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나는 신이다, 신을 배신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JMS 기독교복음선교회, 오대양 박순자, 아가동산, 만민중앙교회 등 사이비 종교의 실체를 파헤친 다큐물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두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정도는 다를지언정 여타 종교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어느 종교든 신념에 기대하는 인간의 심리는 모두 같기 때문이다.
심리분석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는 “인지부조화”도 사이비 종교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정립된 이론이다.
인지부조화는 인간이 자기 합리화를 하는 이유를 실험적 데이터를 근거로 잘 설명해 준다.
자신의 신념과 상반되는 사실이 나타났을 때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찾는다는 것이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합리화시키는 능력이 강해서 쉽게 인지부조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심리 현상이다. 금연에 실패했을 때, “담배 피워도 장수하는 사람이 있다.”는 기사를 찾아내 “굳이 금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자기합리화) 거리를 만든다.
1996년 해일-밥 혜성은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밝았다.
이때 미국 종말론 사이비 교주가 해일-밥 혜성이 다가오면 지구가 멸망하고 신도들은 UFO를 타고 하늘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해일-밥 혜성을 찍은 사진을 신도들에게 보여주었다.
해일-밥 혜성 사진에는 혜성 뒤에 조그만 물체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교주가 말한 UFO라고 믿었다.
신도들은 망원경을 사서 해일-밥 혜성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진에 있었던 조그만 물체는 발견할 수 없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UFO가 없다고 판단해야 옳지만, 신도들은 망원경을 샀던 가게로 몰려갔다. 신도들은 UFO가 보이지 않는 망원경이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망원경 가게 주인이 “조그만 물체는 UFO가 아니라 사진에 잡티가 묻은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지만, 신도들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전부 망원경을 반품하고 갔다.
믿기 힘들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사이비 종교가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념에 빠지면 마치 터널에 들어간 것처럼 시야도 좁아진다.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사진의 잡티가 아니라 망원경이 잘못된 것이다.
1990년대 말 우리나라도 다미선교회라는 종말론이 있었다.
종말론을 믿었던 신도 중에는 집 팔고, 대출까지 받아 교회에 헌금한 이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종말이 오지 않자 분노한 신도도 있었지만, 믿음을 버리지 못한 신도도 있었다.
종말론을 믿고 모든 것을 다 바쳤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심각한 “인지부조화”에 빠지게 된다. 모든 것을 투자한 상태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까?
이쯤에서는 “어느 것이 진실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지부조화에 빠진 공황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내내 고통스럽고 불안한 상태가 지속된다. 결국 신념을 지키는 쪽으로 결정하게 된다. 그것을 부정하게 되면 지금까지 투자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기에... 자기 합리화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다.
나아가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논리적인 근거나 합리적인 방법을 찾게 된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똑똑한 대학생, 검사, 변호사, 국정원 직원까지 JMS 기독교복음선교회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유도 “인지부조화의 덫”에 걸린 탓이다.
인지부조화의 덫에 빠진 대표 주자는 “창조과학”을 믿는 사람들이다.
종교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 추상적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종교적 신념의 증거를 논리 혹은 과학에서 찾으려고 한다. “과학”이라는 객관적인 지식을 접목해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려는 자기 합리화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태생 자체가 맹목적인 것이다. 곰이 마늘 먹고 여자가 됐건, 김알지가 알에서 태어났건 논리를 따지지 않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그리스로마신화도 고대 그리스에서는 하나의 종교였고 신앙의 대상이었다. 힌두교는 지금도 수많은 신들을 믿고 있다.
자신의 신앙을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따지려는 이유는, 그냥 믿기에는 뭔가 찜찜한 생각이 들고, 부정하자니 그동안 투자한 것이 아깝고... 결국에는 자신의 믿음을 합리화시키는 “자기 설득” 작업인 것이다. 심각한 인 지부조화 증상이다.
실제로 유튜브에서 창조과학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모 교수라는 사람이 어느 교회에서 “열역학과 창조”라는 주제로 한 강의였다. 아니나 다를까 엔트로피법칙을 왜곡시키며 태연하게 강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찐빵을 설명하면서 앙꼬는 쏙 빼버리고 강의하는 식이다. 종교적 신념에 맞게 과학적인 지식도 편집한다.
교수라는 사람이 그럴듯하게 설명하니 일반 사람들은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남을 속이는 행위다.
