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하여
최근에 화천 북한강 토막살인 사건이 있었다. 엽기적인 범죄는 과거에도 종종 있었던 터라 특별한 이슈는 아니지만 이번 사건은 다르다. 이 사건은 육사 출신에 카이스트 석사를 수료한 소령이 범인이라는 점이다.
엘리트의 이 같은 범죄에 많은 사람이 충격받은 듯하다. 정신이상이나 인격장애도 아닌 현역 장교가 제정신으로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인간”은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으로 이해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새삼 깨닫는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존재는 정자와 난자의 수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수정란을 “인간”으로 취급할 수 있는 시점은 언제부터일까? 가령 형법 제250조에는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형법은 언제를 사람의 시작으로 보는 걸까?
우리나라 형법은 산모가 진통을 시작할 때부터 사람으로 보는 “진통설”을 채택하고 있다. 진통이 일어나기 전의 태아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형법 제269조에는 “낙태죄”가 명시되어 있다. 태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놓고 낙태는 범죄로 취급한다. 낙태죄는 대법원판결로 폐지되었지만, 형법 조항은 그대로 남아있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다.
“진통설”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사람에 따라 진통을 느끼는 시점이 다를 수 있다. 만일 제왕절개수술로 아기를 낳는 경우 진통설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민법에는 “태아는 상속 순위에 관하여는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본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사람으로 본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임신 4개월(16주) 이후 태아가 사산하면 사람으로 보고 매장하거나 화장해야 한다는 법률도 있다. 그 이전에 사산한 태아는 의료폐기물로 처리된다. 이 법률에서 인간이냐 폐기물이냐 차이는 한 끗발이다.
의학적으로는 수정 후 2개월 이내는 배아, 이후는 태아로 구분한다. 그 기준은 인체 모양이 분명히 나타났는가 아닌가에 있다. 이 기준에서 배아 상태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생명윤리기본법에서는 “배아는 생명체로써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참으로 모호하다. 배아는 인간은 아니지만 “생명체”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 걸까?
가톨릭에서는 수정란(수정된 시점)부터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 때문에 가톨릭에서 “낙태”는 죄악으로 규정된다. 그렇다면 수정이 아닌 줄기세포로 탄생한 “합성 배아”는 인간인가?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한 가톨릭의 명확한 결론은 없다. 합성 배아는 “무조건 반대”라는 입장만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톨릭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하는 바로 그 순간 영혼이 부여된다고 본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수정란이라도 이미 하나의 생명이므로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 자체도 살인으로 여긴다.
그러나 “합성 배아”는 수정으로 이루진 것이 아니다. 최근 이스라엘에서는 정자와 난자, 자궁 없이 줄기세포만으로 인공 배아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인공 배아는 영혼 없이 태어나는 인간이 되는 셈인가? 종교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인 까닭에 법실증주의적 인간의 정의는 필수 불가결한 중요한 사안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회적으로는 출생신고를 해야 사람 취급을 받는다. 사지가 멀쩡해도 주민등록상 근거가 없으면 법적으로는 사람이 아니다. 신분이 유령과 동급이다.
그런가 하면 남의 정보를 훔쳐 한 사람이 여러 명으로 둔갑하는 도술도 일어난다. 유전자도 다르고 얼굴 생김새도 다르지만, 법적으로는 똑같은 인간이 여러 명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법으로 인간을 규정한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법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이유는 사건처리 편의성 때문일 뿐, 법이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생존 본능”이 각인되어 있다는 점에서 감정이건 심리이건 모든 생명체에 프로그램된 메커니즘은 모두 같다. 벌레에게 진실인 것은 사람에게도 진실인 것이다.
불빛을 비추면 바퀴벌레는 화들짝 놀라 도망간다. 어떤 생물체건 생존의 위협 앞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존재는 없다. 생존 본능이 없다면, 그것은 무생물이다.
생물에게 “정의”라는 것이 있을까? 있다면 아마도 에피쿠로스가 말한 내용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의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에 있어서 서로 해치지 않고 해침을 당하지 않으려는 계약이다. -에피쿠로스-”
동물 세계에서는 에피쿠로스가 말한 “정의”라는 것이 존재한다. 동물들은 자신의 생존문제가 아니면 남을 해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배부른 사자는 사냥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상대를 공격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생존과 아무 상관없는, 이유도 동기도 없는 “묻지 마 범죄”는 인간 사회에나 있는 특이한 정신질환이다.
반려견을 가족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동물병원은 흔하고 애견 전용 미용실, 호텔, 유치원까지 등장했다. 나 같은 베이비부머 세대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에피쿠로스가 말한 정의로운 인간을 보기 힘들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정서적인 소통,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의 부재로 인해 동물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나 프랑스만 해도 혼자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죽음을 담보로 하는 모험이나 마찬가지다. 언제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을지 모른다. 낮에는 평범하고 평화롭게 보이지만 밤에는 말초신경들이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남미 어느 도시는 대낮에도 강도와 약탈이 일상이란다.
“수도복이 수도승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인간”이라는 명칭이 모든 사람을 인간으로 만들지 않는다. 팔다리가 없는 것이 불구가 아니다. 그보다는 정서적, 심리적인 결함이 더 큰 불구다. 이런 불구는 말초신경만 살아있는 단세포 유기체나 다름없다.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 사건이라는 조희팔 다단계에 속아 넘어간 사람 중에 자살자가 30명 넘는다고 한다. 지금도 보이스 피싱, 전세 사기, 다단계 등 갖가지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약한 자를 제물로 삼는, 이유 없는 폭력, 토막살인도 서슴지 않는 이들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들의 특징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불현듯 예전에 썼던 글이 생각난다.
“모든 범죄의 원인은 유아적 본능에 있다. 아기들 행동을 보면 충동적이다. 생각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범죄자가 유아와 다른 점은 “자기 합리화”라는 생각 없는 생각이 있을 뿐이다.
“욱”하는 감정은 자연적인 심리 현상이다. 이것은 배설 행위와 같다. 스트레스도 배설하지 않으면 어떤 방식이든 문제가 생긴다. 생리적 현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관리하는 것은 개인의 통제능력에 달려있다. 유아에게 기저귀를 채우는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닌가? 아기에게는 통제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범죄도 유아의 경우와 똑같다. 육체적인가 심리적인가 차이만 있을 뿐이다. -죄와 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고, 그냥 무생물처럼 자연 일부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죽어보지 않은 이상 죽은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누가 알겠는가? 무생물 세계에서도 행복이나 고통이 따라다니고 있을지. 자연의 본성을 저버린 것들이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안개 속에서-”
아직 인간은 모르는 것이 많다. 보잘것없는 인간 사회만 해도 빚 있는 곳에 상환은 상식이다. 작용과 반작용이 자연의 기본 원리이듯, 에피쿠로스적인 정의는 자연에 내재된 보편적 원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무신론 무종교인이기는 하지만, 나는 “인과응보”를 하나의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