자체가 그렇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는 개별 국가에 부여된 주권(sovereignty)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사실상 힘에 굴복하고 굴종하면서 주권을 행사하는 척하는 것일 뿐이죠.
강대국끼리 경쟁하는 세상에서 그 사이에 낀 국가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강대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서로 경쟁할지, 아니면 강대국이 아닌 나라끼리 힘을 합쳐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낼지 말이죠.
강대국이 군사력을 앞세워 자기 이익을 관철하려고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이지만, 우리는 진실하고 솔직한 원칙과 규칙을 기반으로 한 정당성이라는 힘도 모두가 함께 휘두르면 얼마든지 강력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다시 하벨이 전하려던 교훈을 떠올립니다.
그렇다면 중견국이 거짓 아닌 진실 속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가장 먼저 현실을 정확히 칭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여전히 누구의 말마따나 제대로 작동한다고 말하는 걸 멈춰야 합니다. 지금은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강대국끼리 경쟁이 심화하는 상황입니다. 가장 힘이 센 국가들은 경제적 통합을 강압의 수단으로 삼아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빼앗고 독식하려는 세상이 됐습니다.
둘째, 우리는 일관되게 행동해야 합니다. 동맹국이든 경쟁국이든, 잠재적 적국이든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선 안 됩니다. 만약 중견국들이 누가 하는 경제적 강압은 비판하면서 다른 이의 똑같이 잘못된 경제적 강압에는 눈을 감고 쉬쉬한다면, 그 침묵은 곧 창문에 거짓 문구를 걸어 놓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셋째, 우리가 정말 믿는 바를 실제로 구축하고 길을 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옛 질서가 복원되기를 막연하게 기다리지 말고, 약속한 대로 작동하는 제도와 협정을 만들고 관리해야 합니다.
넷째, 경제적 강압을 가능하게 하는 강대국의 지렛대를 약화시켜야 합니다. 모든 나라는 이를 위해 강력한 국내 경제를 구축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국제적인 다변화를 꾀하는 일은 단지 경제적인 지렛대를 갖추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정직한 외교 정책을 펴는 데도 중요한 물질적 토대를 제공합니다. 경제적 보복에 대한 취약함을 보완하고 없앨수록 각 나라는 비로소 원칙에 기댄 발언권을 제대로 보장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 이야기로 마무리하죠. 캐나다에는 세계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에너지 강국입니다. 막대한 핵심 광물 매장량에 캐나다인의 교육 수준은 세계에서 가장 높습니다. 우리의 연기금은 세계 최대 규모에 가장 정교한 기관 투자자 중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 캐나다는 풍부한 자본과 인력을 갖췄으며, 여기에 정부는 막대한 재정적 역량을 활용해 과감한 결단을 내릴 준비가 돼 있습니다. 캐나다는 또 많은 나라가 동경하는 가치를 구현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캐나다는 제대로 굴러가는 다원주의 사회입니다. 우리의 공론장은 다양한 목소리가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기에 늘 건강하게 시끄럽습니다. 캐나다인들은 환경을 고려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없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안정적인 파트너입니다. 함께 추구하는 가치와 협력하는 관계 자체를 중시하는, 그래서 장기적인 목표를 함께 추구할 수 있는 파트너입니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시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국제질서가 순식간에 파괴된 지금 세상에서 우리는 어찌어찌 적응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바라보고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창문에서 거짓된 표어를 떼어내고 있습니다. 예전의 질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지나간 세월과 그 질서를 애도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차피 과거를 그리워하는 건 미래를 대비하는 좋은 전략이 될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지금의 균열 속에서 더 크고, 더 낫고, 더 강력하고 정의로운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거야말로 중견국 앞에 주어진 시대의 과제입니다. 각자 자기 요새를 쌓은 세상에서 가장 잃는 것이 많고, 반대로 진정한 협력이 이뤄질 때 가장 큰 혜택을 공유할 수 있는 중견국들이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강대국의 힘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강력합니다. 하지만 우리 중견국들에도 힘과 역량이 있습니다. 바로 거짓된 연기를 멈추고, 현실을 똑바로 지칭하며, 각자 나라에서 힘을 키워 공동의 가치를 위해 함께 행동하는 일입니다.
그게 곧 캐나다의 길입니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또 자신 있게 이 길을 선택합니다. 우리와 함께 가려는 모든 나라에 이 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 다보스 포럼 연설문 출처: 프린스턴대학교 정치학과 유혜영 교수 <프린스턴에서 온 편지> https://americaknow.substack.com/p/2-652
주요 출처 및 인용처
연설문 및 1차 자료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 2026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연설문
연설문 한국어 번역: 프린스턴대학교 정치학과 유혜영 교수 <프린스턴에서 온 편지> (https://americaknow.substack.com/p/2-652)
저서 및 학술 자료
바츨라프 하벨, "힘없는 자들의 권력(The Power of the Powerless)" (1978)
레이 달리오(Ray Dalio), <변화하는 세계 질서(Principles for Dealing with the Changing World Order)>
조지 프리드먼(George Friedman), <다가오는 폭풍과 새로운 미국의 세기(The Storm Before the Calm)>
조지 프리드먼(George Friedman), <100년 후(The Next 100 Years)>
여론조사 및 통계 자료
CNN-SSRS 여론조사 (ICE 무력 사용 관련)
YouGov 여론조사 (ICE 지지율 및 폐지 여부)
로이터/입소스(Reuters/Ipsos) 여론조사 (트럼프 이민 정책 지지율)
한국자동차산업협회 관세 영향 추산 보고서
정부 및 국제기구 자료
대한민국 외교부 국가/지역 정보 (메르코수르 관련)
언론 보도
CNBC (케빈 워시 인터뷰, 연준 금리 전망 분석)
유럽연합 의회 메르코수르-EU FTA 표결 결과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트럼프 인터뷰)
각종 국제 언론의 다보스 포럼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