“인지부조화의 덫”에 걸리면 이처럼 합리화 정도를 넘어 사기 치는 수준까지 가게 된다. 모 목사가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설교해도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듣게 된다. 사이비 교주가 “나는 신이다.” 주장해도 그대로 믿어버리는 로봇이 되고 만다.
다큐가 선정적이라는 여론의 지적에, 다큐를 취재했던 PD는 “JMS 성범죄 실제 수위는 방송했던 것의 1/10도 다루지 못했다. 변태적이었던 JMS에 촬영팀이 충격으로 앓아누웠다"고 말했다.
종교에 의지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불행한 사람은 좀 더 나은 것을 바라기 위해서, 불행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을 좀 더 확장하기 위해서다. 원하는 것에 차이가 있지만 “욕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은 스스로 만족하기 어려운 존재다. 진시황이 황제가 된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황제를 넘어 영생을 바라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그 욕망이 존재하지도 않는 불로초를 원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불로초는 “천국”이라고 이름만 바꾼 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목사도 교회도 필요 없다. 스스로 조용한 곳에서 신의 말씀을 믿고 가르침대로 따르면 그만이다. 홀로 묵상하고 홀로 조용히 신앙을 지켜나가면 되는 일이다. 널찍하고 으리으리한 건물에서 기도해야 구원이 있다는 것은 약장수들 농간일 뿐이다.
목사는 그냥 한 인간일 뿐이다. 교회 건물은 콘크리트 폐기물일 뿐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성전이라며 콘크리트 더미에 신이 존재하고, 한 인간에게 신의 말씀이 있다고 믿는다. 즉,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를 믿고 사기꾼일지도 모를 인간을 믿는다. 이것은 종교라기보다 그 옛날 고대인의 샤머니즘과 다를 것이 없다.
차라리 장독대에 냉수 한 그릇 떠 놓고 기도했던 우리네 조상님의 종교가 훨씬 숭고하고 소박했다.
고대 시대에는 종교가 곧 정치권력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그것이 사회 권력의 수단이었다.
오늘날에는 종교가 사업 수단의 하나가 되었다. 신축교회마다 대형 건물이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이 입증되고도 남는다.
종교 뒤에는 통일교처럼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이들이 있고, JMS나 이재록처럼 자신의 인간적인 욕망을 맘껏 누리는 부류도 있다. “돈, 명예, 쾌락” 이것은 누구나 바라는 인간적 욕망이다. 돈이 있으면 명예를 원하게 되고, 명예가 얻어지면 쾌락을 바라게 된다. 그리고 쾌락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그 염원에 이용되는 아이템이 “천국과 지옥”이다. 이 아이템은 기원전 1800년경 우리가 미개하다고 천시하는 고대의 시대, 조로아스터교에서 시작되었다. (참고-민희식 박사 "성서의 뿌리")
그 이후로 이 아이템은 여러 지역으로 퍼지며 각색되고 시나리오 소재로 활용되었다. 권선징악은 종교가 아니더라도 사회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하나의 이념이었다. 이것은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실존주의처럼 하나의 사상이었을 뿐이다.
그 이념이 절대화되어 종교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인간들이 나타났다. 더불어 인지부조화의 덫에 빠지는 인간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니체는 종교를 인간을 울타리에 가두는 집단농장으로 봤다.
종교뿐 아니라 어떤 이념이라도 “진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그것은 사이비에 가까워진다. 과학도 사실이지 진리는 아니다. 우리가 찾지 못한 사실이 그 뒤에 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물며 과학만큼의 사실적 증거도 없는 것들이 진리라면, 얼토당토않은 말장난일 수밖에 없다. 미개했던 고대의 두뇌로는 그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의 두뇌에서도 그 얼토당토않은 말장난이 믿어지고 있다.
진정한 종교는 자신 스스로가 진리가 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의지하고 스스로가 수양하고 스스로가 깨닫는 것이다. 무엇을 지표로 삼든, 무엇을 지향하든 아무 상관없다. 스스로가 자신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만큼 현명한 종교는 없다. 아니다 싶으면 방향을 바꾸면 그만이다. "절대성"에 자신을 가둘 필요는 없다.
내 인생 내가 사는 것이다. 성인군자도 참고서적일 뿐 동화될 필요는 없다. 내 인생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진실이다. 그 어떤 종교적인 것들과 바꿀 수 없다.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이 곧 신이고, 자신에게 스스로 최고를 부여하는 가치관이 있을 때, 나는 그 사람을 진정한 의미의 종교인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