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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잡담

- 저물어 가는 갑진년에 -

by 그냥잡담

그냥잡담 - 저물어 가는 갑진년에 -


역사는 사건을 통해 흘러간다고 했던가?

올해는 이태원이나 세월호 같은 큰 참사는 없었지만, 눈길을 끌만한 이런저런 일은 어김없이 있었다. 서현역 칼부림, 화천 토막살인, 전세 사기, 교권보호법 시행, 어수선한 계엄 해프닝 등등.

이 중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교권5법 시행이다. 서이초 교사 사건이 가장 마음이 아팠던 탓일까? 교권보호법이 얼마나 실효성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학부모의 악성민원에 대한 방패막은 되어 줄 듯 보인다. 그러나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작년 7월에 있었던 서이초 교사 극단적 선택, 24살 꽃다운 나이, 첫 근무지인 초등학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이 사건으로 교권보호법이 시행되었지만 그러나 법이 사람의 인격을 고치거나 높여주지는 않는다.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교사가 연평균 20명이라고 한다. 올해는 19명의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서이초 사건" 이후 교사를 비롯한 초등학교 직원 1만명가량이 우울증을 호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은 초등학교 종사자는 5년 만에 2.3배 증가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더니, 학부모의 저질 인격이 교권의 순수성을 무너트리고 있다. 교권 추락으로 사범대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교권마저 자신의 손아귀에 두려는 생각 없는 인간들이 생각 있는 교사를 몰아내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들 인성이 그러한데 자식들 또한 오죽할까? 동덕여대 사태를 보면 답이 나온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온다.

대학 다니면 모두 지성인인 줄 아나 보다. 요구 관철이 안되면 모든 것을 뒤엎는 것을 민주주의로 착각하는 “개념”의 무지, 하는 행동이 문화대혁명 광기를 떠오르게 한다.

논리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농성과 래커로 투쟁하는 그들 모습을 보면, 밑도 끝도 없이 생떼를 부리는 어린아이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초등생이 교사에게 욕설을 퍼붓고 뺨을 때리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사람 몸에 달려 있다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사려있는 생각”이 있을 때 머리라고 부른다. 그것이 없으면 그냥 두개골인 것이다.


사전적 의미의 "투쟁"은 권투시합 싸움이나 해석에 큰 차이가 없지만, 나는 마르크스 관점에서의 “투쟁”을 진정한 의미의 용어 해석으로 본다.

마르크스 시대에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 필요했던 이유는 생존의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 관점에서 생존의 이유가 없을 때는 투쟁이 아니라 “투정”이 적절한 용어 선택이다.

이를테면 최저 시급도 못 받는 노동자가 벌이는 파업은 투쟁이 맞지만, 억대 연봉을 받는 비행기 조종사들 파업은 투쟁이 될 수 없다. 이 경우에는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벌이는 권투시합일 뿐이다.

그렇다면 동덕여대 사태는 투쟁일까? 투정일까? 무엇이 그들 생존권에 위협이 되는 것일까?

인격이 되고 실력이 출중하면 여대든 남녀공학이든 인생 진로에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다. 권투시합이 아니라면 동덕여대 사태는 “투정”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치열한 생의 투쟁, 명예퇴직 전까지 나 역시 생존을 위한 삶의 투쟁, 그 중심에 있었다.

요즘 시대에도 있을까 싶은 “퇴-출”이 허다했다. 그날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은 출-퇴, 새벽에 퇴근하고 같은 날 출근하는 것이 “퇴-출”이다. 정상적으로 출-퇴하는 날은 조퇴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 치열했던 삶의 투쟁은 나에게 참전 용사의 기록처럼 남아있다. 그때 업무지시가 모니터에 팝업으로 뜨는 경우가 많아서 그 히스테리로 인해 지금도 팝업 광고를 끔찍이 싫어한다.

