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잡담 May 10. 2023

양떼심리

양떼심리


"양떼심리"라는 사회심리학 용어가 있다. 군중심리와 같은 말이다.

사실과 상관없이 양 떼처럼 집단에 동조하는 습성을 말한다. 이것은 솔로몬 애쉬 교수가  "엘리베이터 실험"을 통해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임을 확인시켜 준 바가 있다. 이 실험은 TV를 통해 공개적으로 재연되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으로 시청자들도 군중심리가 어떤 것인지 실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람잡이 역할을 한 10명이 모두 문이 아닌 벽 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실험대상자도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벽 쪽을 바라보더라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왜? 문이 아닌 벽 쪽을 바라볼까?


군중심리를 실험한 내용은 많다. 실험 결과에 공통점이 있다면, 혼자 있었으면 절대로 오류가 나지 않을 문제도 군중 속에 있으면 판단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진실이든 아니든 군중에 동조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군중심리와 유사한 환경심리라는 것도 있다. 실험적으로 “군중=환경” 등식이 성립된다. 예를 들어 창밖을 바라볼 때, 숲이 펼쳐져 있을 때와 건물만 있을 때 뇌파가 다르게 나온다는 것이다. 생체적으로 영향이 있다면 심리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환경심리가 극적으로 활용되는 분야는 예술이다. 성 베드로 성당을 보면, 웅대하고 아름다운 예술성으로 인해 마치 그곳에 신(神)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환상적인 환경은 환상을 자극하는 착란을 가져온다.


대부분의 독재국가에서 군중심리는 우상화 도구로 사용한다. 대규모 집회를 여는 이유도 개인을 군중 속에 가두기 위한 목적이다. 개인에게 군중은 하나의 심리적 감옥으로 작용한다. 지속적으로 그것을 체험하게 되면 개인적인 의지는 점점 약해진다. 세뇌 교육은 그것을 강화하는 학습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 영화 "피바다"를 예로 들면, 역사적인 사실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만 자극하는 "감정팔이" 영화다. 우상화 최고 걸작이라 볼 수 있다. 내용이나 연출은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음악만큼은 웅장하고 감성적이다.

나치 괴벨스가 연출한 야간 군중집회도 유명하다. 어두운 무대에서 히틀러 한 사람만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난다, 어둠 속의 별처럼 그는 특별하게 강조된다. 독재자의 위대성이 각인될 수밖에 없다. 야간 무대에 오른 가수를 조명하는 방식은 그 원조가 괴벨스다. 똑똑하기로 유명한 독일 국민도 거짓 선전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양떼효과는 원시시대부터 유래되어 유전자로 전해져 내려온 인간의 습성이다. 자연에서 약한 동물 중 하나인 인간은 공동체, 즉 집단생활이 아니면 사냥은 힘들었고 맹수의 위협에서 안전하지 못했다.

그 시대에는 경험이 최고의 지식이었다. 군중심리는 생존과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엘리베이터 실험에서 보듯이 원시시대의 유전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양떼효과는 역사의 핏줄을 타고 내려온다. 의미 없는 행동(의식)이나 사고방식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다. 전통이나 관습이 그것이다. 이것은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일지는 몰라도 “사실적인가?"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는가? 기우제는 원시시대의 유물일 뿐 사실이 검증된 행위는 아니다. 제사를 지낼 때 귀신이 와서 음식을 먹고 갈리는 없지만, 관습적으로 지내는 것뿐이다.

전통과 관습은 군중심리의 대표적인 사례다. 관습으로 믿어지는 미신은 우리 주변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부엌 조왕신, 삼신 금줄, 장승과 솟대, 손 없는 날 이사 등등.

민간 신앙은 과학적으로 터무니없지만, 사람들은 쉽게 그것을 부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랜 기간 인류에게 스며들었던 역사성 때문이다. 시간의 무게가 양떼효과를 일으킨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역사적으로 가장 황당한 군중심리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이다.

당시 로마는 사회분열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다신교를 믿는 토착민과 기독교인과의 갈등, 50년 기간에 26명의 황제가 바뀌는 정치적 혼란기에 있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제국 분열을 막기 위해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기독교를 공인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예수는 神인가 아닌가?” 문제로 기독교 내부에 파가 갈라진 것이다. 로마 황제는 종교회의를 통해서 문제 해결에 나섰다. 로마 제국 각지에서 주교들이 모여 그동안 난립했던 교리를 통일시키고 정립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당시 황제의 권력 기반은 예수가 神이라는 쪽이었다.  “예수가 神인가?” 황제는 어느 쪽이 맞는지 투표를 하도록 했다. 니케아 종교회의는 투표를 통해 예수가 神이라고 결정했다.

무슨 반장 선거하는 것도 아니고 투표를 통해 神을 만들 수 있는지 의문이다. 여기에 성령을 더해 소위 “삼위일체론”이 완성되었다. 예수가 神이 아니라는 쪽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숙청당했다.

만일 당시 황제의 권력 기반이 "예수는 신이 아니다"라는 쪽이었으면 삼위일체론은 이단으로 규정되었을 것이고, 반대로 그것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숙청당했을 것이다. 결국 神이라는 것은 인간의 권력에 의해 결정된 하나의 이념이었던 셈이다.


어쨌거나 사후 300년 만에 예수는 투표를 통해 인간에서 神으로 승격되었다. 중세 기독교 황금기를 거치면서 그것이 진실로 굳어져 오늘날에 이르렀다. 1700년 동안 믿어져 왔기에 지금도 투표로 결정된 神을 믿는, 이것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황당한 양떼효과가 아닐까?

정작 예수와 같은 민족인 유대인은 그를 神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는 이슬람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신성을 투표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그들 눈에도 탐탁치 않았던 모양이다.

양은 우두머리를 따른다.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양떼심리는 국가(사회) 권력이 정한 관습, 전통을 따른다. 종교는 대를 이어 내려오는 하나의 양떼심리라고 볼 수 있다.     

살아가는데 종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일 뿐이다. 전통이나 문화를 진리로 착각할 때,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올 것이라고 믿는 망상이나 다를 바가 없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스님처럼 빛나는 별은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일반인 중에 얼마든지 존재한다. 반대로 양심은 없고 도덕과 윤리만 내세우는 위선자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성이다.      

바야흐로 정보의 홍수 시대다. SNS나 유튜브만 봐도 가짜뉴스 가짜정보가 넘친다. 사리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시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모래 속에서 좁쌀 고르듯이 살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듯하다. 이제는 양떼가 아니라 무소의 뿔처럼 살아갈 때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고립되어 혼자 살라는 말이 아니다. 무지의 늪을 넘어서, 진실이 드러나 있는 지평을 당당하게 걸으라는 말이다. 그 길이 무리가 아닌 혼자만의 길이더라도 그것은 뿔처럼 단단한 생(生)일 것이다.          



           



이전 12화 소통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