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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의 추억

by 그냥잡담

자본론의 추억


“자본론”은 민주화투쟁 시기(80년대)에 대학가에서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성서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 운동권에서 성행했던 의식화 교육도 자본론에 대한 지식 주입과 토론이 전부였다.

민주화투쟁 격랑 속에서 나는 대학을 다녔고 재학 중에 12.12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였다. 자본론은 금서였고 내가 그것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찌라시나 다름없는 종이 쪼가리 몇 장이 전부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이야기한 것이 금서라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또한 이 책이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영국에서 쓰였다는 점도 괴상한 우연이다.


자본론을 제대로 접하게 된 것은 한참 지난 후의 일이다.

퇴근길에 들른 교보문고에 “자본론”을 소개한 책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금서였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광화문 한복판 대형서점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명한 인플루언서를 만난 기분이랄까? 그때의 느낌은 그랬다. 유인물만 소지하고 있어도 경찰에 연행되었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진열된 책은 원본 번역이 아니라 축약본이나 해설서가 대부분이었다. 금서 해제를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출판사에서 앞다투어 내놓은 것 같았다. 19금 책 고르듯 힐끔힐끔 주변을 살피며 나는 두 권을 골랐다. 그때 이후로 자본론을 읽거나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자본론 자체는 이념적인 책이 아니다. 자본과 자본주의의 실체에 대한 사실만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것뿐이다. 자본론에 이데올로기 색깔이 칠해진 것은 “공산당선언”이었다.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으로 공업화가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에 노동자들은 긴 노동시간과 저임금,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시달렸다.

영국 상황만 놓고 봐도, 공장주들은 자신들 이익 극대화에 혈안이 되었다. 노동자 인권이라는 개념은 없었고, 10살 미만의 아동 노동자도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아무리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노동계급은 사실상 중세의 농노나 큰 차이가 없었다.

자본가는 점점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노동자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 이러한 불평등 구조의 원인은 무엇인가? 자본론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쓰인 책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구상한 공산주의는 실현될 수 없는 사회체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욕망을 과소평가했다. 그는 그것을 충분히 통제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욕망을 거세하지 않는 한 평등한 인간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 육식동물의 본능이 사냥이듯, 욕망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세계의 절반을 집어삼킬 정도로 영향력이 컸지만, 그러나 구소련이나 중국 등 대부분의 공산국가는 마르크스가 말했던 이상적인 공산주의는 아니다. 1인 내지는 소수가 권력을 독점한 독재국가였을 뿐이다. 마르크스를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그들 혁명은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새로운 부르주아를 탄생시킨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권력자는 기쁨조를 거느리고 억압자는 굶주리는 사이비 맑스주의, 말하자면 조지오웰 “동물농장”과 같은 스토리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노동조합 내에서도 존재한다. 노동자 권익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노조가 오히려 노동자 위에 군림하면서 갑 중에 갑 노릇을 하는, 소위 “귀족노조”가 그것이다.

노조 간부가 취업사기, 막무가내식 금전 요구, 직장 내 괴롭힘 등은 물론이고 조합비를 빼돌려 유흥비와 개인 생활비로 사용하는 등의 비리가 종종 뉴스에 나오곤 한다. 이 또한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새로운 부르주아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동물농장”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도 파렴치한 귀족노조의 행보는 끊이지 않고 있다. 가령 일반 근로자 평균 월급의 3~4배 수준을 받는 대기업 노조가 벌이는 파업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빼앗기 위한 집단이기주의 생떼일 뿐이다.


귀족노조에서 보듯, 요즘은 마르크스 시대와 반대로 노동자가 자본가를 착취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가령 현대기아차 조합원 연봉은 평균 1억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금단체협약 때마다 파업을 무기로 회사를 협박한다. 임금뿐 아니라 “취업대물림” 같은 비상식적인 조건도 협박을 통해 얻어낸다. 마치 조직 폭력배들이 조합을 접수한 듯한 모습이다.

회사가 망하든 말든, 국가 경제가 파탄이 나든 말든 이익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오늘날의 노동조합은 마르크스가 말하던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부르주아를 상대로 먹이 경쟁을 벌이는 또 다른 탐욕스러운 부르주아일 뿐이다.

“노동자 권익”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말하는 것이지, 더 많은 이익 챙기기가 아니다. 마르크스 시대의 노동자 투쟁은 생계와 직결되는,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


자본론이 나온 지도 150년이 지났으니, 경제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이념도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지금도 마르크스를 팔아먹고 있는 짝퉁 맑스주의, 귀족노조들이 노동자 착취 운운하고 있다는 점이다.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로 변절한 자들이 “프롤레타리아”인 척하는 위선은 보기만 해도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이러한 자들은 아마도 자본론을 읽지 않았거나 읽긴 읽었는데 문해력이 짧아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도 아니면 알면서도 사기를 치는 그 이상도 아닐 것이다. 아마도 민노총이 이 중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오늘날에 와서 유산계급(부르주아),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 구분은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스포츠 스타나 유튜버 1명이 중견기업 수준의 경제력을 창출할 수도 있는 시대다.

“자본”이라는 것도 주식으로 분산되어 누구나 자본가 위치에 있을 수 있으며, 기업이 망하길 바라는 주주들은 없을 것이다. 현대기아차만 해도 소액주주가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노조가 자신들 이익 챙기기에 나설수록 주가는 하락하고, 이것은 다수의 선량한 서민(소액주주)을 대상으로 갈취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조폭의 갈취와 무엇이 다른가?

귀족노조가 판치는 오늘날의 노동조합, 이 이기주의적 집단계급을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탐욕스러운 신종 부르주아!”


얼마 전 예산 삭감을 의결한 국회에서 자신들 의원 세비는 인상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세비 1억 6천만원 외에 사무실 운영비, 출장비, 보좌진 급여 등으로 국회의원 1인당 연평균 32억원 예산이 투입된다는 기사를 읽었다. 누가 말했던가? 나라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둑놈이 많은 거라고.

하긴 도둑놈 몇 명 있다고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 귀족노조 몇몇 있다고 국가 경제가 파탄 나지는 않는다. 골 빈 정치인 몇 명 있다고 정치체제가 전복되지는 않는다.

살다 보면 상처는 생기기 마련이고 자연적으로 치유되기도 한다. 국가나 사회체제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은, 건강한 사람도 재수 없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한 방에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이념논쟁은 주책바가지나 다를 바 없는 푼수 짓이긴 하지만, 다만 6월 민주항쟁 시기에 20대를 보낸 세대로, 지나간 이데올로기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어쩌다 마주친 현실 상황에 대한 가벼운 비판일 뿐이다. 산책 중에 돌부리가 우연히 발길에 차일 때도 있지 않은가?

사회 현상을 들여다보기는 하지만 나는 언제나 방관자 입장이다. 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참여하는 것도 별로 없기에 어떤 이슈에도 소 닭 보듯 무덤덤한 편이다. 모순이 또 다른 모순을 낳지 않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어떻게 돌아가든 사람 사는 세상은 어차피 다 비슷하지 않은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 별난 사람 모두 뒤섞여 비빔밥처럼 돌아가는 것이 세상이니,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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