투쟁이었던 삶이 이제는 평화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그때와 반대로 지금은 지루함과 심심한 시간과 때아닌 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사실 글을 쓰고 낚시에 정 붙인 것도 그 투쟁의 결과다.


비밀이지만, 나 또한 머리가 아닌 두개골을 달고 있을 때가 있다는 것을 양심 고백한다.

그러나 적어도 민폐형은 아니다. 은둔에 가까운 삶이다 보니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해코지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 도시에 살지만 생활은 무인도에 가깝다.

두개골은 두개골이되 단단하지 않은, 말하자면 물렁뼈라고 해야 할까? 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없고 해를 끼치는 일도 없는, 도가니에 넣어도 좋을 물렁물렁한 두개골이다.

그러나 가끔은 브런치에 글을 쓰고 나라에 갑근세 낼 때도 있으니 히키코모리는 아니다. 눈에 띄지는 않아도 살아 있다는 티는 내고 산다.


희망을 가지지 않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희망이 없다면 절망 또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도 절망도 없는, 나이가 들수록 고요한 호수처럼, 삶이 그렇게 닮아간다. 生은 열정도 한탄도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지금에서야 나는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감 잡은 것 같다. 인공위성에서 바라보듯 세상살이 관조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다 사라지는 것. 박인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연말이라고는 하지만 거리는 쓸쓸하고 사회 분위기도 스산하다. 뒤늦게 시들어 버린 낙엽만 거리를 뒹군다.

나 또한 시들어 버린 마음이 방구석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내가 죽으면 이 살림살이들은 어떻게 될까?

도둑이 탐낼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저승으로 짐을 옮겨주는 이삿짐센터는 없다. 내 육체나 살아온 인생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청승 그만 떨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외계인으로부터 전화 한 통 받았다. 아들이다. 내 연락처에 "외계인"으로 등록되어 있다.

워낙 드물게 연락하는 터라 나는 아들이 지구 밖 행성에 살고 있으리라 믿고 있다. 연말이고 해서 잠깐 지구에 들러 안부 전화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아직 안 죽었다. 걱정 마라!"


어느덧 갑진년 유통기간도 며칠 남지 않았다.

지나가는 년 잡지 말고 오는 년 내치지 말라는데 그래도 지나가는 년은 못내 아쉽다. 사랑해 주지 못했던 시간이 많았고 보듬어 주지 못한 구석도 많았다. 갑진년에 값진 것을 못해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해서 다가오는 을사년에는 갑진년에게 미처 해주지 못한 사랑을 이월시켜 볼까 한다. 좀 더 세심하게 보듬어 주고 사랑해 주고 싶다.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아 움츠리고 산다. 다른 건 비실비실한 데 손만 생생해서 이렇게 글 쓰고 있다.

공기는 선선하고 날씨는 청명한데 마음은 언제나 시린 벌판에 서 있는 듯하다.



매년 그랬듯 을사년 새해 마스터플랜을 짜본다.

작심삼일이 되든, 내용이 빈약하든 부실하든 그래도 무계획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비전> 변함없는 인생

<목표> 하던 대로 살자

<실천> 특별나지 않게

- 음식 : 지금까지 그래왔듯 대충

- 음주 : 땡기면 먹고 아니면 말고

- 운동 : 집콕이 답답할 때 가벼운 산책

- 독서 : 시간 남아돌고 심심할 때

- 글쓰기 : 숨 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을 때

실천 불가능한 계획은 공상이나 다름없다. 내년에도 100% 목표 달성 가능하리라 확신한다.

아니 그보다는 목표초과 달성할까 걱정이다.

새해에는 모든 브런치분께 속 터지도록 행운이 들이닥치길! 원하는 목표가 있다면 초과 달성하시길!


- by 그냥잡담 -




피곤할 때, 누워있을 한 평 자리가 있어도 행복한 것이고,

몸 씻고 싶을 때, 있는 곳에 더운물과 차가운 물 나오면 행복한 것이고,

배 고플 때, 누구한테 구걸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다면 행복한 것이다. - 카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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